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44
244화
성진유업 (2)
리베이트 전문가 서도윤은 일주일째 지속된 탐문 조사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만나 본 병원장만 20여 명. 성진유업의 분유를 가장 많이 쓴 조리원들이다.
체급 큰 놈들 위주로 겁도 주고 회유도 하며 자백을 유도해 봤지만, 자백은커녕 조리원 앞에서 문전박대만 당하다 나왔다.
더러 어떤 곳은 영업방해죄로 고소할 거라며 국민신문고에 민원까지 올려 버렸다.
“어깨 펴. 세상 끝났냐.”
“죄송합니다, 과장님…….”
“죄송은 무슨. 어차피 자백 기대는 안 하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성과가 없었네요…….”
“성과가 왜 없어? 네 덕분에 그쪽 분위기 많이 뒤숭숭해졌을 거다. 그거면 된 거야.”
준철은 의기소침한 서 팀장 어깨를 툭- 쳤다.
불쌍한 놈이다. 고작 질의응답 몇 번 했다고 국민신문고에 민원이 다섯 건이나 접수되어 버렸다.
담당 조사관이 산후조리원에 찾아와 폭언 욕설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산모와 아기들이 큰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한다. 마녀사냥도 이 정도로 억지스럽진 않을 텐데.
“근데 진짜로 문전박대를 당했어?”
“예. 가장 규모가 큰 서울권 조리원 다섯 곳은 아예 출입문도 못 넘어 봤습니다. 병원장이 미리 변호사 대동시켜 놓고 영장 가져오라고 악다구니를 지르더군요.”
“허, 참.”
“솔직히 말하면……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노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렵사리 조사한 몇 곳도 우리 조사 상황을 훤히 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들을수록 기가 찼다.
아무리 조사가 서로 불편한 거라지만 이렇게 담당자를 개무시할 수 있는 건가.
이건 단순히 괘씸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설사 진짜로 죄가 없는 곳이라 하더라도 조사 과정에선 당국을 존중해 준다.
“황 팀장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두 가지 중 하나겠네요. 안 걸릴 거란 확신, 아니면 당국에게 세게 나가야 된다는 누군가의 지령.”
“저랑 생각이 똑같군요. 그 둘 중 어느 거라 생각하십니까?”
“전 누군가 뒤에서 지령을 내렸다 봅니다. 아니면 잘 납득이 안 되네요.”
그 누군가는 바로 이 리베이트의 총설계자인 성진유업.
사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진짜로 억울한 사람들은 조사에 적극 임해 자신의 억울함을 풀려고 한다. 저렇게 사납게 나오는 건 위험하고, 숨기고 싶은 자료가 있단
뜻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이거 참…… 성진유업이 계속 우리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러게요. 확실히 선수긴 선수군요.”
검찰 취조실도 초범들에게나 진실의 방이지, 누범들에겐 커피 잘 타는 다방집이다.
공정위를 한두 번 상대해 본 게 아닌 성진유업이니, 이미 그에 대한 내성이 상당할 터였다.
“과장님, 사실 성진유업이 자료 협조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전 계열사 영업 자료를 내달라 하니 무슨 영업 기밀 핑계로 계속 거부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버티기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우리 진 빼는 겁니까?”
“네. 저희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역시나 베테랑들답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 협조적이지 않았다.
사실 공정위의 자료 요구는 영장 없는 압수수색이나 다름없다. 어차피 기업 입장에선 오래 버틸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자료 반출을 거부하는 건 기 싸움에서 지지 않겠다는 얘기. 아마 시간만 끌면 조사가 어영부영 끝날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럼 별수 없네요. 영장 갑시다.”
“……예?”
“압수수색영장요. 오늘 검찰에 청구하고 이번 주 안으로 싹 다 받아 와 주세요.”
이에 황 팀장이 난색을 표했다.
“과장님, 이게 영장을 신청하기엔 애매한 감이 있습니다.”
