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50
250화
피란지에서 생긴 일
울창한 숲과 아래로 흐르는 계곡.
청주 왕릉산 나뭇가지엔 벌써부터 이른 낙엽이 지고 있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산행로에는 등산객들이 많았다.
과연 한국이 유례없는 속도로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다더니. 요즘은 젊은 사람들 많이 가는 바다보다, 산에 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초가을인데도 산행객들이 많네요. 여기가 청주 낙엽놀이 1번지랍니다.”
낙엽도 낙엽이지만 겨울잠 준비하는 산 동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도시에선 좀체 볼 수 없던 다람쥐들이 부지런히 도토리를 날랐고, 이따금씩 짝을 찾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담백한 절경에 답답한 마음도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아이고- 여긴 무슨 곰이 출현한다네요. 반달곰 복원 사업이라나 뭐라나.”
“서 팀장, 그 좀 조용히…….”
“과장님, 우리 조심해야겠어요. 곰은 사람을 찢는 거 아시죠? 여기까지만 들어가요.”
준철은 끙 앓았다.
감상에 젖을 만하면 옆에서 자꾸 내레이션을 해 대는 서 팀장 때문이었다.
“서 팀장, 넌 대체 여길 왜 따라왔냐?”
“저도 같은 피란민 아닙니까. 과장님 말 잘 따른 대가로 저도 강제 휴가 당했잖아요.”
“그럼 애인을 만나든가, 소개팅을 하든가 좀 재밌게 보낼 것이지 대체 왜 내 휴가까지 따라왔냐고.”
“섭섭합니다, 과장님. 저 뭐 주말에 상사 따라다니면서 시중들고 점수 따는 그런 인간 아닙니다. 저도 마침 여행이 고파서 따라왔어요.”
불현듯 옛 생각이 났다.
김성균으로 살 때도 주말 없이 일했다. 금요일 저녁은 늘 회식이었으며, 일요일엔 부장님 낚시를 따라다녔고, 공휴일엔 임원들 골프를 따라다녔다.
거기서 터놓은 친분이 진급의 결정적 요인이 되곤 했으니, 사실상 업무의 연장이라 봐도 무방했다.
근데 요즘 사람들은 주말 시중은커녕 업무 끝나고 연락하는 것도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야망 있는 젊은이들은 세대를 막론하고 다 비슷하게 행동하나 보다.
“됐다. 오늘 이 에스코트가 공짜일 것 같진 않고. 목적이 뭐야?”
“목적은요. 무슨.”
“그냥 기회 줄 때 말해. 궁금한 거 있으면 다 알려 줄 테니까.”
서 팀장은 호의를 두 번이나 사양할 만큼 점잖은 편이 아니었다.
“과장님, 저 진짜 일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뭐?”
“팀장 2년 차에 올해의 공정인 상, 4년 차에 과장 진급, 각종 사회 이슈 관련 사건에 혁혁한 공로. 어떻게 하면 과장님처럼 될 수 있습니까?”
“질문의 핵심이 뭔데? 나처럼 진급을 빠르게 하고 싶다는 거야, 아님 업무 실력을 배우고 싶다는 거야?”
“음…… 두 개 다 들어 볼 수 있습니까?”
서 팀장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진급이 욕심이면 당장 본청으로 가. 여기서 백날 천날 악덕 기업 때려잡아 봤자, 거기서 리포트 한 장 잘 쓰는 것만 못해.”
“아…….”
“머슴도 대감집에서 하란 말 있지? 인사고과보단 눈사고과다. 고위직들 밑에서 일해야 같은 일 해도 태가 난다.”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었는데 예상외로 서 팀장 얼굴이 시큰둥했다.
“리포트라……. 그건 영 제 성미에 안 맞네요.”
“뭐?”
“최근에 깨달은 사실인데, 저도 막 현장에서 뛰고 굴러야 에너지가 나는 것 같아요. 과장님처럼.”
“왜 자꾸 나랑 억지로 엮으려고 하지? 내가 그 화장실에서 들었던 뒷담을 아직도 못 잊는데.”
“실수였습니다, 실수! 그럼 과장님처럼 일 잘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저도 업무 능력 인정받아서 위에서 막 진급시키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진심이었다.
