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67
267화
부고(訃告)
한명그룹은 6.25때 한명상회로 시작한 회사였다.
당시 부산으로 피란 갔던 최영호 회장은 난민들을 상대로 각종 생필품과 일자리를 알선하며 전란의 위기를 넘겼다.
사실 그에게 위기는 기회였다.
피란지에 세운 작은 구멍가게가 어느새 구호 물품 대행업체로 성장했고, 미군의 공사 사업도 수주받게 되었다. 이때 세운 첫 계열사 한명토건이 현재 한명그룹의 지주회사인
한명건설이었다.
1.4후퇴 이후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그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끝나면 다음은 재건 사업.
이에 따라 작은 돈 벌어 주던 한명상회를 과감하게 정리했으며, 매각 대금 모두 건설에 재투자해 지금의 한명건설을 키웠다.
결과적으로 그의 결정은 지독히 옳았다.
초고속 경제성장을 등에 업고 한명건설은 급부상했으며, 금융, 보험, 유통 등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대제국이 되었다. 한국은 한명 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란만장했던 최영호 회장이 92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은 지병악화로 지난 수년간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요.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인 건 장남 최영석 부회장의 일감 몰아주기 의혹으로, 당시 물밑에서 삼부자 동반 은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따라 최영석 부회장 등 삼남 모두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고인의 죽음 이후 복귀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사실 고인이 작고하기 전까지 지분 정리를 마치지 않아, 승계 쟁탈전이 불가피할 전망입니다.
난세에도 돈을 벌었던 영웅……의 가는 길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언론은 그가 걸어온 발자취보다 향후 승계 전쟁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삼 형제 모두 경영 실적이 신통치 않았고, 해마다 비자금 논란에 휩싸였으며, 고인이 후계자도 지정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벌써 전문 경영인설이
나돌았다.
불세출의 위인도 자식 농사는 어쩔 수 없는 모양.
그렇게 장례 절차가 결정됐을 때, 최영석 부회장이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인의 유지에 따라 가족장으로 진행하겠다고 발표하는 자리였지만, 모인 기자들이나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이나 장례식 따윈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그룹 향방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쇼. 계열사 분리는 합의됐습니까?
-현재 부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지분 상태가 위태로운 걸로 압니다. 한명건설은 누가 맡게 되는지요?
최 회장의 장례식은 좌천됐던 세 아들이 벼르고 있던 날이기도 하다. 향후 그룹 지배권을 두고 각 형제가 싸우는 건 자명한 일이다.
“죄송하지만 현재는 그런 얘길 나눌 단계가 아닌 것 같습니다.”
-투자자들의 우려가 큽니다. 최소한의 청사진은 말씀해 주셔야죠.
-현재 각 형제들이 맡고 있는 계열사가 테마주로 분류되어 폭등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시장 안정을 위해서라도 한 말씀해 주십쇼.
무례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고인의 죽음과 함께 한명그룹 관련주는 투기판이 되어 버렸고, 금감원이 부랴부랴 투자 주의보까지 내렸다.
이는 생전에 후계자 지목과 지분 정리를 끝내지 않은 고인의 책임도 없지 않다.
-개인이 아니라 법인의 대표로서 따로 남기신 유언 없습니까.
기자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최영석을 바라봤다. 법인의 대표라는 점을 강조했으니 대답을 마냥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영석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평생 불효만 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가시는 길 만큼은 편안히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당분간 경영과 관련된 질문은 삼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임 실장님, 영감님도 이미 가신 마당에 서로 점잔 뺄 거 있습니까. 정말 아버지가 지분 관련한 얘기 남기신 거 없어요? 아니면 해외에 숨겨 둔 계좌라도?”
못다 한 불효를 다 하겠단 말과 달리, 최영석은 이미 머릿속에 경영권 생각밖에 없었다.
고인의 오랜 친구이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임석호 실장은 회장님의 빈자리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아직 발인도 진행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돈 얘기다. 오행산에 봉인된 손오공이 막 탈출한 것처럼.
아들이라는 놈 얼굴에서 애도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왜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분노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없습니다. 남기신 재산은 이게 전부입니다.”
“내 참 영감님 심술하고는. 하늘에서도 아들들 고생하는 꼴이 구경하고 싶으셨나.”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버지 돌아가시자마자 국세청장한테 연락 왔습니다. 지분 이동 어떻게 할 거냐 물었는데, 실상은 감시하고 있단 소리였수.”
회장님의 빈자리가 확실히 크긴 크다. 살아 계실 적엔 잘 좀 부탁드린다고 알랑방귀 뀌던 놈이 슬쩍 말까지 편하게 한다. 이제 곧 자신이 이 그룹의 주인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굳어진 임 실장의 표정에 아랑곳 않고, 최영석은 아버지의 비밀 자료를 휘적거렸다.
“아이고- 내 이럴 줄 알았다. 아버지한테 왜 돈이 없나 했더니 무슨 장학재단을 세웠구먼. 얼굴도 모르는 대학생들한테 장학금 줘서 뭐 해. 머리 크면 다 재벌들 나쁜 놈이라고
떠들고 다닐 텐데.”
