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46
246화
대가성 입증, 포기
한자리에 모인 병원장 10명은 아무도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도착한 공정위의 공문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우회 리베이트는 물론, 이 로비가 대출 특혜였단 사실까지 모두 조사망에 걸려들지 않았나.
공정위는 입 맞출 시간도 주지 않으려는 것인지 급하게 면담 날짜를 잡았고, 당연하게도 마땅한 변명은 준비되지 않았다.
“버티기만 해도 이길 싸움이라더니……. 이거 성진유업의 계산이 잘못된 거 아닙니까?”
“맞아요. 로비 실체 모두 파악한 거 같은데 대체 뭐라 변명합니까.”
한둘 시작된 병원장들의 원성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성진유업은 입만 다물면 모두가 안전할 것이라고 말하며 병원장들을 입단속했다. 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곧 종결될 거란 전망과 달리, 공정위는 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성진 전 계열사를
압수수색해 버렸다.
조사 진도를 보니 구속 수사도 시간문제다.
“이제 우리도 냉정하게 생각 좀 해 봅시다. 어느 줄 탈지 결정해야 될 순간이 왔어요.”
“줄? 박 원장님, 이제 와 뭐 공정위한테 붙어먹기라도 하자는 겁니까.”
“대책 없을 땐 자백이라도 빨리하는 게 나아요. 처벌 수위라도 줄여야지.”
“자백은 무슨! 그건 배신이야. 지금까지 함께 버틴 병원들 다 팔아먹는 거라고.”
“그럼 대책 있어? 이대로 가면 영업정지 절대 못 막아.”
“하이구- 자백하면 공정위가 퍽이나 처벌 수위 줄여 주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
회의장이 양분되자 상석에 앉아 있던 홍 원장이 입을 열었다. 그는 연루 업체 중 가장 큰 조리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 그룹의 실질적 리더였다.
“다들 자중하세요. 대처 방안을 논의하기에도…….”
“아, 홍 원장님이 대답 좀 해 보세요. 이미 늦은 거 아닙니까?”
“아니, 아직 늦지 않았어!”
홍 원장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묵직한 말을 던졌다.
“그건 각자 판단해야죠. 근데 이 중에 성진유업 대출 없이 조리원 운영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그건…….”
“있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십쇼. 아무도 말리지 않습니다.”
그 말에 궁둥이를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모두 생계형 개원의들이었다.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저출산 여파는 한국 산부인과의 혹한기를 의미하기도 했다. 매년 산부인과 전문의는 동일하게 나오는데 출생아만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국엔 특유의 조리원 문화가 있다는 것.
건물을 최신식으로 리모델링하여 산모들에게 호텔식 조리원을 제공했고, 이는 모두 비급여 항목이라 부르는 게 값이었다.
업계에선 이미 산부인과 병원장이 호텔 지배인으로 불린 지 오래였다. 병원 적자를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조리원밖에 없었으니, 이들에게 조리원은 생존의 문제였다.
그래서 산부인과는 가장 전망이 어두우면서도, 가장 개원비용이 많이 드는 아이러니한 분과였다.
성진유업은 이 간극을 잘 파고들었다. 개원의들에게 막대한 창업 비용을 대주며 자사 분유 단독 납품을 약속받았다. 거기에 산모들이 먹는 유제품은 덤.
비록 성진 분유의 평판이 그리 좋진 않았지만, 10년 만기, 무이자 대출이란 파격적 조건 앞엔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난 못 하겠습니다. 같은 돈 은행에서 빌리면 만기마다 대출 갈아타고, 금리는 무섭게 치솟죠. 내 주변에 은행 이자 감당 못 해서 파산한 병원이 한둘 아닙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까?”
회의실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정위 처벌보다 무서운 건 성진유업의 대출 회수다. 말은 안 해도 모두 같은 심정일 것이다.
“우리 다 어느 정도 각오하고 뛰어든 거잖아요.”
