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51
251화
피란지에서 생긴 일 (2)
산짐승도 모두 잠든 깊은 중저녁.
등산객들의 발길마저 끊기자 왕릉산엔 깊은 적막이 찾아왔다.
지금은 원래 저녁 예불로 한창 바빴을 시간이지만, 오늘 사천사 스님들은 꼼짝없이 대웅전에 집합당해야 했다.
“쯧쯧- 우리 현각(賢覺)의 성질 머리를 어이할꼬?”
“…….”
“백주대낮에 아주 큰 망신을 샀구나.”
현각스님이 오늘 인부들과 대거리했단 사실은 이미 사천사에 파다하게 퍼진 터였다.
이성을 잃은 현각은 인부들의 멱살을 잡았고, 인부들도 이에 지지 않으며 큰 몸싸움이 벌어졌다.
준철과 서 팀장이 중간에서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유혈 사태로 번졌을지도 모른다.
“주지스님, 억울합니다.”
“억울?”
“여기 두 처사님께 물어보십쇼. 그자들이 먼저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으며 부처님을 욕보였습니다. 불자가 이것을 어찌 참는단 말입니까.”
그간 쌓인 게 많았던 다른 스님들도 슬그머니 동조했다.
“주지스님, 오죽하면 현각스님이 그랬을까 싶습니다.”
“사실 인부들 말썽은 이번 한 번이 아닙니다. 사찰 주변에서 어찌나 술 고기를 자시는지, 아주 주지육림이 따로 없었습니다.”
“저희도 몇 번이나 커피 돌리면서 타이르려고 애썼습니다. 근데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요.”
“어찌하여 저희 불자들에게만 그리 가혹하십니…….”
콰콰쾅!
주지스님 앞에 있던 예불탁자가 순식간에 엎어졌다.
“시끄럽다, 이것들아! 예수는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 했고, 공자는 덕으로 네 원수를 용서하라 했느니라. 한데 부처님을 따르는 놈이 무어라 지껄였다고?”
주름 가득한 노인이었지만 그 위엄은 실로 상당했다.
그 드세 보이던 스님들이 한순간에 입을 다물지 않겠나.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니, 다시 지껄여 봐. 그 인부들에게 무어라 지껄였다고?”
“……경찰에 불법체류자 신고하겠다 했습니다.”
“이런 못되어 처먹은 놈! 거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디 있느냐? 부처님이 이웃의 허물을 경찰에 신고하라 가르쳤더냐.”
주지스님 또한 인부들의 말썽에 대해선 귀 따갑게 듣고 있었다.
사찰 주변에서 술 담배를 거리낌 없이 하고, 공사를 시도 때도 없이 진행해 예불까지 방해받고 있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관리자에게 몇 번 건의도 해 봤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화가 날 법도 한 일이지만 그는 달리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그 인부들도 사천사에 보탬이 되는 고마운 인연들 아닌가.
“왜? 속세 사람들이 술, 담배, 고기 냄새 피우니, 우리 승려들은 소싯적 생각이 난 모양이지?”
“아, 아닙니다.”
“그럼 그 심통부터 버려. 인부들이 담배를 피우면 안전한 곳에서 피울 수 있게끔 거처를 마련하고, 고기를 자시고 싶어 하면 오늘은 힘든 공산가 생각해서 가서 벽돌이라도 한 장 날라
주라고.”
“…….”
“이건 원수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야. 결국 다 우리 사천사를 위해 봉사해 주는 사람들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옷깃만 스쳐도 천년의 인연이라 하였다. 이 사천사를 세운 영운대사는 처마 밑에 든 손님도 극진히 대접했느니라. 그놈이 비를 피해 온 도둑놈이라도.”
“…….”
“한 번만 더 이런 소란 떨면 내 여기 있는 이들 다 파문시켜 버릴 게야.”
주지스님은 평소 온화하며 덕이 많은 분이었지만, 한 번 화가 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이였다.
방금 내뱉은 말도 전혀 과장이 아니리라.
“예……. 알겠습니다.”
“저희들 덕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납작 엎드려 고개도 들지 못할 때 주지스님의 말이 이어졌다.
“현각아, 아니, 현각스님.”
부름을 받은 현각스님은 침을 꼴깍 삼켰다.
보통 주지스님이 이렇게 존대할 땐 항상 큰 엄벌이 뒤따랐다.
“귀승께선 아무래도 아직 속세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것 같구려.”
“소, 송구스럽습니다.”
“하니 당분간은 먹지도, 말하지도 말고 번뇌를 떨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어떻겠소. 고행의 끝엔 부처님의 귀한 가르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젠장. 왜 불안한 직감은 틀리는 법이 없을까.
한마디로 금식기도에 묵언수행, 108번뇌까지 올리라는 소리다.
“그리하겠습니다.”
“한층 성숙해진 현각을 기대해도 되겠지?”
“아무렴요. 꼭 그리하겠습니다.”
이는 곧 다른 스님들에게 던지는 경고 메시지나 다름없다.
“앞으로 이와 같은 불상사가 더 이상 있어선 안 되네. 다들 알아들었을 게야.”
“예.”
“모두 이만 물러가.”
스님들이 모두 물러가자 주지스님이 긴 한숨을 내쉬며 준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거 참 제가 큰 신세를 졌습니다. 두 귀인이 아니었다면 오늘 현각은 큰 실수를 저질렀을 겝니다.”
***
준철과 서 팀장은 스님들의 집합(?)에 진땀을 쓸어내려야 했다.