이번 분유 리베이트 때 과장님은 절대로 해선 안 될 실수를 저질렀다. 기업 망신 주려고 식약처에 성분 조사라니. 과잉 조사로 이력에 빨간 줄 가기 아주 좋은 흠이다.
이 때문에 감사원에서 조사 과정까지 검토 당하고 있다.
한데 이걸 국장님께서 직접 나서서 커버 쳐 주고 있지 않나. 준철이 유 국장에게 총애를 받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럼 직에 연연해하지 마.”
“예? 직에 연연요?”
“응. 의문이 생기면, 의문이 풀릴 때까지 파고드는 집요함. 그것만 갖추면 돼.”
너무 난해한 설명이었다.
“그렇게 하면 저도 공정인 상 타 볼 수 있나요?”
역시나 목적이 굉장히 분명한 놈이었구나.
“그건 나도 운이 좋았어. 그냥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웹튜브 치라고 하잖아. 한유미 과장님이 굉장히 예쁘게 봐주셨고, 내가 대표해서 탄 거야.”
“에이- 저도 그때 당시 비화 다 들었습니다. 안전정보과 다른 팀장들이 다 반대했는데, 과장님이 솔선수범하셨다면서요.”
새삼 공직 사회가 얼마나 좁은지 느꼈다.
“다들 그냥 뒷광고만 잡고 끝내자 했는데, 과장님께서 웹튜브 자체 내부 규정 만들어야 된다고 한 걸로 압니다.”
“그랬었나.”
“아, 그리고 그런 일 한두 번 아니시잖아요. 대웅조선 땐 배 한 척 싹 다 까 버렸다 하지 않았습니까. 적발된 특허 도용만 12건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대체 과장님은 어떻게 매사 확신을 가지고 조사하시는 겁니까.”
멍청하지만 솔직한 대답을 해야 될 때 같았다.
“그냥 내 눈엔 다 보이더라.”
“……예?”
“그땐 그랬어. 내 눈에 다 보였어.”
‘아주 그냥 잘난 척이 몸에 배었네.’
서 팀장은 속으로 구시렁거렸지만 한편으로 수긍하고 마는 자신을 발견했다.
수능 최초 만점자가 그랬던가. 만점 비결이 그냥 모르는 문제가 없어서였다고?
아마 비슷한 결의 대답일 것이다.
“뭐 또 물어볼 거 있냐?”
“아니요. 뭐 대답 듣는다 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네요.”
“그럼 경치 관람에나 집중하자.”
이에 서 팀장이 왕릉산 지도를 펼치며 한 곳을 가리켰다.
“과장님, 여기서 좀만 더 올라가면 사천사랍니다.”
“그게 뭔데?”
“고려 시대 때 만들어진 사찰이라는데. 국보 문화재래요. 이야- 이것 보세요. 작년부터 복원 사업을 시작했는데 조경 시설이 아주 좋답니다.”
“그래, 다녀와라.”
“에이- 이런 건 같이 가서 인증샷 찍어야죠.”
준철은 반강제로 녀석에게 끌려갔다.
그래도 젊은 게 좋긴 좋다. 핸드폰 몇 번 뒤적이더니 지역 명소, 맛집을 다 알아낸다. 여행도 정보력에 따라 감상할 수 있는 스케일이 달라지는 시대인가 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낑낑거리며 사천사에 올랐다.
하지만.
“하아……. 하아……. 뭐야, 여기가 사천사냐?”
“아, 예. 여기가 사천사긴 한데.”
“복원 사업 다 끝나 간다며. 다 공사판 천진데.”
“그러게요. 팸플릿엔 이미 다 끝난 걸로 나와 있는데.”
청주의 자랑, 왕릉산의 상징인 사천사는 절경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조경 사업은 아직 반도 끝나지 않았으며, 주변엔 시주하러 온 불자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뭐 이런 것까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준철의 신경을 상당히 거스르는 것도 있었다.
‘무슨 복원 공사를 저따위로 하지?’
이게 진짜 문화재 복원이 맞나? 꽤 큰 공사가 진행되는 거 같은데 그 흔한 가림막도 없고, 안전 펜스도 없다.
그나마 복원 공사가 끝난 곳도 분진 가루가 어찌나 휘날리는지, 꼭 최루탄 맞은 것처럼 눈과 목이 따가웠다.
