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66
266화
의좋은 동업자 (4)
“노 노 코리안. 워 쓰 리 미엔 쓰이.”
늦은 새벽, 평택항.
한적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항구엔 분주한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민섭은 어눌한 발음으로 선원 한 명 한 명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리 미엔 쓰이.”
이는 이제부터 그가 써야 할 이름이었다. 그는 위조 여권을 들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선원들과 안면을 텄다.
“비린내 나서 원. 김 사장님, 왜 하고많은 배 중에 새우잡이배요. 평택항에 고깃배도 다녀?”
“아따 그리 말하면 섭하제. 이 사장님 모시려고 어렵게 구했는디.”
“됐고. 티켓비 따블로 드릴 테니 딴 배 좀 탑시다. 나 저거 비린내 나서 못 타겠어.”
“이 사장님, 고마 참으소. 밀항하는데 유람선 타실랑가요. 어차피 이틀만 가면 딴 생 사실 텐데.”
김 사장이라 불린 사내는 이민섭에게 눈을 흘겼다.
밀항하는 놈치고 참 불평이 많은 놈이다.
“출발하기 전에 소주 댓병 자셔. 눈 뜨면 상하이에 도착할 것잉께.”
“배 꼬라지 보니 잠이 안 올 것 같습니다. 저거 바다에 뜨기는 해요? 나 가다가 물고기 밥 되는 거 아니야?”
“성능은 문제없수.”
“옌장, 죽어도 딴 배 타라 소리는 안 하네. 그래요, 그럽시다. 뭐, 내 인생에서 이런 배 탈 일이 또 있나.”
“그나저나 이 사장님, 좀 기다려야 쓰것는디.”
“네?”
“예보에 풍랑이 좀 친다 그러더라고. 선장이 한 두어 시간 있다 출발한다는디 괜찮지?”
그 말에 이민섭은 짜증이 솟구쳤다.
“한 시간 지연?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딨어요? 이건 얘기랑 다르잖아.”
“이해 좀 혀. 날씨가 그렇다는디 어째.”
“아, 몰라! 나 그럼 이 배 안 타. 가뜩이나 비린내 때문에 질식하겠구만 시간도 못 맞춰?”
“그람 별수 없구. 일주일 뒤 목포에서 배 한 척 또 뜬다는디 그거 탑시다잉.”
“아니, 잠깐만……. 이럼 나 돈 못 줘요.”
“돈은 목포에서 주시구려. 뭐 밀항할 사람이 없나, 배가 없지.”
밀항 업자는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이었다. 티켓에 위조 여권까지 도합 2억을 받기로 했는데, 이 돈이 정말 아깝지 않은 걸까?
사실 급한 건 이민섭이었다. 회사 돈을 모조리 다 빼돌리고 배를 타지 않았나. 돈은 안전하게 옮겨 놨으니, 이젠 사람만 빠져나가면 된다.
“그러지 말고 내가 선장 얼굴 좀 봅시다. 재 시간에 출발하면 내가 팁 좀 드릴 수 있는데.”
“관둬, 그냥 선장한티 승선자 빼라고 할 테니.”
“이거 참, 김 사장님 왜 그러실까. 내가 그냥 해 본 말 가지고. 돈 여기 있습니다. 나 이 배 탈게요.”
이러나저러나 하루빨리 한국을 뜨는 게 급선무.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국에서의 수배 생활은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티켓비를 지불한 이민섭은 바로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엄마. 나 리 미엔 쓰이, 아니 민섭이야. 응, 이제 배 타려고. 내 걱정은 말고. 아버지 좀 잘 챙기고 있어. 응? 공정위? 그 새끼들 들락거리는 거 신경 쓰지 마. 이거
대포폰이라서 어차피 추적도 안 돼. 아들 군대 한 번 더 갔다 생각하고 맘 편히 있어요. 이쪽 정리되면 나중에 연락할게.”
공정위와 경찰이 얼마나 괴롭혀 댄 것인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미 수심 한가득이었다.
지금쯤 회사도 난리가 났을 것이다. 뉴스에서 본바, 해당 사태로 환불 러시가 이어지며 회사가 파산 위기에 처해 있다 하니.
하지만 알 바 아니다, 오늘 이 밀항선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줄 것이니.
“사장님, 이제 갑시다. 두 시간도 더 지났네.”
그러나 그렇게 다시 업자를 찾아갔을 때, 왠지 모를 수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것이, 글씨…… 한 한 시간만 더 기다려 달라는디.”
“뭐요?”
“미안혀. 여기 모터가 고장 나서 수리 좀 해야 하나 봐.”
“아니, 이런 게 어디 있어! 김 사장님, 중도금 받았다고 태도 확 달라지네? 이럼 나 잔금 못 줘요. 1억 안 받으실 거야?”
