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6
26화
연수원 동기? (2)
행정고시 41기 박다영 사무관.
이 몸의 진짜 주인인 이준철과 행시 동기이자 같은 분임(팀)이었다.
지방대를 졸업한 이 몸의 진짜 주인과 달리, 그녀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무려 스물넷에 행시를 패스한 성골 엘리트였다.
두 살 더 많다고 선배 소리 듣는 게 민망할 정도다.
“연수원도 수석 졸업이야?”
준철은 41기 졸업사진을 보며 혀를 찼다.
그녀는 임명장 수여식 때 대표자 선서까지 했다. 난다 긴다 하는 놈들 사이에서도 1등을 차지한 수재라는 뜻.
모든 방법을 동원해 파악한 그녀의 신상은 ‘금감원’에서 근무한다는 것뿐이다.
“전화번호도 없을 정도면 정말 연관 없는 사람인데…….”
준철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사진들을 치우며 침대에 누웠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잊고 살던 지인이 갑자기 연락을 해 올 때, 동창회 친구가 갑자기 친한 척 해 올 때. 이런 경우는 보통 무언가 부탁할 때뿐 아닌가?
모르는 과거 얘기가 나오진 않겠지.
‘…….’
그렇게 잠깐 졸다 불현듯 눈이 부릅떠졌다.
너무 사무적으로만 생각했다.
미모가 출중하던데 애인 관계였으면 어쩌지?
모르는 과거 얘기 꺼내면서,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하면 어쩌지?
***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준철은 1시간이나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부회장의 횡령을 대신 뒤집어쓰고 검찰에 출두했을 때도 이처럼 떨리진 않았던 것 같다.
심란한 얼굴로 커피 두 잔을 비우자 묘령의 여인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혹시, 준철 선배?”
준철은 화들짝 놀랐다.
세련된 인상에 이지적인 외모.
연수원 졸업사진으로 대충 미모는 예상하고 있었는데, 막상 만나 보니 예상을 뛰어 넘는 얼굴이다.
“어머! 진짜 맞구나. 준철 선배.”
“어…… 어.”
“아니 사람이 왜 이렇게 변했어요? 준철 선배 원래 머리에 이런 거 안 바르지 않아요?”
놀라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던 뿔테 안경, 더벅머리, 아빠 양복.
이게 그녀가 기억하는 준철의 모습이었다. 촌스러움의 표본이었던 남자가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나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진짜 TV에서 본 그 모습이 맞구나. 전화하면서도 긴가민가했는데.”
“TV?”
“네! 선배가 대성중공업 건하고 한경대리점 갑질 맡은 거 맞죠? 기자회견할 때 겨우 알아봤어요.”
“아…… 그랬구나.”
준철은 한시름 돌렸다.
왜 뜬금없이 연락해 오나 했더니 기자회견 봤구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연락해 온 건 아니다.
“고마워. 너도 얼굴 좋아진 것 같다. 어떻게 지냈어?”
“응? 준철 선배 드디어 저한테 말 편하게 하는 거예요? 호호.”
“……뭐?”
“저랑 분임(조별)과제 할 때도 말 안 놨잖아요. 다영 씨, 다영 씨 거려서 동기들이 닭살 돋는다 했던 거 기억 안 나요?”
미치겠다.
연수원 동기면 최소 3개월씩 서로 얼굴 보며 사는 사이다. 같은 분임이면 합숙 생활까지 했을 텐데, 말도 못 놓는 사이였다고?
“아 맞다. 그랬었죠.”
“됐어요. 이제 겨우 편한 사이 됐는데, 갑자기 왜 또 존댓말을 하세요.”
“…….”
준철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미모가 출중함은 물론, 언변과 자신감 또한 상당하다.
말을 편하게 놓지 못한 건, 정말 상대가 편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랬던 건지도 모른다.
커피로 목을 축인 준철은 준비한 말을 꺼냈다.
