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47
247화
편법 처벌
뒤를 슬쩍 돌아보니 웬 사내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잠깐만 아니, 잠깐만요!”
“뭐죠?”
“식약처 성분 조사라 함은…… 병원 이름들까지 다 퍼트리겠단 얘깁니까?”
준철은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저희가 그렇게 치사하게 굴까요. 당국에서 병원 이름 거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공론화 과정에서 실명 튀어나오는 일이 뭐 한두 번 있는 일인가요. 저희는 현재 연루된 병원들 모두 기소할 거고, 눈치 빠른 기자가 이 명단 입수한다면……. 굳이 기사 배포 막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지금 누구랑 말장난해? 그게 결국 병원 신상 공개하겠단 얘기 아니에요!”
발 없는 말이 지구 반대편을 가는 시대다.
특히나 대한민국 엄마들은 소문에 민감하다. 언론에 기사가 나가는 순간, 병원 신상이 공공연하게 나돌 것이며 맘카페엔 병원장 신상까지 나돌 것이다.
“그 말장난 먼저 시작한 건 여러분들 아닌가요?”
“……뭐요?”
“솔직히 말씀드리죠. 기업에게 무이자 대출 받고 납품권 준 거? 법적으론 대가성 입증 아주 어렵습니다. 여러분들 스폰 잘 잡았어요. 성진유업 아주 프로들입니다.”
빈말이 아니다. 놈들 덕분에 법의 허점이 뭔지,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하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연관 기업은 상호 대출 못 하게 막아 버려야 한다.
마음 같아선 성진유업 잔대가리들에게 4급 과장 자리를 양보하고 싶을 정도다.
“그래서 우리도 할 수 있는 편법 처벌 하겠다는 겁니다.”
“아니, 그 소리가 어떻게 당당하게 나와? 정신 차려, 당신 공무원이야!”
“맞아요, 나 공무원입니다. 밥 먹고 하는 일이 관련법 가지고 씨름하는 건데, 나라곤 편법 하나 못 쓸까.”
공무원이 편법을 잡으러 다니느라 힘든 거지, 쌍방으로 편법 쓰라면 누구보다 잘한다. 아무도 뒷감당을 하기 싫어 안 할 뿐.
그런데 진짜가 나타나 버렸다.
조사가 편법에 막히면, 다른 편법을 써 그에 준하는 처벌을 내리는 놈.
“이, 이보세요. 과장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무리 성진유업이 막 나간다 해도 국내 3대 유제품 업쳅니다. 신생아 분유에 무슨 유해 물질이 나오겠습니까?”
“저희도 그럴 거라 생각 안 합니다.”
“알면서도 하시겠다니요. 이건 직권 남용입니다.”
“그럼 혐의 걸어 보십쇼.”
“……예?”
“혐의 거시면 공론화 더 크게 되고 사람들 기억에도 오래 남겠네요.”
유죄 입증을 뭐 하려 하나? 어차피 성진유업은 3심까지 끌 거고, 최종심에선 아주 귀여운 과징금으로 마무리될 거다. 무기력하게 끝난 지난 조사들이 이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
하지만 식약처에 성분 검사를 의뢰하면 공포 불매로 이어질 테니 대충 과징금이랑 퉁칠 수 있다.
뿐이랴. 성진그룹의 못된 버릇을 고칠 수 있음은 물론, 좋은 선례를 남겨 동종 업계의 기강을 잡을 수도 있다.
일타쌍피의 패를 안 쓸 이유가 뭔가?
“걱정들이 많으시군요. 이해합니다. 산후조리원이 리베이트 분유를 썼다는 걸 알면 산모들의 반발이 엄청나겠죠. 게다가 그 분유가 성분 조사 대상이라니……. 이건 반발을 넘어 소송을
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준철은 슬슬 약 올리며 이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들 머릿속엔 이미 지옥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거금을 들여 만든 산후조리원이 자칫하다간 폐가가 되게 생겼다.
“아, 그리고 성진유업 때 불매운동 얼마나 심하게 일어났는지 아시죠? 그나마 성진유업이 대기업이라 그 정도로 넘어갔지, 일반 병원들이면 감당 못 할 겁니다.”
코스피 200에 한국 3대 유제품 업체로 꼽히는 성진유업도 불매운동 한 번에 주가가 반토막 나고 매출이 20% 폭락했다.
그나마 대기업이라 이 충격을 견딜 수 있었지만, 건물 월세 걱정에 잠 못 이루는 개원의 입장에선 언감생심인 일이다.
“이, 이건 말이 안 돼.”
“……차라리 영업 정지가 나아.”
“어떻게 연 내 병원인데……. 어떻게…….”
병원장들이 경기를 일으키자 준철이 서류 하나를 슬쩍 책상에 올렸다.
쥐를 궁지에 몰았으니, 이제 살길을 알려 줘야 한다. 이 사태를 가장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
“딱 다섯 분만 받겠습니다.”
“…….”
“가장 먼저 자백하는 병원은 면책해 드리겠습니다.”
“……면책요?”
“검찰 기소 대상에 안 올리겠다는 겁니다. 그럼 언론에 유포될 일도 없겠죠? 단 조건이 있어요. 성진유업한테 받은 대출 싹 다 털고 오세요.”
“과장님, 저희도 생계형 의사들입니다. 그 큰돈을 어떻게 단번에…….”
“그간 받은 무이자 혜택으로 적금 안 들고 뭐 했습니까? 대부 업체를 가든 처가댁에 가든 알아서 마련하세요.”
나가려던 맡에 준철이 돌아섰다.
“아, 이 얘긴 우리끼리 비밀입니다. 성진유업엔 서프라이즈로 공개할 거라서.”