“내가 면목 없소. 그러지 말고 딱 한 시간만 더…….”
그때였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갑자기 항구 일대에 플래시가 터졌다. 이와 함께 멀리서 경찰 사이렌이 울리더니, 봉고차 서너 대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뭔…….”
당황하기도 잠시.
김 사장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돈 가방을 두고 냅다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플래시가 한곳으로 쏠리며, 이민섭을 연극 무대의 주인공처럼 만들어 주었다.
젠장! 이 업자 새끼들한테 당했구나……. 그런 깨달음이 드는 순간 익숙한 남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이민섭이! 너 꼼짝 마! 추격전까지 찍으면 20년 때릴 거야!
***
꼼짝없이 취조실로 붙잡혀 온 이민섭은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인생 2막을 준비하다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당분간은 식음도 전폐할 것이다.
“리 미엔 쓰이? 이게 네 중국 이름이야? 흐흐.”
“…….”
“업자들한테 뒤통수 맞으니까 얼얼하지? 영앤리치 가입자들은 그것보다 더할 거야.”
밀항을 시도하다 붙잡혔으니 최소한의 배려도 바랄 수 없다. 담당 검사는 바퀴벌레 보듯 쳐다보며 그를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게 닫힌 그의 입은 한 시간째 열리지 않았다.
“야! 너 변호사도 안 불렀잖아. 말 잘하는 놈이 왜 이제 와 묵비권이야? 대답해. 회사 돈 어디다 꿍쳤어? 해외 계좌지!”
지금은 죄를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빼돌린 회사 돈이 어디에 짱박혀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담당 검사는 협박과 회유, 고향에 계신 부모님까지 들먹이며 입을 열려 애썼지만, 놈은 식사까지 거르며 단 한 번도 입을 떼지 않았다.
취조 과정을 미러룸에서 지켜보던 부장검사가 혀를 찼다.
“의외로 끈질기네. 설마 저 새끼, 출소하고 나서 2회 차 살려고 저러나.”
“식사도 거르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뭘까요?”
“아직 현실 자각을 못 하는 거겠죠. 입을 여는 순간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거라 생각하는 겁니다.”
“허허, 우리 과장님은 피의자 심리도 잘 아시는군요.”
경험담이니까.
“부장님, 그러지 말고 제가 이민섭이 따로 독대 좀 할 수 있을까요?”
“저래 봬도 우리 김 검사가 자백 자판기예요. 저 친구도 못 했는데, 과장님이 독대한다고 될까요?”
“저도 자백 받아 내는 데엔 일가견이 있습니다.”
부장검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취조 검사더러 나오라 시켰다.
그렇게 이민섭과 독대하게 된 준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민섭 씨, 그게 아니지. 묵비권을 계속 쓰면 취조만 길어질 텐데 밥까지 안 먹어서야 되겠어?”
“…….”
“뭐 돈 숨기려고 입 다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정신 차립시다. 민섭 씨, 돈 어디다 숨겼어요?”
“……너지?”
놈이 입을 뗀 첫 마디였다.
“네가 진영이 꾀어서 회사 기밀 자료를 가져오라 시켰지! 이 후레자식 새끼! 감히 우릴 이간질시켜? 어디 한번 원 없이 나 조져 봐. 돈? 몰라. 그 돈, 평택항에다 고깃밥으로
줬으니까.”
이쯤 했으면 광기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당한 게 억울해서 돈의 행방을 말하지 않는다.
하긴, 분할 만도 하다. 동업자의 배신만 아니었다면 적당한 처벌에, 적당한 과징금으로 충분히 마무리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그러지 말고 좋게 갑시다. 피해자들한테 환불이라도 해 줘야 처벌이 가벼워져.”
“염병 떨고 앉았네. 허위 세금 계산서, 전자상거래법 위반, 횡령, 야반도주……. 이 혐의들을 다 씌울 거면서 무슨 가벼운 형량?”
“어째 좀 이상하게 들리네. 지금 나랑 처벌 수위를 협상하자는 겁니까?”
“돈 행방을 알고 싶으면 내가 만족할 만한 처벌 수위부터 가져오쇼.”
그럼 그렇지. 살짝 틈을 주니, 바로 형량 가지고 협상하려 든다. 미친놈이 아니라 미친 척을 했던 놈이다.
“역시 오랑캐는 오랑캐로 잡아야겠구먼.”
준철은 고개를 돌리며 전화기를 들었다.
그렇게 전화가 끊기자 얼마 뒤 취조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수인복을 입고 들어온 홍진영은 말릴 틈도 없이 놈에게 달려들었다. 이민섭도 당황했는지 아무 저항도 못 했다.
“추억팔이 다 해 가면서 내 뒤통수를 쳐? 대답해, 이 새끼야! 돈 어디 있어?”
