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57
257화
수의계약 (3)
“식사는 잘 하셨습니까.”
취조실에 들어서니 웬 시건방진 사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육개장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던데, 역시 취조실 한두 번 들락거린 실력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허세라는 것도 안다.
과거 김성균도 숱하게 많이 취조실에 들락거렸고, 여기서 먹는 밥이 모래알 씹는 기분이라는 것도 잘 안다. 한명건설의 로비로 판검사, 변호사 모두 한편으로 만들었음에도 취조실에선
먹는 밥은 늘 꿀꿀이죽 같았다.
육개장을 억지로 비워 낸 놈의 속도 속이 아닐 것이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입맛에 맞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육개장보단 설렁탕이 낫더군요. 제가 여기 밥 좀 먹어 봐서 아는데 거기가 더 죽여줘요.”
전과가 때론 훈장이 되기도 한다.
놈은 여기 와 본 게 여러 차례라는 걸 은근슬쩍 어필했다.
“뭐 피차 선수니까 그냥 본론 얘기할까요?”
“그러시죠.”
“떡값 얼마나 돌렸어요?”
김 사장이 얼굴을 구겼다.
“무슨 말인지?”
“공사 장부 다 뜯어 봤습니다. 아주 개판으로 쓰셨더군요. 없는 인부들 고용한 것처럼 꾸며서 인건비 뻥튀기고, 기자재값 다 부풀려서 공사비 뻥튀기고. 아, 치졸하게 인부들 반찬값도
빼돌리셨대.”
“그건…….”
“현장에 설치하지도 않은 안전 펜스는 왜 비용 처리시켰습니까? 이건 건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냥 실사 한번 나가면 다 걸려요.”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자 놈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됐고, 긴 얘기하지 맙시다. 우린 이 공사에 소요된 비용이 많아 봤자 4억대라 보거든요. 나머지 1억은 다 오명석 과장 떡값이었습니까.”
“……그런 적 없어.”
“법카 내역 보니 무슨 백화점에서 천만 원대 결제 내역이 잡히데요. 이건 사모님 가방값입니까?”
“그런 적 없다고!”
발끈하는 걸 보니 정곡을 제대로 찌른 모양이다.
다행이다. 긴가민가한 내역들도 좀 있었는데.
“김 사장님, 그러지 말고 우리가 재밌는 제안할 테니 한번 들어 보실래요?”
“뭐?”
“구명보트 드릴게요. 얼른 이 똥물에서 빠져나가세요.”
처음엔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우린 어차피 잔챙이들한텐 관심 없거든. 진짜 나쁜 놈 하나 잡을 생각이니까 우리 조사에 협조 좀 합시다.”
“진짜…… 나쁜 놈?”
“그래요, 오명석 과장. 우리 최종 타깃은 이놈인데, 조사 방해하지 마세요. 안 그럼 같이 죽어.”
자신을 잔챙이라 부르는 조롱 따윈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사실 이미 전의도 많이 상실했다. 이 젊은 놈과 대화를 나눌수록 자꾸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노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당신이 자백 안 해도 오명석은 이미 죽은 패나 다름없어.”
“……그건 무슨 말이지?”
“이 사람이 만진 예산은 죄다 구린내가 나거든. 자기 이름으로 따낸 사업 기획이 20건인데, 그중 15개가 수의계약이네?”
“…….”
“당국이 이렇게 긴 꼬리를 잡았는데 조용히 넘어갈 것 같습니까.”
오명석은 이미 업계에서 로비 공무원으로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예산 잘 따와서 문화재청 내에서 신임이 두터웠고, 아무도 그의 수의계약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매사 일처리가 확실해 업계 사람들에게선 문화재 대통령으로 통했다.
하지만 그 이면이 얼마나 추악한 놈인지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당국이 작정하고 놈을 털면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준철이 나열한 의심 공사 목록들은 다 사실이라 봐도 무방했다.
김 사장은 이제 결정해야 했다. 떨어진 끈을 계속 붙잡으며 함께 죽느냐……. 아님 자신이라도 사느냐.
“저기 그…….”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이건 정말 만약에 말인데……. 제가 당국 조사에 협조하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혹시 불기소나 기소유예 같은…….”