“좀 실망스럽긴 하네요. 국보 문화재라 해서 기대하고 왔는데.”
“내려가자. 뭐 볼 것도 없네.”
그렇게 하산하려 할 때.
“제가 얼마나 더 부탁을 드려야 합니까! 여기는 부처님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입니다. 담배 노우! 술 노우! 고기 취식 절대, 절대 노우!”
중년 스님 한 분이 외노자들을 상대로 노발대발 외치고 있었다.
“$%@$!$ !”
“뭐라고요?”
“$%@!#$ !”
“하아……. 진짜.”
중년의 스님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스모크, 이거 이거, 담배. 노우. 알콜, 이거 이거 노우, 노우! 그리고 고기, 미트 미트 노우, 절대 노우!”
외국인 노동자들 또한 이 뜻은 알았지만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동남아인처럼 보이는 무리는 도리어 더 화를 내며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서로 말뜻이 통하지 않으니 격한 보디랭귀지가 오가기 시작했고, 작은 몸싸움까지 펼쳐졌다.
“뭐지?”
“인부들이 사찰에서 술 담배 하고 고기까지 먹었나 봐요. 근데 주변에 공사 감독관 없나. 스님하고 싸울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문화재 복원 한번 개판으로 하네.
하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얼른 내려가자. 괜히 불똥 튈라.”
“넵.”
그때 중년의 스님 눈에 젊은 사내 둘이 들어왔다. 그는 헐레벌떡 다녀오더니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사님들, 잠시만 도와주세요.”
이에 하산하려던 두 사람의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분들은 문화재 복원 사업에 동원된 인부들인데 자꾸만 사찰의 규칙을 어기고 있어요.”
“아……. 예. 근데 저희도 어떻게 도와드릴 수가.”
“말 몇 마디만 전해 주십쇼. 아니, 이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만 저에게 좀 알려 주십쇼.”
어지간하면 모른 척하려 했는데, 스님의 다급한 얼굴과 절실한 목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준철이 슬쩍 눈짓하자 서 팀장은 핸드폰을 열어 번역기를 틀었다.
“이분들 국적이 어디세요?”
“방글라데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전해 드리면 될까요?”
“이렇게 좀 전해 주십쇼. 여기는 부처님을 모시는 신성한 사찰이다. 술 담배 금지. 고기 취식 절대 금지. 여러 차례 지적했는데 전혀 나아지고 있지 않다.”
“그거면 됐…….”
“그리고 새벽 예불 드릴 때 분명 공사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 공사는 9시부터 6시까지. 우리가 사시 예불(아침) 포기할 테니, 새벽-저녁 예불은 방해하지 말아라. 그리고 공사
분진 가루가…….”
스님은 아무래도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한참을 토로하더니 숨을 헉헉거렸다.
서 팀장은 덩달아 비질 땀을 흘리며 이를 번역해 인부들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쪽 인부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분들은 대체 뭐라고 하는 겁니까?”
“에…… 잠시만요.”
서 팀장은 이들의 불만 사항을 스님께 전했다.
“보스가 허락한 일이다…….”
“예?”
“아마 고용주가 다 해도 된다 말한 것 같은데요. 그리고 자기들 흡연 구역은 사찰밖에 마련되어 있어 사유지가 아니랍니다. 술도 거기서 먹었다네요.”
“아니, 지금 그게……. 계속해 주세요. 또 뭐랍니까?”
“새벽 공사, 철야 공사는 자기들이 한 게 아니라 다 위에서 시킨 거랍니다. 이분들도 잔업수당 안 받고 일해서 하기 싫대요. 그리고 업체 측에서 휴식 시간 보장해 주기로 했는데,
공사 기일이 빠듯해 한 번도 안 지켰대요.”
“고기는 뭐랍니까? 사찰 안에서 왜 자꾸 고기를 먹어요.”
“마지막으로 고기는…….”
서 팀장이 주저하자 스님이 훽 하니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이내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고 말았다.
요즘 번역기는 성능이 참 좋아 각국의 비속어를 아주 친절히 잘 번역해 주었다. 이에 이성이 끊긴 스님이 외쳤다.
“오냐, 나 땡중이다! 그런 네들은 불법체류자지? 내일 당장 다 신고 때려 버릴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