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49
249화
편법 처벌 (3)
“어째 협박처럼 들립니다?”
“뭐 피차 위험한 건 사실 아닙니까.”
과연 능구렁이 같은 노인이다.
바짝 엎드리는 척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슬쩍 어필한다.
사실 식약처 성분 검사는 젊은 과장에게 전혀 이로울 게 없었다. 조사 결과는 어차피 유해성 미검출이며, 도리어 과잉 조사 꼬투리만 잡힐 테니.
조사를 여기까지 끌어올 정도의 일머리면 여기까지 계산 못 할 리 없다.
‘뭘 저렇게 뜸 들이지?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김 회장의 예상과 달리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서서히 불안하기 시작했다.
식약처 성분 검사는 자신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카드 아닌가?
김 회장은 그에 부응해 리베이트 자료를 모두 들고 와 자백했고, 당국의 과징금에 모두 승복하겠노라 약속까지 했다.
그럼 지금쯤 구체적인 액수 가지고 실랑이가 오가야 한다.
근데 왜 자꾸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걸까.
“뭘 고민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말씀 드리죠. 만약 공정위가 성분 조사를 의뢰한다면 이 자체로도 저희가 입을 피해가 아주 막심합니다. 당연히 저흰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을 물을
거고요.”
“책임?”
“흠집 내기용 조사를 어떻게 방관하겠습니까. 감사원에 진정을 넣어 시시비비를 가릴 겁니다. 아마 과장님께서도 엄청 귀찮아지실 겁니다.”
벼랑 끝 전술이 통한 걸까.
젊은 과장이 슬며시 시선을 외면했다. 뒤이어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게 낫는데 헛웃음인지 한숨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뭐가 됐든 기세를 꺾어 놓은 것만은 분명했다.
“이런. 얘기를 하다 보니 제가 너무 격하게 말한 것 같군요. 오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적당한 과징금이면 저희도 승복을 하겠단 의미였습니다.”
“아니요. 오해 없이 아주 확실하게 이해했습니다. 역시나 제 결정이 옳았군요.”
결정이 옳았다?
무슨 뜻인지 헤아리던 찰나,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서 팀장은 김 회장에게 눈을 흘기더니 준철에게 귀엣말을 전했다.
“오- 벌써 터트렸어?”
“예. 안 그래도 요즘 기사거리 없었는지 기자들이 아주 좋아라 하더군요.”
“좌표는 찍어 줬고?”
“찍어 주기도 전에 이미 다 가 있던데요. 지금 기자들 다 식약처 앞에서 대기하고 있답니다. 아, 포털엔 이미 기사 나간 것 같은데 한번 보시겠어요?”
심상치 않은 대화에 김 회장의 노기가 튀어 나갔다.
“지금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아까 본인 결정이 옳았다는 건 또 무슨 말이고요.”
“오- 진짜네. 벌써 실검까지 장악했잖아?”
“이보세요, 과장님! 지금 사람 무시하는 겁니까?”
핸드폰을 보던 준철이 씩 웃으며 김 회장을 바라봤다.
“역시 내 결정이 옳았어요.”
“그게 무슨…….”
“어떻게 하면 성진유업의 못된 버릇을 고쳐 줄 수 있을까 고민 많이 했거든요.”
준철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쾌활했다.
“근데 고작 몇 억대 과징금 때려 봤자 상징적인 처벌에 그칠 거 같지 뭡니까. 워낙에 상습범들인데. 해서 제가 총대 메고 그냥 실질적인 처벌 내리기로 했습니다. 지금 포털에 뜬
뉴스 한번 보시겠어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상징적 처벌? 실질적 처벌?
하지만 준철의 핸드폰을 봤을 때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기사 몇 줄 읽었을 뿐인데, 김 회장 얼굴이 쩍 갈라지고 말았다.
이와 함께 그의 전화기가 수도 없이 울려 대기 시작했다.
***
-다음 소식입니다. 성진유업이 수도권 등지 50여 곳의 산후조리원에 리베이트 분유를 했단 사실이 적발되어 업계에 큰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성진유업은 자회사인 에브리유업을 통해 개원의들에게 평균 10억 원을 대출해 줬는데요. 대부분 무이자나 1%대의 저리로 대출 받아 사실상 대출 특혜란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공정위는 이를 리베이트로 판단, 리베이트 금액을 최소 억대로 추정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1억을 받는 것과 1억에 상당한 특혜를 받는 건 크게 달라 대가성 입증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밝혔습니다.