“꿈 깨세요. 내가 구명보트 준다 했지 언제 크루즈 여객선에 태워 주겠다 했습니까?”
준철은 세차게 핀잔을 주었다.
“공사비 차액 다 토해 내시고, 나머지 공사는 새 업체에게 넘길 겁니다.”
“아니……. 돈 토해 내고 업체도 바꾸겠다고? 그게 뭡니까! 그럼 나한테 남는 게 없잖아요.”
“대신 실형은 면해 드리죠.”
“뭐?”
“거기 인부들 다 불법 체류자죠. 한둘이 아니던데 몇 명이나 고용했습니까. 다른 업장에서도 불체자 고용했죠?”
“…….”
“공사 현장에 안전 감독관 배치 안 시킨 건 안전법 위반입니다. 그 밖에 회삿돈 횡령하고 뒷돈 처바른 거. 이거 다 형량 모으면 얼마나 나오려나.”
이제야 현실 파악이 된 건지 놈이 손을 달달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똥 된장 구분 못 했어요.”
“과징금 5천에 집행유예 3년. 딱 여기까지가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김 사장은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차액 공사비를 반납하고, 과징금을 5천이나 내면 결국 1억 5천을 내란 소리다. 벌점도 쌓일 테니 당분간 정부 입찰 공사에 응할 수도 없다.
회사가 내일 당장 폐업해도 될 만큼 악조건들이었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더 싸워 봤자 실형 3년만 추가될 뿐 아닌가.
“김 사장님, 잘 생각하고 판단하십쇼. 본인은 지금 우리랑 싸울 때가 아닙니다. 뒷돈 처먹은 오명석한테 얼른 민사 걸어야죠. 그 마이너스 혼자 다 감당할 겁니까?”
“…….”
“제 제안은 여기까집니다. 제가 일어서기 전까지 본인 입장 말씀해 주세요.”
한동안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려운 고민일 것이다. 최악을 선택하느냐, 더 큰 최악을 선택하느냐. 팔을 자를지 다리를 자를지 선택하는 것과 같다.
“후우……. 알겠습니다. 결국 그 선택을 하시는군요. 그럼 전 이만.”
그렇게 엉덩이를 들 때, 그가 허겁지겁 달려와 준철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네, 오명석이한테 떡값 돌렸습니다! 공사비 10%인 5천을 현찰로 돌렸고, 사모한테 천만 원짜리 가방도 돌렸습니다! 그 새끼가 딴 업체한테 어떤 접대 받고 다녔는지도 알아요.
과장님! 제가 아는 거 다 말해드릴 테니 과징금이라도 좀 깎아 주실 수 없습니까!”
정말로 애절한 고백이었다.
***
“과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검찰과 공정위가…….”
“뭐?”
“일단 얼른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오명석은 팀장의 다급한 보고에 급히 엉덩이를 들었다.
연일 계속되는 피로 누적에 정신이 비몽사몽 했지만, 오늘은 정신이 번쩍 드는 날이었다.
“공정위랑 검찰이 닥쳤다고?”
“예.”
“도대체 왜? 우리 서류 협조 다 했잖아. 미비 자료 있었어?”
“연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까 위에서 국장님과 면담을 나눴다는데……. 지금 과장님을 찾고 있습니다.”
등 뒤에서 서늘한 식은땀이 타고 내려왔다.
소환 조사, 압수수색. 이다음 수순은 구속영장 아닌가. 국장님과 따로 면담까지 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설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체포를?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 말자.’
단순히 미비 자료가 있었던 거겠지.
오명석은 그리 자위하며 자료실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미비 자료 때문에 찾아온 모양새는 아니었다.
부서 전 직원들이 모두 집합당한 채 서류를 부지런히 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이 사건이 뉴스까지 타며 전 직원들도 녹초가 되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오명석이 등장했을 땐, 살벌한 눈빛이 그를 반겼다.
“내가 오명석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요?”
하지만 궁지에 몰릴수록 목소리는 커야 하는 법. 오명석은 되레 공정위 직원들에게 호통을 쳤다.
“아, 당사자 왔군요. 다들 됐습니다. 자료는 우리가 가져가죠.”
