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43
243화
성진유업
유 국장은 휴가도 반납하며 일에 몰두하는 준철이 미안하면서도 대견스러웠다.
과연 무데뽀 과장이다.
팀장 하나가 어려운 사건을 가져오니 일말의 미련도 없이 휴가를 던져 버린다. 그러더니 주말까지 반납하며 그 즉시 조사 착수, 오늘은 성진유업에 관한 종합 자료까지 만들어 왔다.
출세만 바라보는 ‘요즘 것’들과 감히 비교도 안 되는 열정이었다. 이놈이야말로 걸어 다니는 공직 사회의 보물 아닌가.
“……압수수색을 하겠다고? 성진유업이 아니라 성진그룹 전 계열사 자료를?”
“네.”
분명 그렇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 환상이 단숨에 깨져 버렸다.
이 무슨 무지막지한 제안이란 말인가.
“이 과장, 이게 그렇게 당당하게 할 소리냐?”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필요는 얼어 죽을! 한 달 동안 조사했는데 증거 안 나왔으면 증거불충분이지 왜 전 계열사 자료 압수야?”
“하지만…….”
“표적 수사가 뭐 거창한 게 아니다. 죄가 없으면 나올 때까지 파고드는 거, 그게 바로 표적 수사야.”
유 국장은 이 무지막지한 조사를 절대로 용인해 줄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판만 요란하게 키우고 실속 없이 끝날 조사다.
“시끄럽고 너 그냥 휴가 가라. 원래 사람이 오래 못 쉬고 일만 하면 병 생기는 법이다.”
“…….”
“지난주에 신청한 휴가, 내일 화요일부터 3일, 아니 4일 간 처리시킬 거야. 다음 주까지 집에 꼼짝 말고 붙어 있어.”
유 국장이 인터폰을 들자 준철이 다급하게 외쳤다.
“국장님, 저도 어지간하면 넘어가려 했습니다. 근데 상대가 성진유업 아닙니까.”
“뭐?”
“영업 방식 지저분하기론 이미 정평이 나 있는 놈들이에요. 판매 지도만 봐도 딱 리베이트 납품이란 게 보일 정도입니다.”
“아니, 그래도…….”
“심지어 동종 전과도 있습니다. 10년 전에도 분유 리베이트로 한 차례 적발 당했습니다. 이런 놈들이 정말 죄가 없을까요?”
유 국장의 말문이 막히자 준철이 기세를 올렸다.
“정말 증거를 못 찾았을 뿐입니다. 이건 그냥 10년 전에 적발 당하고 더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 낸 거예요. 계속 두면 수도권 신생아들 전체가 리베이트 분유 먹고 자랄 겁니다.”
전혀 과장이 아니다. 성진유업의 사세 확장 속도를 감안하면 머잖은 미래가 될 것이다.
유 국장도 이 말엔 반박할 수 없었는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근데 왜 증거가 안 나와?”
“원래 이런 사건에 물증 잘 안 나오는 거 아시잖아요.”
“잘 안 나오는 물증이 성진그룹 전 계열사 자료를 보면 나올 것 같고?”
“분명 어딘가엔 흔적이 남아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아주 기상천외한 로비 방식이었을 겁니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반드시란 말에 유 국장이 코웃음을 쳤다.
“이 과장, 좀 솔직해져라. 100% 찾아낼 자신은 없으니까 이거 나한테 가져온 거 아니냐?”
“…….”
“뒤탈 걱정 없으면 나한테 가져오지도 않았겠지. 무슨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어.”
준철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유 국장의 지적이 맞았다. 본래 과장은 조사 진행 여부를 다 재량껏 결정한다.
이렇게 특별히 보고를 올리는 경우는 조사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 때, 그래서 기업의 큰 반발이 예상될 때뿐이다.
그 뒷감당을 해 줄 수 있는 건 국장이기 때문에.
“여우 같은 놈.”
유 국장은 눈을 한 번 흘겼다.
다른 과장이 이런 앙큼한 짓을 했더라면 악다구니를 질렀을 텐데……. 맡는 사건마다 성공적으로 마치는 준철에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이건 백지화가 맞아. 증거도 안 잡히는 사건에 조사 수위를 높여? 이건 한 끗 패 들고 전 재산 다 베팅하는 격이지.”
