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42
242화
천재지변 (2)
놈들의 전과로 보나 이 기형적인 판매 지도로 보나 확실히 문제는 있어 보인다. 아니, 리베이트 납품이란 확신이 든다. 지저분한 영업 방식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기업이 아닌가.
하지만 이와 별개로 준철은 인간적인 고민에 잠겨 있었다.
‘왜 하필 오늘이냐…….’
가뭄에 단비 같은 휴가 5일.
지친 심신을 달래기엔 이것도 부족한 시간이다.
부임하자마자 굵직한 사건을 맡으며 밤샘은 예사였고, 주말 반납도 밥 먹듯이 했다. 그런 마당에 한 달 동안 조사해도 증거 하나 잡을 수 없었던 사건을 맡는다? 생각만으로도 몸에서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과장님, 그냥 돌아오신 다음에 다시 얘기 나눠 볼까요.”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으니 황 팀장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럴 시간 여유가 있습니까? 이미 한 달이나 지체한 걸로 아는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저희도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둘까 생각 중입니다.”
“다양한 가능성요?”
“이러나저러나 증거가 안 나온 건 사실이잖습니까. 성진유업의 무혐의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 바닥엔 명백한 범죄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되는 일이 허다하게 많았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가능성이면 생각도 마세요.”
“예?”
“성진유업이 간댕이 부어서 지금 계속 사세를 확장하고 있다면서요.”
“아……. 예.”
“이미 지난 1차 적발 때 나쁜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도 넘어가면 성진유업이 분유 대통령이 될 겁니다.”
1차 적발 때 솜방망이 처벌로 끝내고, 2차 땐 무혐의로 끝낸다? 이건 호랑이 새끼한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다. 그 기세를 몰아 수도권 전체를 다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황 팀장님, 이거 조사 어떻게 진행했습니까?”
“딱히 별다를 게 없었습니다. 성진유업에 해당 사실 통보하고 영업 자료 전부 다 제출하라 했죠. 근데 5년 치 자료를 다 뜯어 봤는데도 증거가 안 나오더군요.”
“그럼 여기 거론된 병원들은 만나 봤습니까?”
“산후조리원요? 네, 만나는 봤습니다만 그것도 소득은…….”
“왜요? 이 병원장들은 겁 좀 주면 실토할 법도 한데.”
“저희 조사 상황을 다 전달받은 모양이에요. 완강히 부인했고 자백도 못 얻었습니다.”
기업은 영악하다.
진전은 없어 보이는데, 당국이 요구하는 자료만 많아지니 조사가 안 풀린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공정위를 안방처럼 들락거린 성진유업 아닌가. 이미 각 병원장들에게
조사 매뉴얼을 다 전달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백을 기대하는 건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격.
뿌리까지 흔들어 놓지 않으면 절대로 홍시는 떨어지지 않는다.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써 봤군요.”
“네. 근데 진전이 없었습니다.”
준철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영업 자료 압수에 자백 유도.
이 정도면 3팀도 할 만큼 다했다. 근데 왜 증거 하나 못 잡았을까? 대체 무슨 기상천외한 리베이트를 고안해 냈기에…….
“과장님, 그래도 휴가는 다녀오세요. 계신 동안 저희도 뭘 놓치고 있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금 이 기분으론 휴가 가도 일 생각만 날 것 같네요.”
준철은 사실상 휴가를 단념했다.
이 자료 몽땅 들고 가 집에서 검토하느니 차라리 출근하는 게 낫지.
무엇보다 이 사건은 준철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저분한 영업 방식에 도가 튼 놈들이 이번엔 또 무슨 획기적인 방법을 개발했을까?
“황 팀장님.”
“네.”
“이거 요약본 말고, 조사 자료 전체 다 복사해서 저한테 한 부 넘겨주세요. 어디가 허점이었는지 같이 파악해 봅시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까지…….”
“아니요. 오늘 해 주세요.”
“……예?”
“주말 동안 검토할 겁니다.”
준철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아무래도 휴가 못 간 한풀이를 여기다 할 것 같다.
