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5
25화
연수원 동기? (1)
법원 앞에는 이미 벌 떼처럼 모인 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기업이 대리점 단체를 인정한 첫 사례니 듣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저기 뚫고 가려면 한 10년 걸리겠네.”
박 팀장은 그 광경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후련할 것이다.
“팀을 나누죠. 기자들 상대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이 팀장님이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뭐 따로 할 말 없잖아요. 팀장님께선 소 취하하셔야 하니 얼른 가십쇼.”
성가시지만 어쩌겠나.
기소를 한 게 조사관이니, 취하도 조사관이 해야 한다.
“그럼 종합감시국이 먼저 가고, 우린 어수선해질 때쯤 돌아갑시다.”
준철팀이 법원에 들어서니 기자들이 득달같이 들러붙었다.
“현재 한경 그룹이 합의안을 발표했습니다.”
“이 내용 모두 공정위와 합의된 내용입니까?”
준철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예. 한경모비스 사건은 양측이 최종 합의했습니다.”
“그럼 남은 재판은요?”
“검찰에 오늘 고발 취하할 예정입니다. 더는 재판으로 다루지 않을 겁니다.”
기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양측이 합의점을 찾지 못해 결국 재판까지 간 사건 아닌가?
공정위는 한경의 핵심 임원 다섯 명을 내리 구속시켜 버렸다. 1차 재판 이후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적응할 수 없었다.
“소 취하의 배경이 뭡니까? 한경모비스가 대리점 단체구성을 인정해서입니까?”
“그것 또한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단체구성은 아직 대한민국에 생소한 사례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권한이 있는지요.”
“본사와 가격 협상을 할 수도 있고, 부당한 지시에 공동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한경모비스가 이 사건으로 보복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보장한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필요성에 따라 양측이 합의해 설립한 걸로 압니다.”
두말해 뭐 해. 그거 없으면 대리점들한테 보복 안 하겠나?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준철은 형식적인 대답만 했다.
이젠 대리점과 본사가 갈등을 봉합하게 도와줘야 한다.
그렇게 모든 질문에 상투적인 대답만 해 댔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도 있었다.
“그렇다면 형사처벌은요? 갑질 문제로 관련자를 구속 수사한 초유의 사건이었습니다.”
“합의와 별개로 협박 전화 건은 처벌하는 겁니까?”
준철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취하는 모든 혐의에 대한 취하입니다.”
“그럼 형사처벌도요?”
“네.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재발 방지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선 대리점들의 의견을 적극 고려했습니다. 대리점이 가장 원하는 건 업무 정상화지, 관련자 처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협박 전화까지 공개된 마당에…….”
“저희는 그래도 한경모비스가 대리점 단체를 인정한 걸 높게 삽니다. 이런 관행이 확대돼 본사·대리점의 수평적 관계가 정착되길 바랍니다.”
***
[대기업에서 인정한 첫 단체구성]
[본사에 조직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
[대리점이 파업 권한까지 가지고 있는 만큼 협상력 높아질 것]
사건이 일단락되며 끝을 모르고 추락하던 주가가 안정세로 돌아왔다.
그날 경제 방송사는 모두 한경모비스 사건을 집중 보도했다.
“대한민국엔 1,200만 개의 프랜차이즈가 있습니다. 작게 보면 편의점이나 식당까지. 비단 한경모비스에 국한된 게 아니라 업계에 미칠 파장이 크다는 거죠.”
“앞으로 대림점-본사의 관계가 더 수평적으로 변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주식은 생물이었다.
한경모비스가 단체구성을 인정하니 갑자기 식당, 편의점 기업들이 테마주로 묶여 하락세를 보였다.
하긴 대리점 단체는 본사와 가격 협상까지 할 수 있는데, 앞으론 쥐어짜기 힘들어지겠지.
여러 의미에서 참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그걸 또 그렇게 해결했다?”
종합보고를 듣던 오 과장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그 기념비적인 사건의 주역이 이 팀장이란다. 아직 부임한 지 2년도 안 되는.
“박 팀장.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 기소 강행한 건 자네 아니야?”
“전혀 잘못 짚으셨습니다. 전 이 팀장이 기소하자 할 때 펄쩍 뛰면서 반대했어요.”
“근데 왜 했어? 경력으로 보나, 짬밥으로 보나 자네가 당할 군번이 아닌데.”
“설득을 당한 셈이죠.”
“설득?”
“예. 대리점들이 안 나타나는 건, 당국의 처벌 의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니 당해 낼 재간이 없더군요.”
박 팀장 눈엔 아직도 그리 말하던 준철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리고 대리점 설득할 때, 단체구성안 말해 준 것도 이 팀장입니다. 저야말로 이 팀장이 한 수사에 숟가락만 올렸죠.”
“혹시 자네 너무 고마워서 립서비스하는 거 아니야? 이 팀장 고과 잘 주라고?”
“아이고 아닙니다. 이 팀장이 나이는 어린데 꼭 기업에서 몇십 년씩 구른 임원 같더군요. 솔직히 이번 사건은 제가 부사수였습니다.”
혀를 내두르는 박 팀장을 보고 나서야 오 과장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성중공업 사건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단순한 신입 사무관은 아니다.
***
“박 팀장이 아주 자네 칭찬을 많이 해?”
오 과장의 부름에 달려온 준철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기소 강행한 것도 이 팀장, 증언 얻은 것도 이 팀장, 대리점 생각해서 중간에 합의한 것도 이 팀장. 아주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갔어.”
과장님의 낯 뜨거운 칭찬이 연달아 이어졌기 때문이다.
“비결이 뭐야?”
“박 팀장님이 주도했고, 저희는 협조만 잘…….”