“홍 원장님…… 아무리 그래도 뭐 대책이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맞아요. 공정위 공문 보면 이미 우리 수법은 다 드러났습니다.”
홍 원장은 무심하게 답했다.
“그건 성진을 믿어 봅시다.”
“아니……. 성진만 믿고 있다 이 꼴을 당한 거 아니에요. 그놈들을 어떻게 또 믿습니까.”
“우린 의료 전문가들이지만 법에는 문외한들이요. 성진그룹은 분명 이거 다 밝혀져도 어차피 대가성 입증 못 한다 했어요.”
병원장들은 그들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모든 게 들통나도 안전하단 설명이 있었다. 대가성을 입증하기 어렵다고 했나?
1억을 돈으로 받으면 문제가 되지만, 상응하는 대가로 받으면 처벌이 어렵다고 한다. 게다가 이건 이자를 면제해 준 경우라, 대가성을 더더욱 입증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성진그룹을 또 믿는다는 게…….”
“나 또한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게 유감스럽습니다. 근데 성진그룹 만큼 편법에 검증된 기업 있습니까?”
“…….”
“우린 그 커리어만 믿으면 돼. 분명 법의 허점을 잘 찾아내줄 겁니다.”
그 말 만큼은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성진은 녹취록 파문 때도 과징금 130억을 5억으로 만들었고, 비슷한 리베이트 적발도 2억으로 마무리 지었다.
남에게는 이게 악명일지 모르나 공모자들에겐 신뢰도다. 성진유업은 자타공인 이 분야 최고 권위자다.
“그래도 공정위가 너무 광폭 행보를 보이는데…….”
“그 또한 얼마 못 갈 겁니다.”
“홍 원장님은 어떻게 그리 확신하세요?”
“공정위가 진짜 처벌하려 덤볐으면 우리보다 먼저 언론에 뿌려 버렸겠죠. 지난 1차 적발은 그렇게 했습니다.”
지난 1차 적발 때 공정위는 모든 자료를 언론에 실시간으로 뿌리며 여론몰이를 했다.
하지만 성진유업의 비리 소식은 대중에게 별로 놀랄 만한 일도 아니어서 크게 관심을 끌지 못했다.
공론화에 실패한 공정위는 결국 조사 동력을 크게 잃으며 유야무야 2억대 과징금으로 끝냈다.
하물며 이번 사건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인터넷 뉴스조차 안 나가지 않았나. 적당히 찔러 보다 몇 억대 과징금으로 끝날 사건이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이 중에 자백할 사람 있으면 이 자리에서 나가 주세요. 있습니까?”
뒤숭숭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홍 원장이 웃음을 띠웠다.
“좋습니다. 그럼 우리 내일 면담 때 잘해 봅시다.”
***
병원장들과의 첫 대면.
협조를 바라진 않았지만 이렇게 심통 가득한 얼굴로 반길 줄은 몰랐다. 준철은 슬쩍 서 팀장에게 눈빛을 보냈다.
‘우리 파악한 자료 넘겼어?’
‘예……. 넘겼습니다.’
오호라. 아는데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안녕하세요, 공정위 이준철 과장입니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날선 공격이 이어졌다.
“이 과장님, 그만하시죠. 가뜩이나 불황에 허덕이는 산부인과를 왜 그리 못 잡아먹어 안달입니까?”
“맞아요. 병원 적자를 조리원에서 만회하는 게 그리 못마땅하십니까?”
방귀 뀐 놈들이 성낸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다.
너무도 당당한 태도에 준철은 살짝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기…… 저희가 드린 공문 읽어 보셨나요?”
“네. 아주 잘 봤습니다. 선량한 기업 좌표 찍고 표적 수사 하셨더군요.”
“선량……. 뭐라고요?”
“전 계열사 자료 털면 어느 기업이 남아나? 근데 거기서도 우리가 뒷돈 받았단 정황은 못 밝혀 냈죠?”