“미안. 최근에 큰 사고를 당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해.”
“사고요?”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적 있거든. 혼수상태로 좀 오래 지냈어.”
“아니 대체 얼마나 큰 사고였기에.”
지난 사정에 대해 설명하자 그녀가 안쓰러운 얼굴을 지었다.
“미안해요. 미리 알았다면 꼭 찾아갔을 텐데.”
“괜찮아. 그만큼 내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 한 말이야. 과거 얘기를 내가 많이 기억 못 할 수도 있어. 근데 오늘 보자고 한 이유가?”
준철이 주제를 돌리자 활기차 있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역시나 부탁할 게 있다는 뜻이다.
“선배. 지금 저희 금감원이 건수 하나 잡은 게 있는데,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내 개인적인 도움이 필요한 거야, 아님 공정위가 필요한 거야?”
“……둘 다요.”
“얼마나 큰데?”
“지금 저희 쪽에 제보한 사람만 8명. 근데…… 피해자는 더 있고 이미 그중 10명은 사망했어요.”
준철의 눈빛이 달라졌다.
“설마 보험사와 관련한 얘기야?”
“맞아요. 근데 그걸 어떻게……?”
“공정위가 금감원 도와줄 일이 보험 약관 말고 또 있나. 무슨 상황인데?”
박다영은 내심 놀랐다.
연수원에서 보던 그 촌스럽고 어리숙한 남자가 아니다. 사무적인 말투에 분위기도 차가워졌다.
그녀는 커피 잔을 어루만지며 조심히 말을 꺼냈다.
“선배, 유경생명 아세요?”
“유경생명이면…… YK다이렉트 보험?”
“네. 그중에서도 암보험이요. 지금 가입자들과 치료비 분쟁이 있는데 약관이 무척 애매하거든요.”
“음…… 내가 잘은 모르지만 약관이 애매할 땐 가입자한테 더 유리하게 해석하는 거잖아. 이렇게 따로 찾아와야 할 정돈가?”
“지금은 약관이 애매한 게 아니라 병에 대한 치료법이 애매해서요.”
무슨 말이지?
준철이 눈썹을 들자 그녀가 짧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지금 YK암보험이 ‘치료법’ 가지고 딴지를 걸고 있어요. 암환자가 치료를 위해서 요양병원에 입원했는데, 요양병원비는 안 된다는 거예요. 병에 대한
‘필수치료’로 인정할 수 없다고.”
“그럼 입원치료만 지원하겠다는 건가?”
“네. 근데 어떻게 모든 암치료를 다 입원치료로 해요.”
암 환자의 가장 큰 고통은 병이 아니라 죄책감이다.
자신이 암에 걸리면, 다른 가족이 생계를 포기하고 병간호를 도와야 하는 것이다.
요양병원 입원은 이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YK암보험은 요양을 필수치료로 인정하지 않으며 거부해 버렸다.
참으로 난감하다. 약관이 애매하면 무조건 가입자 편을 들어 줄 수 있는데…… 어디까지를 필수치료로 볼지에 대한 애매함이다.
이건 의학적 소견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다.
그리고 보통 보험사는 이런 싸움에선 절대지지 않는다.
“금감원에서 적당히 중재할 수 있지 않나?”
“했죠. 무려 다섯 차례나! 같은 분쟁이 다섯 차례나 있었는데, 우리 쪽에선 전부 지급권고로 결정 내렸어요. 근데 YK쪽에서 그 권고안 다 안 따랐어요.”
준철은 커피를 뿜을 뻔했다.
금감원의 권고 결정은 사실상 명령이다.
불복하고 재판으로 간다? 이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법원도 행정명령을 존중하고 판결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걸 제일 잘 아는 게 보험사인데, 감히 금감원의 권고를 무시했다니?
“진짜야? 보험사가 금감원의 권고를 무시했다고?”