오 과장이 빤히 쳐다보자 준철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대리점들 증언을 얻어 내서 쉽게 풀렸습니다.”
“운이 아니라 깡이 좋던데? 솔직히 내가 이 사건 맡았으면 그 상황에서 기소 못 했을 거야. 피해자도 확보 못 했는데, 어떻게 기소를 해? 직권 남용으로 옷 벗을 일 있어?”
“…….”
오 과장의 칭찬은 칭찬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정말 위험했다는 거야.”
“예…….”
“진짜 운으로 믿는다면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마. 만약 못 이겼으면 너 지금 징계위 열렸다. 공무원 옷 벗는 사유 중 최고가 뇌물, 그다음이 직권남용이야. 사람이 항상 운이 좋을
수는 없어.”
따끔하게 말했지만 걱정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다.
“명심하겠습니다.”
“알아들었다면 됐고. 운영과에 얘기해 뒀다. 카드 받아 가.”
“카드요?”
“수사 내내 김밥만 먹고 다녔다며. 열일 해 줬는데 회식 한 번은 해야지. 참고로 난 눈치 없이 그런데 끼는 스타일은 아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 한 것뿐인데요.”
“할 일 잘해서 주는 거야. 지난번 대성중공업 끝나고도 회식 안 했잖아.”
기억난다. 수사를 끝낸 후련함보단 죄책감이 더 크게 들었다.
그래도 두 번째 사건을 끝내니 내성이 생겼나 보다. 그때처럼 우울하지만은 않다.
“그때 못 한 거까지 다 해서 회포 좀 풀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
“진짜로 n차까지 긁어도 된대요? 아무거나 먹어도 되고?”
“나 회식지원비 25만 원 넘어간 거 처음이야.”
준철이 운영지원과에서 카드를 받아 오자, 반원들은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공무원 회식비는 인당 한도액이 엄격하게 제한된다.
그중에선 한도가 거의 없다시피 높은 카드가 하나 있는데, 그걸 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이야 이거……. 국장님들이 긁는 카든데.”
“예. 지난번에 못 먹은 것까지 다 먹으랍니다.”
“그럼 오늘 참치 먹어도 되는 겁니까?”
“한우는요?”
반원들이 이성을 잃자 김기남 반장이 한소리 했다.
“아서라. 그런 거 넙죽 먹으면 우리 과장님 감사당한다.”
“먹고 죽죠. 솔직히 저희가 5년 동안 끌던 거 한 번에 해결해 줬는데.”
“어차피 지금 시간에 여의도에 문 연 곳 포장마차밖에 없어. 팀장님, 껍데기집 가시죠.”
새삼 김기남 반장이 고마웠다.
돈 많이 쓰면 어차피 눈치 보는 건 팀장 아닌가?
“그것도 좋지만 오랜만에 싱싱한 거 하나 먹죠.”
“싱싱한 거요?”
“네. 보니까 저기 분위기 좋은 참치집 하나 있던데 거기서 1차하시죠. 그 정도는 됩니다.”
그 말에 반원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댔다.
1차가 참치면 2차는 양주가 될 수도 있다.
“오늘 점심 라면으로 때우길 잘했네.”
“갑시다, 모두!”
“근데 팀장님. 과장님께서 뭐 다른 얘기는 없었습니까? 흐흐.”
“다른 얘기요?”
“뭐 인센티브라든지 고과점수라든지. 흐흐.”
참치집으로 향하는 길엔 오 과장과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자 상기되어 있던 얼굴들이 팍 식어 버렸다.
“아니, 그런 자리에서 점잔을 빼셨다고요?”
“솔직히 뭐 저희가 한 건 얼마 없잖아요. 5년 동안 싸운 건 박 팀장님인데.”
“아이참- 팀장님 답답하십니다. 그래도 그럴 땐 아무 소리 않고 계셔야죠.”
“박 팀장님이 이 팀장님께 진짜 많이 고마웠나 봅니다. 보통 업무 끝나면 자기 공적 내세우기 바쁜데.”
“……그런가요?”
이런 면에서 공무원과 회사원이 참 다른 것 같다.
회사는 거대 프로젝트 끝나도 모두 자기가 한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게 미덕이다. 어차피 고과는 핵심 아이디어를 내 사람이 아니라 해당 부서의 팀장이 몰아 받는 구조니까.
근데 공무원은 일단은 자기가 했다고 우기는 모양.
‘굉장히 다르네.’
“아무튼 다음에 또 그럴 일 있으면 무조건 자기 어필해야 하는 겁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꼭 명심할게요.”
“자- 그냥 털어 내. 한도 없는 회식 카드 줬는데, 고과는 어련히 따라오겠지.”
김 반장이 참치집 앞에서 분위기를 잡자 준철도 괜히 흥분되었다.
전생에서도 임원이 되고 난 이후엔 불편한 회식의 연속이었다. 편하게 놀고 마시는 자리가 아니라 회장님 비위 맞추고, 정부 관계자들 비위 맞추는 접대였다.
오랜만에 순수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하지만 이 묘한 기분은 얼마 가지 못했다.
불명의 번호가 준철의 핸드폰에 울렸다.
‘누구지? 반원들 전화는 아닌데.’
“여보세요?”
-예, 안녕하세요. 혹시 공정위 이준철 사무관님 핸드폰인가요?
수화음 너머론 웬 젊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예. 제가 이준철 팀장입니다만.”
-어머, 정말 다행이다. 아직 번호 안 바꿨구나.
“누구시죠?”
-준철 선배. 저 다영이에요. 연수원 41기 박다영! 저 기억하시죠?
준철은 식은땀이 흘렀다.
생전에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자신은 이준철이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