뒷얘긴 들리지도 않았다. 내일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그깟 성진유업이 대수겠는가.
준철이 홀연히 떠나자 회의장은 다른 의미로 엄숙해졌다.
언론에 유포되면 병원 신상이 털리는 건 시간문제. 과연 이 중에 배신자가 하나도 없을까?
“머,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나도 좀…….”
사실 계산할 것도 없다.
선착순 안에 들기 위해선 가장 빨리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
“자세히 말해 봐. 뭐라고?”
“현재 공정위가 병원들을 계속 들쑤신 모양입니다. 자백하면 선착순대로 봐주겠다고…….”
“내가 지금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하래? 그래서!”
“벼, 병원장들이 대출을 갚겠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이미 다섯 병원이 대출을 다 갚으며 선착순이 마감되었지만, 병원들의 상환 러시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 배가 곧 침몰할 것이라는 걸.
“고작 의사 새끼들이 돈은 갑자기 어디서 나와?”
“대부업부터 처갓집에까지 손 벌린다고…….”
“육시럴 새끼들! 우리가 대부 업체보다 위험해? 이게 처갓집까지 자존심 굽힐 일이야?”
김 회장은 성질을 주체 못 하고 책상을 뒤집어 버렸다.
대출 만기 얘기만 꺼내면 꼬리를 살랑거리던 의사 놈들이, 지금은 돌 반지까지 팔아 대출을 상환 중이다. 이 뜻은 당연히 배신하겠단 의미이며 어쩌면 이미 배신자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김 사장,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이거 어차피 대가성 입증 못 한다는 거 말 안 해 줬어?”
“했습니다. 근데 공정위가 들쑤셔서 불안감을 조성한 모양입니다.”
“무슨 불안감! 우리가 이딴 일 한두 번 막아 봐? 대가성 입증 못 한다는 전문 변호사 자문 없었어? 대체 불안할 게 뭐 있어?”
“자, 잘 모르겠습니다.”
진짜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병원장들이 공정위와 미팅 한 번 하더니 바로 돌변해 버렸다. 회의 내용을 물어도 다들 전화 피하기 바쁘다.
“회장님, 진정하십쇼. 일단은 대책부터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김 회장이 눈을 돌렸다.
“지금 어디까지 파악됐지?”
“자회사를 통해 대출 실행한 것까지요.”
“그 밖에 다른 건?”
“우리가 병원들에게 직접적으로 돈을 건넨 내역은 없었으니, 잡힐 건 없습니다.”
염병할 새끼들!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이기는 싸움이구만.
회장님이 또 폭발할 기미를 보이자 홍 상무가 바로 말을 이었다.
“회장님, 어차피 배신자가 한 놈도 안 나올 순 없었습니다. 떠난 놈은 그냥 미련 없이 손절해 버리죠.”
“손절?”
“대강 사정 들어 보니 공정위가 면책 조건으로 부채 상환을 건 모양입니다. 근데 의사들이 다 그 돈 마련할 수는 없죠.”
“아직 못 갚은 놈들이 많다는 건가?”
“네. 아직은 우리 편이 더 많습니다.”
이 말이 위안이 됐는지 김 회장의 노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홍 상무, 자네 계획은 뭔데?”
“무시가 답입니다.”
“무시가 답?”
“자백한 놈들은 공정위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저러는 거다 매도하고, 재판 끝가지 가야죠.”
“대출 조건이 다 똑같았다. 이건 한 놈이 자백해도 다 끝난 게임이 아니야?”
“아닙니다. 재판은 어차피 철저한 증거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대출과 납품의 연관성을 어떻게 연결 짓겠습니까.”
“……계속해 봐.”
“자백한 병원은 우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긴 거라고 몰아가면 됩니다.”
절묘한 계책에 김 회장이 무릎을 쳤다.
우리가 시킨 게 아니라 하청들이 알아서 긴 거다. 갑질 걸린 원청들이 가장 많이 하는 변명이며, 가장 잘 먹히는 멘트이기도 하다.
“이거 어차피 대가성 입증 못 하고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러다 처벌이 과하게 나오면?”
“뭐 과징금 수십억 부르면 깎으면 되죠. 어차피 3심까지 갈 생각 아니었습니까?”
“그래도 너무 버티면 괜히 싸움 커지고 공론화만 될 텐데…….”
눈치 보던 임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회장님, 저희가 뭐 불매운동 한두 번 당해 보겠습니까.”
“사실 고객들에게 더 깎아 먹을 이미지도 없습니다. 우린 품질로 승부하면 됩니다.”
지난 녹취록 파문이 재앙이긴 했지만, 좋은 유훈도 남겨 주었다.
그 어떠한 풍파도 버티면 이길 수 있다는 것. 성진유업은 이런 방면에서 이미 지독한 내성이 있는 기업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홍 상무님 말이 맞습니다.”
“저흰 저희대로 버티는 게 좋겠습니다.”
“조리원의 분유 납품은 알아서 긴 거라 우기시죠.”
지난 경험을 되돌아보면 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은 이번에도 먹힐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때 현실적인 의견을 내는 이도 있었다.
“회장님, 하지만 우리가 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본부장?”
“만기 얘기만 나오면 살랑거리던 원장들이 왜 갑자기 돌변했을까요……. 사실 지금 굉장히 안 좋은 뒷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김 회장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뒷소문?”
“네. 공정위가 저희 분유를 성분 검사 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지난 1차 적발에 이어 이번이 2차 적발 아닙니까. 이렇게 연이어 로비를 했던 이유가 제품에 하자가 있던 것이라 판단한 모양입니다. 유해성 검사를 의뢰하기로 했다고…….”
“푸하핫!”
심각한 분위기를 깨며 김 회장의 웃음소리가 만방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