“아니, 자료가 부족하면 공문 보내서 달라 하면 될 것이지 왜 여기저기 들쑤셔 놔요.”
긴말할 거 없다. 준철은 오늘 막 검찰에서 발부된 따끈따끈한 영장을 들이밀었다.
“오명석 씨, 당신을 뇌물수수혐의로 체포합니다. 강원 지검 홍영민 검사 대독.”
“뭐?”
“지금 검사님이 당신 기소 치느라 바빠서요. 담당 형사님은 다른 업체들 사장들 잡으러 가셨고.”
“당최 무슨 소리야!”
“석초암 복원공사 때 4천 수수, 석가탄신일 축제 행사 때 5천 수수, 태영건설, 화산엠디, SA디미. 뭐 여기 업체들 다 이름 한 번씩 들어 보셨죠. 친분도 깊으시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모두 자신이 수의계약으로 직접 지정한 업체들 이름이었다. 뇌물수수 액수도 10원 한 장 틀리지 않았다.
“이번 사천사 공사도 접대 한번 크게 받으셨더군요. 고급 룸사롱에서 접대 두 번, 현찰로 챙긴 떡값 5천, 추가로 사모님께 드린 명품백. 도합 6천. 유진건설 김 사장이 자백한
내용들입니다.”
잠시 말문을 잃었던 그는 곧 정신을 되찾고 진부한 대답을 외쳤다.
“대체 그게 뭔 개소리야? 난 모르는 일이야!”
“이미 자백이 나왔다니까요.”
“그 새끼가 공사비 삥땅 치고 급하니까 내 이름 둘러댔겠지!”
“이야……. 독하시네. 지금 동업자까지 파는 겁니까?”
그의 독기는 사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 필요 없고 나 잡아가려면 여기 있는 사람 다 끌고 가야 할걸.”
“네?”
“지금 내가 수의계약 줬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잖아. 근데 그거 내가 혼자 내린 결정 아니었어. 우리 팀장들이 후보사 선정해서 넘겼고, 최종사는 과장들과 결정해서 내린 거야. 이래도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냐고.”
이번엔 준철이 할 말을 잃었다.
잃을 게 없는 놈만큼 무서운 게 없다. 지금 이놈은 업계 동료, 후배들까지 팔아 가며 악다구니를 쓴다.
“우리도 알 건 다 압니다. 오명석 씨가 예산 잘 따와서 업체 정할 때 발언권이 가장 컸다는 거.”
“누가 그래? 이거 다 회의에 부쳐서 결정했어. 아니, 다른 사람들도 얘기 좀 해 봐요. 여러분, 이거 나 혼자 결정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지만 아무도 나서지는 못했다.
형식상 회의로 결정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서 오명석을 고발할 용기까진 없었다.
“이거 보쇼. 다들 말 못 하잖아. 이건 나 혼자 결정한 거 아니야. 그냥 관례대로 일 처리한 ‘우리’들의 실수라고.”
“저기요…….”
“이보세요, 조사관님. 내가 이쯤 했으면 그만합시다. 이번을 기회로 우리 문화재청 내에서도 수의계약에 대한 문제점이 많이 지적됐어요. 앞으론 불미스러운 오해 발생 안 하게끔
조심하겠습니다. 네? 끝내자고요.”
“그만해, 이 새끼야!”
그때였다.
별안간 묵직한 호통이 들리더니 송 국장이 등장했다.
“구, 국장님…….”
송 국장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 길로 오명석을 뺨을 내려쳤다.
“염치도 없는 새끼! 이젠 네 동료들까지 팔아먹어?”
“그, 그게 아니라…….”
“내가 너한테 보내 준 신임이 아깝다. 예산 잘 따온다고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지? 이거 다 네놈이 주도하고 다른 과장들은 요식행위로 회의에 참여한 거 모를 것 같아?”
따귀를 맞고 쓰러진 오명석은 입도 다물지 못했다.
송 국장은 이를 본체만체하며 준철에게 고개를 숙였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공정위와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부디 개인의 일탈이 조직의 일탈로 번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예.”
“필요한 자료 있으면 모두 말씀해 주십쇼.”
송 국장이 자리를 벗어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다.
혼자 남게 된 오명석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