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65
265화
의좋은 동업자 (3)
“확실해? 정말 없어?”
“없어. 전혀.”
홍진영은 더 묻지 않았다. 한번 아니라고 하면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아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친구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이젠 친구라는 호칭도 빛바래졌지만.
“좋아. 이런 말 꺼내서 미안하다. 그래도 서로 확실하게 하는 게 좋겠지? 판촉비 내역을 어떻게 알바생한테 지급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잖아.”
“차명계좌 2개 써서 지급했다. 대부분 백화점 상품권 문상으로 세탁 한 번 해서 지급했는데, 몇 개는 계좌로 직접 입금해 줬어. 그 자료는 여기에 나와 있으니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으면 하고. 또 질문할 거 있냐?”
홍진영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하자 이민섭은 직접 자료까지 내줬다.
“아니, 나도 없다.”
“표정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기왕 얘기 나온 김에 우리 확실히 단도리 하자. 또 묻고 싶은 말 없어?”
“진짜 없어. 질문 꺼낸 내가 미안하다.”
이민섭은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졌지만, 굳게 다문 친구의 입을 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후우…… 진영아. 우리가 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냐. 그때가 그립다. 옥탑방에서 서버 구축하고 난 판교 뛰어다니던 때. 알지? 초기 투자금 3천은 내가 전세 보증금 빼서 댄
거.”
“그래, 후속 투자는 내 전세 자금으로 댔고.”
“격세지감이지 않냐? 그때 나랑 넌 사무실에서 침낭 깔고 겨울을 버텼는데, 이젠 이 120평짜리 사무실도 좁아. 흐흐.”
갑자기 추억팔이를 해 대던 이민섭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이 고비만 넘기면 우린 탄탄대로다. 언제까지 사무실 평수 넓혀 가는 거에 만족할 거야? 판교에서 가장 삐까뻔쩍한 건물에 등기쳐야지. 안 그래?”
“…….”
“네가 왜 이런 말 하는지 안다. 아마 여기저기서 너한테 유혹을 많이 해 올 거야. 근데 놈들의 이간질에 속아 넘어가지 마. 우린 벼랑 끝에서도 같은 편이야.”
“그래…… 우린 같은 편이지.”
“이런. 얘기가 또 길어졌네. 이 차명계좌 자료엔 모든 내역 다 나와 있으니 유심히 검토해 봐. 이해가 안 되는 부분 있으면 나한테 언제든 물어보고. 그럼 얘기 다 좋게 끝난 줄
알고 먼저 일어난다.”
이민섭이 홀연히 떠나자 사무실엔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홍진영은 분노도 후련함도 없는 얼굴로 회사의 치부가 담겨 있는 계좌를 응시했다.
놈의 말대로 두 사람에겐 좋은 시절이 있었다. 아이디어 하나로 무일푼 취준생이 업계 1등 기업에도 올라 봤다. 이 정도면 벤처 신화라는 표현도 과하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거듭 나쁜 생각을 떨쳐 보려 해도.
동고동락한 친구의 말보단 어제 만난 과장의 말이 더 신뢰가 갔다. 이미 신뢰가 비틀어졌단 증거일 것이다.
-잡스와 워즈니악이 정말 우정이라 생각하시나요? 이 기회를 뿌리치면 당신은 평생 호구 잡히며 살 겁니다.
혁신의 아이콘이 된 잡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당하고 사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만족하고 살았던 워즈니악. 어제 만난 과장의 말이 다시 떠오르다가 뒤늦게 후회와 배신감이
몰려온다.
난 왜 이렇게 바보처럼 살았던 걸까.
‘X새기……. 두 번은 안 당한다.’
하지만 홍진영은 여전히 세상물정 모르는 개발자였을 뿐이다.
“어, 난데. 지금 보낸 문자로 사내유보금 전부 다 옮겨 놔.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도 다 처분하고. 아니, 회사 돈 많아 봤자 공정위 과징금만 커져서 그래. 홍 대표랑 다 얘기
끝난 일이야. 그래, 오늘 안으로 처리해.”
이민섭은 친구가 곧 자신을 배신할 것이란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
이튿날 아침.