“그리고 돌아오는 월요일엔 조사팀 다시 꾸려 봅시다. 이거 좀 길게 싸워야 할 것 같네요.”
“아, 예. 그럼 혹시 카르텔 조사국에 협력 요청을……?”
“뭐 일단 우리 종합국 인력으로 해결해 보죠. 인력 요청해 봐야 어차피 앓는 소리만 들을 테니.”
“그건 그렇죠.”
“3팀도 이번 주말에 이 자료 꼼꼼하게 검토해 주세요.”
주말 반납하고 일 하란 소리였지만 황 팀장은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휴가 반납한 과장 앞에서 그까짓 주말쯤이야…….
***
이른 아침 월요일.
서 팀장은 긴장한 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첫 휴가로 들떠 있던 과장님이 돌연 휴가를 취소하지 않았나.
사회 초년생이지만 그 또한 군필자였다. 휴가 짤린 고참들이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란 걸 잘 안다.
‘대체 얼마나 큰 사건이기에…….’
차라리 업무라도 많으면 좋겠건만 애석하게도 그는 마침 맡고 있는 사건이 없었다.
긴 한숨을 내쉬며 과장실 문을 열자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얼굴이 그를 반겼다.
“일찍 왔네.”
“아, 예.”
“좋은 아침.”
“예……. 과장님도 좋은 아침입니다.”
과장님은 한눈에 봐도 좋은 아침을 맞이한 사람이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찌든 땀 냄새, 그리고 금요일에 봤던 복장. 지난 주말 내리 반납하고 집무실을 지키고 있었다는 걸 말해 준다.
“커피 한잔할래?”
“괜찮습니다. 마시고 왔습니다.”
“한 잔 더 마셔. 당분간 밤 좀 많이 새워야겠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저건 과장님이 폭탄 줄 때 쓰는 단골 멘트다. 저 사람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면 어김없이 업무 지옥이 펼쳐졌다.
커피를 사약 마시듯 비우니 준철이 서류 하나를 건넸다.
“큰일이 하나 떨어졌는데 적임자를 찾기 힘드네.”
“…….”
“서 팀장, 병원 리베이트 사건 나랑 한번 해 봤지?”
“네. 한성대병원 사건요.”
“그거랑 조금 비슷한 사건인데, 우리 이거 한번 맡아 보자. 우리 지금 전문 인력이 필요해.”
뭔가 이상했다. 겨우 딱 한 번 맡아 봤는데 전문가라고 할 수 있나.
“과장님, 제가 리베이트 사건은 딱 한 번 맡아 봤는데요. 전문가라 하기에는.”
“그거 내 밑에서 맡은 조사잖아. 그럼 속성으로 배운 거야. 서 팀장 전문가 맞아.”
아니라고 한들 무엇 하리.
서 팀장은 체념하며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사건 개요는 간단했다.
“성진유업이 산후조리원한테 리베이트를 돌렸다. 연루된 업체가 총 50곳. 10년 전에도 같은 죄 저질러서 적발된 적 있는데, 이 새끼들 버릇 못 고쳤어.”
뒷장으로 넘기니 10년 전에 왜 버릇을 못 고쳤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200억 짜리 리베이트 사건이 겨우 2억 과징금으로 끝나 버렸다. 그때 버릇을 잘못 들여 놓은 대가가 320억짜리 리베이트로 돌아왔다.
“당연히 이번엔 그 버릇 제대로 고쳐 줘야겠지? 과징금 단단히 물릴 거다.”
이 양반이 뭔가를 결심할 땐 항상 피바람이 몰려왔다.
서 팀장은 속으로 죽었구나 싶었다.
“근데 과장님. 성진유업이면 거기 아닙니까? 그 갑질 녹취록.”
“어, 서 팀장도 그 사건 알아?”
“대한민국에서 그 사건 모르면 간첩이죠.”
성진유업은 업무 초짜인 서 팀장에게도 익숙한 기업이었다.
영업 사원이 편의점 사장에게 폭언과 욕설을 했던가?