준철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뒷돈은 아니었지. 이자 면제라는 대가성 입증 어려운 로비였지. 안 그래도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되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공정위 약점을 훤히 꿰뚫고 있는 걸 보니, 이미 성진에서 지령이 내려갔나 보다.
“우린 성진이 대출해 줘서 그 분유 쓴 게 아니라, 품질과 가격이 가장 괜찮아서 그 제품 쓴 겁니다.”
“만약 계속해서 이런 억지 조사를 강행하면 우리도 엄정 대응하겠습니다.”
엄정 대응?
“저기 계신 팀장님께선 국민신문고에 한 번 혼쭐이 나신 걸로 압니다. 과장님이라곤 다를까요?”
준철은 쓱 서 팀장을 살폈다.
‘대체 어떤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거냐…….’
지금 보니 서 팀장 얼굴이 많이 초췌해진 것 같다.
죄책감이 마구마구 들었다. 그럼에도 불평 한 번 없었던 서 팀장이 너무도 대견했다.
“자리에는 책임도 따르는 법입니다. 이 이상 나오면 저흰 공동 소송까지 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공동 소송이라. 그것도 성진유업에서 알려 준 매뉴얼인가요?”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준철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이보세요, 젊은 과장님. 지금 우리가 장난치는 줄 알아요? 왜 이렇게 자꾸 건성 건성으로 듣지.”
“원장님들이야말로 우리 말 건성으로 듣지 마세요. 누가 봐도 공짜 대출 받고, 분유 납품 받은 건데, 이게 지금 말이 된다 보십니까?”
“그건…….”
준철은 놈들이 항변할 틈을 주지 않았다.
“서 팀장, 지금 개원의들 대출 이자가 얼마나 되지?”
“1금융권에서 평균 7~10%로요.”
“한도는?”
“많아 봐야 겨우 2-3억 수준입니다. 10억까지 대출 받으려면 2금융권까지 가야 돼요.”
“그니까 여기 계신 분들 대출 조건이 압도적으로 좋다는 거네.”
“네. 성진유업 대출은 여기에 10년 만기, 자동 연장 조건까지 붙어 있습니다.”
준철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성진유업은 무슨 자선 사업가들인 모양입니다. 학자금 대출도 이런 조건은 아닌데 말이죠. 혹시 여기 계신 분들이 장학생들인가.”
“…….”
“이래도 리베이트가 아닙니까?”
잠시 주춤했지만 홍 원장의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네. 아닙니다.”
단호한 대답이 즉각 튀어나오는 걸 보니 절대 자백할 마음이 없나 보다.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다. 준철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좋습니다. 그럼 끝장을 봐야지. 근데 각오는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린 이 성진분유 식약처에 성분 조사 의뢰할 거거든요.”
성분 조사란 말에 병원장들 낯빛이 바뀌었다.
“뭐요?”
“정직하게 납품 못 따내는 거 보니 성진 분유에 문제가 많은 모양이죠. 우린 이 제품이 정말 신생아에 문제없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
이에 병원장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상에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괜히 성진분유 이미지에 흠집 내려고 그러는 거 모를 줄 알아?”
“잘 아시네.”
“뭐?”
“네. 불안감 조성 좀 해 보겠습니다.”
“아니, 대체 그런 억지가 어디 있냐고!”
“그럼 그런 억지는 어디 있습니까?”
“뭐?”
“대출 특혜 받고 해당사 제품 썼는데……. 리베이트가 아니다? 뭐 법리적으로 빠져나갈 순 있겠지만 소비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봅시다.”
편법엔 편법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물론 성진분유에서 대단한 유해물질이 나올리는 없겠지만, 성분 조사 자체가 산모들의 불안감을 크게 자극해 줄 것이다. 요즘처럼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시대엔 이게 곧 불매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럼 이만.”
그렇게 떠나려 할 때 뒤에서 웬 고함이 들렸다.
“자, 잠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