누군가 엘리베이터에서 과장실까지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노크도 잊은 채 들어온 배 팀장은 숨을 헐떡거렸다.
“뭔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헉……헉. 과장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뭐?”
“증인 잡으면 그 증인이 증거까지 가져올 거란 말씀요! 홍진영이 우리 편에 섰어요. 이민섭이 쓴 차명계좌 내역을 전부 저희 쪽에 넘겼습니다.”
그 소식에 준철도 번쩍 몸을 일으켰다.
“전부 다?”
“네. 예상대로 알바비는 다 상품권으로 한 번씩 세탁해서 줬습니다. 그중에 다섯 건 정도 계좌에 직접 입금한 내역이 있는데 이게 고스란히 잡혔습니다.”
이 정도면 재판 증거로 쓰기엔 충분하다.
입금 내역을 잡았으니 공범들을 소환해 더 많은 양의 자백을 받아 낼 수도 있다.
“좋아. 그럼 그 자료를 바로 검찰에 넘겨. 이민섭이 영장, 아니 출국 금지부터 받아 놔야 돼.”
“근데 아직 원본 자료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홍진영 측에서 먼저 약속부터 받고 싶다고…….”
“야, 장사 한두 번 하냐! 홍진영은 불기소처분에 공금횡령 혐의도 적용하지 않을 거야. 대신 원본 자료를 24시간 안으로 가져와. 만약 이민섭이가 한국을 뜨면 남은 놈이 독박 쓰는
거야.”
배 팀장이 부리나케 사라지자 준철도 덩달아 바빠졌다.
허위 세금계산서 발행, 공금횡령, 허위 과장 광고, 전자상거래법 위반……. 혐의가 너무 많아 어떤 죄목으로 처벌해야 쳐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땐 영장이 가장 빨리 나오는 걸로
치는 게 맞겠지?
‘근데 왜 자꾸 불안하지…….’
동업자의 내부 고발로 모든 퍼즐이 맞춰졌으니 이제 게임은 끝났다. 하지만 전신을 타고 도는 찝찝한 불안감에 한시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괜한 노파심일까?
준철은 들뜬 마음을 달래려고 방금 준 배 팀장의 자료에 집중했다. 이미 외우다시피 본 회계 내역인데 자꾸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러다 이내 이 찝찝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불과 하루 사이 사내유보금과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모두 공백으로 처리된 것이다.
이를 확인한 준철은 바로 서울지검으로 전화를 돌렸다.
“김 검사님, 저 공정위 이 과장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그 사건, 동업자가 모든 자료를 들고 자수했습니다. 근데 저, 다름이 아니라…….”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지만 어째 뜨뜻미지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사본 증거만 확보됐는데 영장을 쳐 달라고요?
“네. 한시가 급합니다.”
-과장님…… 법적 절차 아시잖아요. 한 발자국이라도 성급하면 꼭 트집 잡히는 거. 말씀 들어 보니 원본 증거가 곧 넘어올 것 같은데 천천히 하시죠. 뭐, 증거가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피의자가 도망갈까 봐 부탁드리는 겁니다.”
-예?
“오늘 아침에, 업데이트된 회계 내역이 들어왔는데 이거 지금 돈이 다 사라져 있습니다.”
-설마 그럼……?
이판사판 야반도주.
이건 구속과 출국 금지로도 막을 수 없다. 이민섭은 원체 눈치가 빠른 성격이니 돌변한 동업자의 태도와 조사 상황을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영장이 무리라면 일단 출국 금지부터 걸어 주십쇼. 무조건 발을 묶어야 합니다.”
-하아…… 이거 절차상 문제 있는 건데.
검사는 잠시 고민했지만 눈앞에서 피해자를 놓치는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어떤 기분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알겠습니다. 일단 조치시켜 놓을 테니 원본 서류 바로 팩스로 보내 주세요. 마침 영장판사가 제 연수원 동긴데 2시간 안으로 받아 놓겠습니다.
하지만 검사의 말은 실현될 수 없었다.