“정확히 말해 이것도 편법으로 빠져나갔어요. 금감원 결정은 단순히 권고일 뿐이다, 재판까지 갈 거다라고 가입자들 협박했더군요.”
“설마 일부러 시간 끌었다는 건가?”
“네. 보험사랑 시한부 선고받은 암환자. 양쪽이 시간 싸움하면 누가 이기겠어요? 이건 환자들 약점 가지고 악용한 거예요! 우리가 다섯 차례나 지급권고 내렸는데 다 지급한 사례는
없고 전부 2-30% 지원으로 끝이 났어요.”
준철은 내내 쓰디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에 공감해서가 아니다. 과거의 악연 때문이다.
김성균이 임원으로 처음 진급했을 때 발령 받은 곳이, 한명보험 심사과였다.
한명보험은 회장님이 편법승계하려고 지분을 다 몰아넣은 회사였는데, 후계 수업을 받는 2세들은 모두 여기를 거쳐 갔다.
당시 부회장을 따라 보험심사과 이사장으로 간 김성균은 딱 한 가지 일만 했다.
잡은 물고기들한테 밥 안 주기.
영업부가 보험을 많이 팔아 오면, 보험심사과는 별의별 트집을 잡아 보험료 지급을 막았다.
희귀 질환 보장을 나중에 특약이었다 우겼고.
치료비 나갈 내역이 있으면 필수치료가 아니라 우겼다.
보험사기 예방이라는 본연의 목적은 열에 한 건도 되지 않았다.
그런 악행이 지금은 그게 화살이 되어 돌아오는 것 같다.
그 돈이 누군가에게는 내일 당장의 치료비였다니. 누군가의 생명과 직결된 이야기였다니…….
왜 그땐 돈 타 가는 모든 사람이 다 보험 사기꾼으로 보였을까?
“해서 저희는 이번 기회에 이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고 봐요.”
긴 상념에 잠겨 있던 준철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럼 나도 핵심만 물을게. 금감원에서 직접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을 왜 나한테 부탁하지? 그쪽에서 일이 잘 안 풀린 건가?”
그녀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맞아요. 이거 지금 제 윗선에서 다 손 떼라고 지시한 사항이에요. 저희 윗선은 이번에도 지급권고로 끝내려 하거든요. 근데 이미 다섯 번이나 권고를 무시한 보험사가, 여섯 번째
권고하면 먹히겠어요?”
“설마…….”
“네. 저는 중징계 내려야겠어요. 최소한 기관경고 정도는 들어가야죠. 유경생명이 약관을 고치든, 보장 범위를 넓히든 이 말장난 끝내야 돼요.”
금감원의 제재는 총 다섯 단계로 ‘기관경고’는 2단계에 해당하는 중징계다. 기관경고가 확정되면 유경생명은 1년간 신사업을 할 수 없다.
회사가 휘청거릴 수 있는 만큼 유경생명도 사력을 다할 것이다.
몸은 젊어졌지만 준철도 산전수전 다 겪어 본 기업 임원이었다.
박다영의 윗선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큰 싸움으로 번질 게 빤한데 당연히 덮는 게 좋지. 심지어 별로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싸움 아닌가.
그녀가 공정위에 공문을 보내지 않고, 이렇게 개인적으로 찾아온 이유가 단숨에 설명되었다.
“그래서 뭘 도와달라는 거지?”
“공정위가 이 보험 내용에 문제 있다고 ‘유권해석’ 내려 주면 저희가 중징계할 수 있는 명분이 돼요.”
“…….”
준철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그녀가 바로 덧붙였다.
“선배, 이 약관 그대로 두면 내년에도 후년에도 또 이거 가지고 분쟁 일어나요. 누군가는 해결해 줘야죠.”
엄밀히 말해 그녀의 부탁은, 공문으로 요청한 게 아닌 개인적인 부탁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없던 일이 된다.
안 된다고만 말하면 된다.
하지만 준철의 입에선 차마 대답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저주하며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한번 시작된 이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