성진유업의 산후조리원 리베이트는 이번이 두 번째 적발입니다.
-이에 공정위는 검찰에 성진유업을 고발하는 한편, 식약처에 성분 조사를 의뢰했는데요. 연이은 납품 로비로 품질의 안정성이 의심스러운 상황이라 밝혔습니다. 성진분유의 유해성 가능성을
열어 둔 것입니다.
기업 리베이트는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세상이었지만, 그날 성진 뉴스는 9시 뉴스를 완전 장악해 버렸다.
공정위가 성진분유의 유해성 가능성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들이닥쳐 해당 의혹에 대해 물었지만 공정위는 침묵을 지켰다. 아직 답변드릴 수 없다는 대답은 대중의 상상력만 자극했다.
비록 직접 거론한 말은 아니지만, 성분 조사를 의뢰하는 것 자체가 그 이상의 파급력을 주는 것이었다.
그 파장은 실로 대단해서 맘카페 등의 커뮤니티는 크게 불타올랐다.
-조리원 동기 단톡방 지금 난리 났네요…….
성진분유 썼더라고요……. 조리할 땐 그게 뭔지도 몰랐는데. 다들 어떠신가요?
⌞저희도 지금 단톡방 완전 다 터졌어요…….ㅠ 연루된 병원이 한두 곳 아니에요.
⌞공정위는 왜 조리원 명단 발표 안 하나요? 돈 받아먹은 병원장도 수사해야죠!
⌞선의의 피해 병원도 생길 수 있어 직접 거론 안 했답니다…….
-아니 어떻게 애기들 먹는 분유 가지고 장난 칠 수 있나요?
진짜 성진유업 미친 거 아닌가요? 갑질이야 영업의 문제라 쳐도 제품 문제는 진짜 아니잖아요.
⌞저도 진짜 미치겠네요……. 우리 애기 지금까지 성진분유만 먹였는데.
⌞유해성 검출되는 거 아니죠? 하아……. 진짜 속 타들어 가요.
-산후조리원에 리베이트 한 건 진짜 아니지 않나요?
뉴스 보니 신생아 입맛 길들여 놓으면 퇴원하고 나서도 그 분유만 먹는다더군요. 아무리 돈에 미친 기업이라도 정말 이래야 하나요?
⌞전 둘째까지 성진분유만 먹였는데……. 내일 병원 가서 정밀 진단해 보려고요.
⌞그 병원비용 성진에 청구할 수 있나요?! 이건 진짜 아닌 거 같아요.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했다. 조리원 동기들로 구성된 단톡방에서 연루 조리원들이 나돌았고, 삽시간에 공동소송 사이트까지 생겨 버렸다.
공정위는 약속대로 연루된 병원들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대개 여기서 나도는 명단과 일치했다. 수도권 등지에 성진분유만 쓰는 산후조리원은 처음부터 그리 많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겨우 시작일 뿐.
연이어 성진유업의 주가가 폭락하더니, 일주일 새 시총 30%가 증발해 버렸다. 건실한 기업이 갑자기 폭락하면 보통 이쯤 반등세가 붙기 마련이건만 이번엔 그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뉴스 보도가 곧 불매운동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패닉에 빠진 소비자들이 마트에서 성진분유를 환불하기 시작했고, 멀쩡한 산후조리원들이 돌연 납품을 끊어 버리기 시작했다.
이 모두 주가 공시로 실시간 전송되어 개미들을 불지옥에 빠트렸다.
“이준철이- 이 새끼!”
“회, 회장님!”
김 회장은 수차례나 혈압을 잡고 쓰러졌다.
주가가 박살 남은 물론 기존 납품처까지 성진유업을 멀리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품질 자체를 의심받고 있기에 단기간에 극복할 수도 없었다.
설사 이겨 낸다 해도 답이 없다.
유해성 조사, 앞으로 성진분유에 평생 따라다닐 꼬리표다. 한번 생긴 편견은 어지간해선 깨지지 않는다.
“하아…….”
사실 그렇게 크게 억울할 건 없었다. 지금까지 쌓아 왔던 업보를 일시불로 받는다 생각하면.
하지만 김 회장은 그렇게 양심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일단 대형마트 중심으로 계속 세일 행사 진행해.”
“……예?”
“1+1이든 뭐든 행사 진행해서 물량 다 털란 말이야! 이거 뭐 남겨 뒀다가 돼지 사료로 쓸 거야?”