과장실 바깥에서 또다시 전력 질주하는 소리가 열리더니, 이번에도 노크 없이 문이 열렸다.
달려온 배 팀장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과장님…… 지금 이민섭에게 연락이 안 닿는답니다.”
“뭐?”
“이틀 전부터 행방이 묘연하다고…….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고 주변과 연락을 아주 끊었답니다.”
젠장. 왜 불길한 직감은 틀리는 법이 없을까.
그 소리에 준철이 바로 외투를 들고 일어났다.
“경찰 광수대에 연락해! 아니, 언론에 먼저 뿌려! 이 자식 얼굴 대문짝만 하게 걸고 수배해! 이 자식 반드시 찾아야 된다.”
***
[벤처의 배신, 전도유망하던 만남 어플 대표 잠적] [최근 공정위 조사가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닿지 않는 연락, 행방은 어디로?]이튿날.
영앤리치 회사 소식이 신문 전면을 도배했다.
최근 IT 벤처 신화가 유행처럼 번지며 이와 관련한 사기 사건이 줄을 이었지만, 대표가 회사 돈을 들고 야반도주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사상 초유의 사태 속에서 뉴스는 이민섭의 얼굴까지 공개하며 행방을 찾았다.
-다음 소식입니다. 영앤리치 대표인 이민섭의 행방이 나흘 째 묘연합니다. 검찰은 조속히 영장 신청과 출국 금지 신청을 했지만, 늦장 대응이란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해당 회사는 현재 유령 회원을 고용했단 의혹을 받고 있으며 최근 공정위에 조사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회원들이 환불을 요구하며 몰려들었으나, 대표가 잠적하며 처벌될지도 미지수입니다.
준철은 언론 보도를 적극 지시하며 놈의 행방을 쫓았지만 나흘째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준철의 목소리엔 짜증이 담겼다.
“이 자식, 연락 진짜 안 돼?”
“네…… 친인척한테도 연락이 안 된답니다.”
“그 친인척들한테 말해 놔, 자수하면 참작한다고.”
보통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석고대죄하며 과징금 협상에 들어간다.
이렇게 잠적해 버리는 건 이건 죄를 시인할 용의가 없으며, 끝까지 막장으로 가자는 뜻이다.
“홍진영이는 어때?”
“거기가 진짜 패닉입니다. 완전 난리도 아니에요.”
“혹시 그놈이 수상한 행적 같은 걸 보이진 않았어?”
“그놈이 도피를 도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사람을 붙여 볼까요?”
“됐다. 일단 집중하자.”
동업자 치부를 다 들고 자수했는데, 도피를 돕지는 않았겠지.
준철은 울화통이 다 터질 것 같다.
대책 없을 때 해외로 도피하는 건 너무나 흔한 결말 아닌가.
이제 와 검찰의 구속영장과 출국 금지는 무의미한 것이다. 밀항선만 타 버리면 재벌 부럽지 않은 제2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오전부터 이어진 자책과 후회는 퇴근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준철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그렇게 시곗바늘이 자정을 넘겼을 때, 불현듯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과장님! 근데 지금 광수대에서 제보가 하나 잡혔는데요. 이민섭으로 추정되는 놈이 평택항으로 갔답니다.
“뭐?”
-오늘 새벽 3시에 상하이로 출발하는 밀항선이에요.
뉴스로 영앤리치 소식을 떠들어 댄 게 다행이었다.
“아니 그럼 뭐 하고 있어? 빨리 평택으로 가야지!”
-그게, 저…… 업자들이 딜을 해 왔답니다. 이놈 신변을 확보하고 있으면 뭐 해 줄 거냐고…….
“그 새끼가 준 밀항 티켓비의 두 배 준다 그래! 아니, 열 배 준다 그래!”
-여, 열 배요? 우리 진짜 그 돈 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줄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안 되면 협박이라도 해. 해당 밀항에 대해선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겠다, 근데 일이 잘못되면 네들 가중 처벌 될 거다.
-아…… 예.
“수다 떨 시간 없다. 너도 당장 평택으로 가! 나도 간다. 가서 연락하자.
전화를 끊은 준철은 잠옷 차림에 파카만 거치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