당시 사회적 파장이 엄청나서 업계에 대대적인 밀어 넣기, 끼워 팔기 단속까지 벌인 것으로 기억한다.
“서 팀장 제법이다? 자기 부임하기 전일 텐데.”
“제가 또 고시 공부하면서도 뉴스는 꼬박 챙겨 봤습니다.”
서 팀장은 과장님의 칭찬에 잠시 우쭐해졌다.
“그래서 김성진 회장이 해당 직원 해고하고, 사과 성명까지 냈잖습니까. 당시 법원도 죄질과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대리점 갑질로는 최대 금액이었던 130억대를 부과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준철은 흡족하게 웃었다.
“좋다, 서 팀장. 그럼 내가 성진유업에 대해선 두 번 설명할 필요 없겠네.”
“네. 제가 1심 판결까지 지켜볼 정도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자식들 저질 영업 방식 아직도 못 버렸구먼. 갑질에 이어 리베이트까지……. 아주 가관입니다.”
서 팀장은 준철이 워낙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라 이번 기회에 점수 좀 따고 싶었다.
“그럼 그 뒷내용도 알고 있겠지?”
“예?”
“1심 판결까지 지켜봤다며. 3심 최종 선고 결과도 아는 거 아니야?”
“3, 3심까지 갔습니까?”
1심에서 130억대 과징금 판결.
여기까지가 국민들에게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놈들은 이걸 3심까지 끌며 과징금을 5억대로 줄였다. 앞에선 사과하고 뒤에선 초호화 변호인단을 동원하여 과징금을 악착같이 깎아 낸 것이다.
“아……. 그걸 5억대로 줄이기까지 했군요. 몰랐습니다.”
“그럴 수 있어. 고시 공부할 때 누가 기업 3심까지 지켜 봐.”
“솔직히 전 그 사건 항소할 줄도 몰랐습니다…….”
“이놈들 이번에도 그럴 거야. 우리도 이 사건 재판까지 갈 각오해야 돼. 최소 3심까지.”
서 팀장은 그제야 왜 과장님이 휴가를 반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디 보통 독종들인가. 진짜로 재판 각오하고 싸워야 할 상대다.
“근데 과장님, 뭐 대강 자료 보니 사건 금방 끝날 것 같은데 지금 어디까지 진행된 겁니까?”
“아무것도 진전된 게 없다.”
“예?”
“3팀이 한 달 동안 조사했는데 증거를 못 찾았어. 이 자식들 리베이트를 보통 방법으로 한 것 같지 않아.”
믿기지가 않는다.
조리원 50곳을 털면 진작 나왔어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아마 1차 적발 때 더욱 교묘해지는 방법을 배운 모양이야.”
“아…….”
“이제부터 우리가 조사하면서 찾아야 돼.”
준철은 복사본 서류를 하나 건넸다.
“일단 이거 가져가서 사건 개요부터 파악해. 파악 다 끝나면 바로 3팀으로 붙는다.”
“네.”
“모르는 거 있으면 황 팀장님한테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알겠습니다.”
서 팀장이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자 준철은 고민에 잠겼다.
사실 준철도 이유를 몰랐다.
황 팀장이 무언가 무리를 한 것도 아니고, 조사 과정에서 실수를 한 것도 아니다. 매뉴얼대로 영업 자료 다 깠고 거기서 문제 될 만한 것들을 추렸다.
지난 주말 내내 조사 과정을 되짚어 봐도 무엇을 놓쳤는지 알 수 없었다.
보통의 리베이트는 회사 영업 자료에서 각 산부인과에 돈 쏜 흔적이 바로 나와야 하는데,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다.
‘혹시…… 해외 계좌 송금? 아니야. 산부인과 하나 구워삶는데 돈세탁까지 하진 않았겠지.’
그건 수수료가 더 많이 나올 터다.
‘백화점 상품권? 아니면 직원들 월급으로 털기?’
그것도 아니다. 명색이 성진유업이 코스피 200에 상장된 기업인데 월급 장난을 어떻게 칠 수 있겠나.
‘대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