사찰의 법도가 엄격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일반 기업 임원 회의도 이렇게 숨 막히진 않을 터다.
사찰 회의도 회의지만 승려들을 휘어잡는 주지스님의 카리스마엔 감탄마저 느껴졌다. 제3자인 자신이 봐도 숨이 턱턱 막힐 만큼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두 처사님께선 공무원이시라고요.”
“예. 서울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실 세속일은 잘 모르지만 공정위가 뭘 하는 곳인지는 압니다. 참으로 귀한 곳에서 일하시는군요.”
방금 전 현각스님을 호통칠 때와는 아주 딴판인 목소리다.
위압감 넘쳤던 주지스님이 칭찬을 다 해 주자 얼굴이 다 황송해졌다.
“여기 계신 두 분이 아니었다면 우리 현각이 더 큰 추태를 부릴 뻔했습니다. 이거 원 불자로서 면목이 없군요.”
“아닙니다. 원주민과 마찰 없이 끝나는 공사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저흰 늘 보는 일입니다.”
“그리 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준철은 기회를 틈타 슬쩍 물었다.
“근데 주지스님께선 여기 사찰 관리인이십니까?”
“예. 제가 사천사 주지 겸 사찰 관리인까지 맡고 있습니다.”
“아이고……. 업무가 막중하시겠군요.”
가려운 곳을 긁어 주자 주지스님의 한숨이 이어졌다.
“네. 사실 국보급 문화재는 사찰 관리자를 따로 둔다고 하는데……. 여기 사천사는 그리 규모가 큰 곳은 아니어서요. 부득이 이 늙은이가 사찰 관리자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어쩐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어쩐지라니……?”
이 얘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실 전문 관리자가 아니라는 게 좀 티가 났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사천사 입구에 들어서니 무슨 최루탄이라도 맞은 듯 눈과 목이 따가웠습니다. 사찰 주변이 전부 다 분진투성이더군요. 그리고 복원 공사 주변에 안전 펜스도 치지 않았고, 인부 통솔도
전혀 안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사실 경악스러웠다.
한명건설에서 일하며 수많은 공사판을 다녀봤지만 이런 개판은 또 처음이다. 방음 펜스가 없으니 공사 소음이 귀청을 뚫었고, 급수차가 없으니 곳곳에서 분진이 떠다니고 있었다.
인부들은 또 어떤가.
용접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예사고, 안전모도 쓰지 않고 투입되는 인부들이 태반이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 통솔자는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다.
“혹시 현장에서 사고 같은 건 없었습니까?”
“들어 보진 못했습니다만……. 왜요?”
“저런 현장에서 사람이 안 다칠 수가 있나 싶어서요.”
“그 정돕니까……?”
“네. 만약 주지스님께서 사찰관리인이시면 통솔자 한번 만나 보십쇼. 저대로 두다간 큰 사고 한번 나겠지 싶습니다.”
그리 말하자 주지스님 얼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만나 주지를 않더군요.”
“예?”
“그 현장 통솔자 말입니다. 저도 몇 차례 만나 보려 했었지만 아예 시간도 내주질 않았어요.”
“아니……. 현장관리자가 왜 안 만나 줍니까? 시공 업체는 사찰관리인이 부르면 바로 달려와야 하는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문화재청 관리자에게 몇 번이나 자리 좀 마련해 달라 했는데……. 시공 업체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어이가 없었다. 사찰관리자가 시공 업체를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시공 업체는 감독자를 파견하여 24시간 현장을 통솔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들은 인부들 통솔은 물론, 현장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고까지 일일이 기록하며 상부에 현황을 보고해야 한다.
그런 이들의 주된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원주민들과의 마찰을 조율하는 일.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갈등을 중재해야 하는 것이다. 근데 그 사람의 얼굴을 구경도 못 해 봤다고?
‘이건 학부모가 담임선생 얼굴 한번 못 봤다는 거하고 똑같은 격 아닌가……?’
준철의 얼굴이 굳어지자 주지스님이 용기 내어 물었다.
“사실 오늘 제자들을 꾸짖긴 했지만 저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공사 시간이 너무 불규칙했거든요.”
“공사 시간요?”
“네. 어떨 땐 새벽부터 공사에 들어가고, 또 어떨 땐 늦은 저녁까지 공사를 하고……. 아주 중구난방이었습니다.”
불규칙한 공사 시간 때문에 예불시간이 완전 초토화되었다.
참다못한 주지스님도 문화재청에 몇 번 건의를 넣어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원래 공사란 것이 그렇다’는 무성의한 대답뿐이었다.
“저도 사실 속세를 등진 지 오래라 이게 당연한 건 줄로 알았습니다. 어디 가서 물어볼 데도 없고……. 근데 원래 이런 게 아닙니까?”
준철은 긴 한숨을 내쉬며 그를 응시했다.
“전문가로서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예.”
“이런 공사를 1년이나 참았던 스님들이 용할 정도입니다.”
“……예?”
“만약 시내 한복판에서 이런 공사를 진행했다면 원주민들한테 매장을 당했을 겁니다. 공사 현장에 방음펜스랑 급수차 없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고요. 인부들을 저렇게 통제 못 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주지스님의 얼굴이 쩍 갈라졌지만 준철의 팩트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이건 단순히 사찰 주변에서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니까 인부들이 용접장 주변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있더군요.”
“그게 안 되는 거였습니까?”
“안 되다마다요. 주유소에서 담배 피우는 격입니다. 가스통 터지면 인부들 안전은 물론, 산행객들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안전이란 말로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단 얘기다.
그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주지스님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