“뭐가요?”
“증거가 미미한 건 사실이니까요. 사실 이렇다 할 증거도 못 잡은 상태에서 영장 청구하면……. 법원도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이게 무슨 구속영장도 아니고 겨우 압수수색인데 법원 눈치 볼 필요 있나요.”
“하지만…….”
“기업의 정당한 사유 없는 자료 반출 거부, 압수수색은 이 조건만 충족하면 됩니다. 진행해 주세요.”
황 팀장은 문득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사가 잘 안 풀려 보고하긴 했지만, 이렇게 조사 수위를 확 높여도 되는 걸까. 그러다 만약 조사가 실패로 끝나면 그 뒷감당은 어찌하려고…….
“걱정 마세요. 이거 어차피 공포탄입니다.”
“공포탄요?”
“놈들은 영장 나오기 전에 자료 이관할 거예요. 근데 우리 공정위를 너무 띄엄띄엄 보고 있단 말이죠.”
“하면…….”
“남은 조사 내내 놈들 페이스에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과감한 모습도 보여 줄 필요 있습니다.”
계속해서 놈들이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긴 공정위가 얼마나 만만하겠나.
녹취록 파문 땐 과징금 130억을 5억으로 줄여 봤고, 지난 1차 적발 땐 과징금 2억으로 마무리도 지어 봤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공정위는 증거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있으니
한없이 우스울 것이다.
“황 팀장님, 이건 단순한 기 싸움이 아니에요. 자료 하나 내주는 데도 꺼드럭거리는 놈들이 소환 조사엔 제대로 응하겠습니까? 소명 요구는 제대로 하겠습니까?”
“…….”
“서 팀장, 산후조리원 가니까 이미 변호사들 대기하고 있다 했지?”
“예? 아, 예.”
“그 변호사들 다 성진유업 법무팀일걸요. 이건 우리한테 온몸으로 무력 시위하는 겁니다. 자기들 빈정 상하는 처벌 떨어지면 무조건 항소하겠다, 건드리지 말아라.”
주저하던 황 팀장이 이내 끄덕였다.
“듣고 보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놈들 기세 한번 꺾을 필요는 있겠군요.”
“네. 어차피 긴 싸움으로 갈 거 서열 정리 한번 확실히 하고 갑시다.”
“그럼 영장 작업은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나올 수 있게 신경 써 보죠.”
준철은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서 팀장, 성진유업에 전화해서 날짜 좀 잡아 봐. 얼굴 한번 보자.”
“예.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돌아가자 준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모함과 결단력은 한 끗 차이다. 조사가 성공하면 결단력인 거고, 반대면 무모했던 거다. 오만방자한 성진유업한테 역공을 당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
성진유업 본사는 강남 노른자위 땅에 위풍당당 세워져 있었다.
이 벽돌 한 장, 한 장이 다 편의점주들의 피눈물과 리베이트 분유로 세워졌다 생각하니 흉물도 이런 흉물이 없다.
“불필요한 기 싸움 그만합시다. 어차피 내줄 자료 왜 버티는 거예요?”
첫 만남은 성진그룹 본사에서 진행되었다.
대표로 나온 김서원 사장은 표정부터 오만방자했다. 무슨 바퀴벌레 보듯 시큰둥하지 않은가.
“그 얘긴 저희 쪽에서 해야 할 말 같습니다만? 언제까지 이런 표적 수사를 계속하실 겁니까?”
“표적 수사?”
“증거가 안 나오면 증거불충분으로 종결이 되어야지, 왜 조사 수위가 높아지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진짜 증거가 안 나오는지 확인해 보는 거 아니에요. 전 계열사 영업 자료 넘겨요. 여기서도 깨끗하면 우리도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허허. 젊은 과장님이 우릴 무슨 핫바지로 아시네.”