“…….”
“더군다나 상대는 코스피 200에 상장된 기업이다. 그런 사건이 무혐의로 끝나면? 성진유업이 아니라 그 주식 산 개미들이 널 매장시킬 거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래도 할 거야?”
준철은 일말의 주저 없이 답했다.
“예. 그래도 한번 해 보겠습니다.”
유 국장은 고개를 저었다. 혈기왕성한 젊은 놈을 설득하는 것보단 자신의 고집을 꺾는 게 빨라 보였다.
대신 그는 뒤탈이 가장 적게 날 수 있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렇게 하자. 연루된 산후조리원이 50곳이라고 했지? 그거 병원장들 싹 다 소환해.”
“거길 치자고요?”
“그래. 어차피 개인 병원장들 아니야. 그리고 네가 이간질 선수기도 하고. 내가 뭐 유도심문 했네, 안 했네, 가지고 쩨쩨하게 굴지 않을 테니까 그걸로 한 놈만 자빠트려. 그럼
나머지 리베이트도 다 나온다.”
사실 이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다.
담합 사건은 한 놈이 무너지면 다 걸리게 되어 있지만 이건 각 병원들의 독립 업체 아닌가. 한 놈이 자백한다고 다른 놈의 자백을 얻어 낼 수 없다.
“그건 차악이지 최선의 방법이 아닙니다.”
“최선 타령하다가 네가 역으로 당하는 수가 있어. 너 성진유업 성깔 몰라? 이 새끼들은 무조건 3심까지 가.”
“그러니까 계속 당하죠.”
“뭐?”
“당국은 성진그룹과 길게 싸우기 싫어서 솜방망이 처벌 내리고, 성진은 걸려 봤자 미미한 처벌에 그치니 계속 이런 일 자행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결과가 바로 오늘이었다. 놈들은 더욱 교묘해졌으며, 빈틈도 없어졌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법망을 빠져나갔는지 모르겠지만 이후에 더욱 교묘해진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번엔 재고 따지는 거 없이 무조건 원칙대로 처벌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대책도 없이…….”
“사실 짚이는 게 하나 있습니다. 우회 리베이트가 벌어졌을 가능성요.”
“우회?”
확신할 순 없다. 다만 김성균으로 살았을 때 늘 써먹던 방법이라 그게 마음에 걸렸다. 바로 자회사를 통한 간접(우회) 리베이트.
“본사 영업 자료가 깨끗한 건, 딴 곳에서 지저분한 일을 처리해 줬으니 그랬을 겁니다.”
이건 사실 제약 회사들이 자주 써먹는 리베이트 방식이었다.
제약 회사는 병원에게 직접 리베이트 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 영업대행사(CSO)를 끼워 납품을 따낸다. 이러면 당국에 적발됐을 때 모든 책임을 CSO로 돌려 책임을 모면할 수 있다.
산후조리원도 결국엔 병원이나 다름없는데 비슷한 방식이 쓰이지 않았을까? 아직 추측이지만 준철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선 반드시 성진그룹 전 계열사 자료를 뒤져 봐야 한다.
유 국장도 마음이 동했는지 한동안 고심에 잠겼다. 지금까지 들어 봤던 보고 중 가장 현실성 있는 추론이다.
“옌장. 내가 절대 설득 안 당하려 했는데.”
그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봐라. 난 실패했을 때 뒤에서 책임만 져 주면 되는 거지?”
***
한자리에 모인 성진유업 임원들은 하나같이 얼빠진 얼굴이었다.
조사 진척이 없어 금방 끝날 사건이라 생각했건만, 갑자기 공정위가 전 계열사 자료를 요구한다.
보통 조사 수위가 높아지는 건 그럴 만한 핵심 증거가 포착되어서인데, 이건 정말이지 예측도 못 했다.
“할 말 있는 사람부터 해 봐.”
“…….”
“없어? 나한테 할 말 많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김성진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증거불충분으로 곧 끝날 사건이라며! 전 계열사 자료 압수는 뭐야?!”