그 가격이면 팔 때마다 적자지만 악성 재고로 남기는 것보단 낫다. 회장님의 뜻을 이해한 임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그렇게 수습을 마친 김 회장은 노기 어린 눈빛을 들었다.
“그리고 김 사장. 당장 로펌하고 상의해서 감사원으로 가라.”
“감사원요?”
“뭘 놀라? 우리 이렇게 만든 놈 안 죽여 놓을 거야?”
“아, 아닙니다.”
“어차피 유해 성분은 절대 안 나와. 한 달 안으로 결과 나올 거다. 지금부턴 그 젊은 새끼한테 지옥을 보여 줘.”
그쪽에서 방아쇠를 먼저 당겼으니, 이쪽도 가만있을 수 없다.
여기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 줘야지.
김 사장까지 물러나고 혼자 남게 되자, 김 회장은 긴 한숨을 쉬었다.
분풀이가 끝나니 긴 자괴감이 들었다. 설사 그 공무원 놈을 징계한다 한들 기업이 입은 피해는 복구하지 못하리.
이것은 성진유업에 유례없는 위기였다. 감사원에 징계 요구해 봐야 겨우 분풀이일 뿐이다. 그 징계가 먹혀들지도 장담할 수 없고.
“후우…….”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자신의 완벽한 패배였다. 지난 세월 쌓아 온 업보를 이번에 일시불로 받나 보다.
***
“들어와, 당장.”
유 국장의 부름에 준철이 고개를 숙이며 들어갔다.
“반성하는 척하지 마라. 뒷일 다 예상했으면서도 사고 친 거잖아?”
여느 때와 달리 그 당당한 얼굴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근데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뭐가 어쩔 수 없어?”
“상징적인 처벌로 끝내면 성진유업 분명 또 버릇 못 고칠 겁니다. 실질적인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
“이 자식은 말이라도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유 국장은 단칼에 말을 잘랐다.
이놈하고 대화를 길게 하면 항상 설득당해 버리고 말았다. 이번엔 절대 그러지 않아야 한다.
“지금 성진 주가 거의 반토막 직전이다. 시장에선 환불 러시 일어나고 있고.”
과거 불매운동 같은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성진분유는 커뮤니티에서 금기어가 되어 버린 실정. 진짜 불매운동은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된다는 걸 이번 사건을 통해 깨달았다.
“식약처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지?”
“아마, 유해성 검출까진 나오지 않을 겁니다. 영업의 문제였으니.”
“그걸 알면서도 터트렸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럼 여기에 대해서도 할 말 없겠네?”
유 국장은 감사원에서 도착한 서류를 내밀었다.
“민원 들어왔다. 공권 남용. 방아쇠를 네가 먼저 당겼으니 성진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태성 로펌에서 직접 진정 넣어 왔어. 식약처 결과에 따라 어쩌면 네 징계가 결정될 수도
있다.”
“그렇군요.”
각오한 일이다. 성진유업이면 절대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끝이야?”
“예. 거기에 대한 징계는 다 받겠습니다.”
“너 이 징계가 무슨 의민지 알기나 해? 공권 남용, 직무유기는 평생 네 인사고과에 따라다녀. 네가 지금부터 정년까지 만년 과장으로 살아도 할 말 없는 거라고.”
“괜찮습니다. 어차피 진급 욕심 없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놈에게 떽 소리를 질렀다.
“어휴- 저 말이라도 못 하면 진짜.”
당사자는 정말 개의치 않는데, 자신만 애가 끓는 우스운 상황이었다.
뭐 어쩌겠는가. 저렇게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는 모습 자체를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유 국장은 한숨을 내쉬며 서류 하나를 책상에 건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냥 피난 좀 가 있어라.”
“……예?”
“너 휴가 처리시켰다. 이번 조사에 참여했던 팀장들 거까지. 강제 휴가 4박 5일이다. 오해하지 마. 특별 휴가 아니고 네들 연차에서 깐 거니까.”
“하지만…….”
“감사원 조사는 내가 막는다. 그냥 잠잠해질 때까지 있어.”
부하 직원이 큰 사고를 치긴 했지만 징계를 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인재다. 감사원 징계는 자신의 선에서 막아 주고 싶었다.
국장님의 큰 뜻을 이해한 준철은 군소리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괜찮네, 어쩌네 하는 거야말로 국장님의 배려를 무시하는 거다.
이럴 땐 헛소리 안 해야 한다.
“감사합니다. 국장님.”
준철은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한 후 자리로 돌아와, 부리나케 퇴근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