김 사장은 한심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먼지털이 조사 아니요. 왜? 그 계열사에서 우리 회장님 비자금이라도 찾으시려고?”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만.”
“아니긴 뭘 아니야. 본조사 안 풀리면 별건조사 치는 게 공무원의 흔한 꼼순데. 꿈 깨쇼. 우린 죄 없어. 앞으로의 조사도 우리가 도울 수 있는 한에서 도울 겁니다.”
준철이 코웃음을 쳤다. 심기 불편해진 김 사장이 바로 쏘아붙였다.
“왜 웃지?”
“살다 살다 이렇게 안하무인인 놈들은 또 처음이네. 누구 마음대로 도울 수 있는 범위에서 도와, 전력을 다해서 조사에 협조해야지.”
“증거도 못 잡은 놈들이…….”
“한 가지만 물읍시다. 우회 리베이트인가?”
순간 김 사장이 할 말을 잃었다.
“뭐?”
“반응 보니까 딱 맞네. 자회사를 통한 우회 리베이트. 어쩐지 본사 영업 자료가 깔끔하더라니.”
“……떠보지 마. 이거 유도신문이야!”
“당신 얼굴이 이미 자백 다 하고 있는 뭐 나한테 떠보네 마넵니까.”
김 사장이 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그 자체가 또 다른 자백이나 다름없었다.
“근데도 이렇게 위풍당당하신 걸 보면 뭐 안전장치를 하나 더 걸었나 봅니다?”
“…….”
“대체 뭘까. 뭐 성진유업 정도 되는 기업이 백화점 상품권 같은 싸구려 리베이트를 하진 않았을 거 같고. 학회 지원비나 기부금 같은 로비는 개인 병원엔 잘 쓰이지 않겠고.”
김 사장은 아차 싶었다.
젊은 과장 놈이라 만만하게 봤는데 보통내기가 아니다. 은근슬쩍 떠보면서 계속 반응을 관찰한다. 이대로 가다간 본전도 못 찾을 성싶었다.
“오 부장.”
“예.”
“우리 전 계열사 자료 그냥 넘겨줘.”
그리 말하며 준철에게 쏘아붙였다.
“약속은 지키리라 믿습니다. 분명 별건조사 안 치기로 하셨지요? 어디 그 자료 가져가서 얼마나 대단한 증거가 나오는지 두고 봅시다.”
“차도 아직 다 안 식었는데 몇 가지 좀 더 물어봅시다.”
준철은 미지근한 차를 홀짝였다.
“대체 무슨 안전장치를 걸었기에 이렇게 자신감이 넘쳐요?”
“…….”
“이번엔 얼마나 또 기상천외한 로비를 개발해 낸 겁니까?”
이에 놈이 비열하게 웃었다.
어차피 얘기가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서로 더 숨길 것도 없다.
“그건 직접 알아보쇼. 근데 알아낸다 해도 우리 처벌 못 할 겁니다.”
“오호라, 알아도 처벌 못 하는 로비? 이거 참 구미가 당기는데요.”
“다 잡수셨으면 그만 일어나시지요. 어차피 우린 자백 절대 안 합니다.”
준철은 끌끌 웃으면서 일어났다.
“바라던 바요. 절대로 자백하지 마세요.”
그렇게 문을 나서기 전, 다시 놈을 노려보며 강조했다.
“절대, 절대, 절대 자백하지 마세요.”
“뭐?”
“우리가 다 밝혀내고 그에 합당한 과징금 부과해 버릴 거니까. 정상참작? 국물도 없습니다. 이번에 성진유업 못된 버릇 좀 고쳐 봅시다.”
혼자 남게 된 김 사장은 탁자에 있는 찻잔을 쓸어 버렸다.
“저, 저 저 새끼 대체 뭐야!”
젊은 놈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다.
지지부진한 조사 상황을 보면 겨우 협박일 뿐인데, 왜 이렇게 섬뜩하게 느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