“…….”
“김 사장!”
“예! 회장님.”
“왜 자네가 입 다물고 있지?”
불똥은 이 리베이트 사태를 총 주도했던 김 사장에게로 쏠렸다.
“저, 저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유를 몰라?”
“대책이 없다는 게 아니라 공정위가 왜 저런 악수를 두는지 모르겠습니다.”
김 사장은 전전긍긍하며 칼같이 답했다.
“공정위가 악수를 뒀다?”
“네. 저희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아직 증거는 나온 게 전혀 없습니다.”
“근데 조사 수위가 왜 높아졌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냥 배짱 조사로밖에 안 보입니다. 아무리 봐도 조사 수위를 높일 명분이 없었습니다.”
김 사장은 억울했다. 병원들 입단속도 다 시켰겠다, 배신자도 안 나왔겠다, 영업 자료는 깨끗하기 그지없겠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놈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냥 배짱 조사다.
“배짱 조사라. 진짜로 걸리는 게 하나 없다?”
“예. 오죽하면 공정위가 저희 5년 치 자료를 다 털어 갔겠습니까. 막상 증거 안 나오니 계속 자료만 요구하고 있던 실정이었습니다.”
“그럼 저 배짱 조사엔 어떻게 응할 생각이야?”
“무조건 버텨야죠. 조심스런 추측입니다만 공정위는 괜히 수위를 높여 저희 자백을 받아 낼 요량인가 봅니다.”
이때 다른 임원이 거들었다.
“회장님, 혹여나 그 리베이트가 적발된다 해도 저희가 이길 싸움입니다. 아닌 말로 ‘그 방법’은 절대로 대가성 입증 못 합니다.”
“맞습니다. 혹여 걸리더라도 저희가 실력으로 따낸 거라 우기면 그만입니다.”
성진유업은 재계에서 손꼽히는 갑질, 리베이트 선수들이었다. 자회사를 통한 우회 리베이트는 물론, 이것이 걸렸을 경우도 대비하여 이중 안전장치를 해 놨다.
공정위가 운 좋게 1차 안전장치를 풀었다 해도 2차에서 곧 가로막힐 것이다.
“나 빼고 다 천하태평들이네? 우려스럽지도 않나 봐?”
“그만큼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그래도 회장님이 불안한 기색을 보이자 김 사장은 3차 안전장치를 꺼냈다.
“회장님, 아닌 말로 저희가 뭐 이번 한 번 걸렸습니까. 지난 적발 때도 걸려서 줄초상 났죠. 근데 겨우 과징금 2억으로 끝났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이번에 적발? 그래 봤자 5억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 5억도 다 내는 것이 아니다.
성진유업은 끝까지 싸워 이 5억도 1억으로 줄일 요량이었다. 130억대 과징금을 5억으로 줄였던 지난 녹취록 파문에 비하면 비교할 것도 못 된다.
“최선을 다해 막겠습니다. 저것들 얼마 못 갈 겁니다.”
재차 설득하자 회장님 목소리에도 노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구워삶았던 병원장들은 어떻게 됐어?”
“조사 상황 계속 전달하며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용인할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야. 만약 배신자 한 놈이라도 나오면 나 더 이상 가만 안 있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사람들도 잃는 게 많아 절대 배신자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김성진 회장은 조금 만족스런 얼굴이었다.
물샐틈없이 방어하는 것은 물론, 걸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보험까지 제대로다.
“또한 만약 걸린다 한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고 물러나겠습니다. 회장님께선 걱정 마십쇼.”
김 회장 얼굴이 여느 때보다 밝아졌다.
꼬리 자르기. 이건 성진유업의 고질적인 방법 아닌가. 지난 녹취록 파문 때도 영업 사원의 잘못으로 넘어가 버렸다. 사장단 꼬리 자르기면 놈들도 더 이상 못 덤비겠지.
“우리 충성스런 임원들 덕에 이 늙은이 마음이 놓이는구먼. 그래도 당국의 조사는 조심해. 항상 문제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생하니.”
“예. 명심하겠습니다.”
회의는 아주 좋은 분위기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