“모, 몰라. 컥컥.”
“네가 숨겨 놓고 왜 몰라?”
“다, 다 썼어.”
“다 쓰긴, 개뿔! 임 전무가 계좌 확인했어. 나랑 대화 끝나고 바로 옮겼다며? 그 돈 어디 있어!”
“이보세요, 컥컥. 이것 좀 말려 봐요.”
준철은 홍진영을 설렁설렁 말렸다.
“진영 씨, 일단 진정하세요.”
“빨리 불어! 나라곤 네 새끼 약점 하나 안 쥐고 있는 줄 알아? 너 유령회사 세운 거 니네 아빠 이름이었지? 그거 내가 변호사한테 물어보니 몰수 가능하더라.”
“컥컥!”
“너 새끼만 죽일 수 있으면 내가 검찰에 더한 것도 말할 수 있어. 니네 부모랑 너랑 나 다 같이 죽자!”
부모 욕까지 나왔으면 할 말은 다 나왔다.
준철은 홍진영을 더욱 적극 말리며 취조실에서 퇴장시켰다.
눈을 돌리니 이민섭은 완전 넋이 나가 있었다. 하지만 동업자에게 멱살을 잡힌 충격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피해가 자기 부모에게까지 미칠 수 있다 생각하니 정신이 좀 든 거겠지.
한참 생각하던 놈이 갑자기 몸을 낮추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과장님…… 저…… 형량이 어떻게 되나요? 아니, 저…… 진짜 20년 썩는 건가요? 좀만 봐주실 수 없나요?”
드디어 대화할 준비가 됐다. 준철은 종이와 펜을 내밀며 말했다.
“그건 진술 내용 보고.”
***
“그 새끼는 미친놈이에요. 나도 피해자예요.”
홍진영은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 것인지 계속 씩씩거리고 있었다.
정상참작을 약속받았는데, 놈이 야반도주하며 졸지에 구속까지 당하지 않았나. 물론 가입자들이 이미 이성을 잃은 터이니, 바깥보다 구치소가 더 안전했을 것이다.
“처음 했던 약속은 유효합니다. 본인에겐 큰 화가 미치지 않을 거예요. 참작해서 집유 나올 겁니다.”
“그럼 저 구속은…….”
“그건 죗값이다 생각하고 좀 감수하세요.”
“아니…… 이건 약속과 다르잖아요. 어차피 집유 때리실 거라면 구속도 그냥 풀어 주시죠.”
준철이 경멸에 찬 눈빛으로 놈을 훑었다.
“트래픽을 조작한 게 무죄 같습니까? 가입자 수가 많아 보이게끔 실시간 접속자 수를 부풀린 건 무슨 처벌을 받는지 아세요?”
“그, 그건…….”
“너무 억울해하지 마세요. 당한 놈이 바보지, 본인도 잘한 거 없어요.”
“……예?”
“몰랐어요, 동업자가 하는 짓이 범죄인 거? 거기에 가담한 건 진영 씨예요. 더 이상의 배려는 없습니다.”
역시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지랄맞다. 은근히 협박조로 말하자 놈의 입이 다물렸다.
준철은 홍진영의 풀 죽은 모습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나쁜 일은 함께하다 동업자에겐 배신당하는 시나리오……. 그에겐 너무나 익숙한 장면 아닌가.
“과장님!”
나쁜 생각을 떨쳐 내려 머리를 휘저을 때, 배 팀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진짜 과장님은 대단하십니다! 이민섭이가 다 불었어요! 돈은 해외 계좌 세 곳에 묻어놨는데 다행히 20억 모두 안전합니다.”
“고생했다. 그럼 액수도 모두 맞는 거지?”
“네.”
“그거 빨리 회사 돈으로 귀속시키고 환불 회원 구제비로 써. 그리고 이민섭이가 홍진영 몰래 유령 법인 세워서 꿍쳐 놓은 돈도 많단다. 지 부모 이름으로 했다니까 그것도 뺏을 수
있으면 뺏어 봐.”
“안 그래도 지금 검찰에서 조사 들어가고 있답니다. 우리는 딱히 할 게 없어요, 흐흐.”
배 팀장의 얼굴은 더없이 밝았다.
“좋네. 그럼 오늘은 일찍 퇴근할까?”
“넵. 과장님 식사하고 사우나나 가시죠. 저것들 때문에 오늘은 새벽부터 아주 난리였잖아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럴까?”
다사다난했지만 그래도 한 사건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한 날이다. 골치 아픈 서류 정리들은 내일로 미뤄 둬도 되겠지.
그렇게 서울지검을 나오려 할 때, 갑자기 준철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데스크 중앙에서 나오고 있던 뉴스 속보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긴급 속보입니다. 한명그룹 최영호 회장이 오늘 새벽 4시경 별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