“부회장님.”
“그냥 답답해서 해 본 소립니다. 그렇게 사회 환원 많이 해 봤자 남는 게 뭐냐고요. 나 지금 이 상속세 감당하려면 신용 대출에 캐피탈까지 끌어다 써야 할 판입니다.”
상속세 핑계를 대긴 했지만 최영석이 짜증 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장남으로서 후계자로 지목되지 못했다는 수치심, 그리고 이에 대한 원망.
최영석은 건설 부회장을 맡게 되며 자신을 그룹 후계자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끝내 대답 없이 죽었다. 덕분에 아버지가 들고 있던 건설주는 삼 형제가 공평하게 나눠 가지게
되었다.
이는 곧 승계 전쟁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뭐야, 큰형. 형이 왜 아버지 집무실에 와 있어?”
“이 서류는 뭐야, 형 아버지 자료 손댔어?”
말없이 짜증을 달래고 있을 때, 이 짜증을 더욱 불 지펴 줄 두 동생들이 등장했다.
“꼴값한다. 언론에다 대곤 못다 한 효도 다 하겠다며.”
“그런 사람이 아버지 장례도 안 들어갔는데 집무실에 와 있어? 왜? 미리미리 재산 한 푼이라도 더 빼놓으려 하셨나.”
최영석은 동생들을 시큰둥하게 바라봤다.
“그러는 네들은 왜 왔냐. 그것도 사이좋게 손잡고.”
“같은 취급하지 마. 임 실장님 어디 계시나 묻고 찾아온 거니까.”
“임 실장님은 왜 찾았는데?”
“그건…….”
두 형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 사람의 목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뭘 잘했다고 우릴 추궁이야.”
“꼴값 떨지 마. 내가 먼저 왔다 뿐 네들이나 나나 똑같아. 아버지 숨은 비자금 찾으러 왔지?”
최영석은 서류를 허공에 던졌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백날 찾아봐라. 영감님 개털이더라.”
“뭐?”
“비영리 재단 여러 개 세워서 애새끼들 장학금이나 퍼 주셨다고. 쯧쯧- 누가 소학교 출신 아니랄까 봐. 그렇게 배우고 싶으면 검정고시를 배우지, 원.”
두 형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흩뿌려진 자료를 들었다.
하지만 형의 말대로 숨은 재산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 이건 말이 안 돼.”
“큰형, 혹시 우리 몰래 작당한 거 아니야? 우리한테 허튼 수작 부리는 거면 그만둬.”
여전히 번지수를 못 찾는 동생들이 한심스러웠다.
“기석아. 내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냐. 수틀리면 제 형제도 공정위에 팔아먹는 놈한테? 덕분에 예금처럼 부어 온 내 해외 비자금 싹 다 털렸다.”
“그, 그건…….”
“됐다. 어차피 지난 일 더 하려고 온 거 아니니까. 대신 내가 형으로서 두 동생들에게 부탁 좀 하자.”
최영석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안팎에서 우릴 보는 눈이 곱지 않아. 아버지 돌아가시자마자 벌써 국세청장과 검찰 금조부에서 연락이 왔다. 주시하고 있으니까 몸조심하란 얘기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계열사 분리 조용하게 진행하자. 어차피 아버지가 대충 어떻게 선 그었는지 알잖아. 서로 거 탐내지만 않으면 우리도 안전하다.”
나머지 두 형제들 모두 바라는 바다. 하지만 여기엔 어폐가 있었다.
“그래? 그럼 한명그룹 주력 계열사인 건설은 누가 맡고?”
“다 필요 없고 건설이야말로 핵심이지. 각 계열사 지분을 가장 많이 들고 있는 게 건설인데.”
역시나 셈 하나는 확실한 동생들이다.
“그래, 그게 중요하지. 근데 냉정하게 생각하자. 가장 적격인 놈이 맡아야지 않겠냐.”
“무슨 뜻이야.”
“나 건설 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실적 나쁘지 않았어. 믿고 맡겨. 건설이 쥐고 있는 네들 계열사 주식은 내가 다 돌려줄게.”
최기석은 같잖다는 듯 크게 웃었다.
“푸하하. 돌려줘? 누가 들으면 임금님이 하사품 내리는 줄 알겠네.”
“기석아.”
“그럴 거면 나한테 맡겨. 형이 가진 계열사 지분 내가 정리해서 돌려줄게. 그리고 형이 건설 실적 좋은 건 회사가 성장해서가 아니라 하청 쥐어짜서 영업이익만 높인 거잖아. 그런
경영은 나도 잘해.”
“나도 작은 형 말에 동의. 그냥 법대로 가. 아버지가 지분 정리 안 했으니 건설 주식은 공평하게 삼 등분으로 나눠.”
“만약 건설 부문을 독식하고 싶으면 형이 다른 계열사 몇 개를 더 줘야지. 그게 계산에 맞아.”
주식 한 장, 아니 10원 한 장도 양보하지 않겠단 동생들의 뜻을 확인했다.
“기어코 끝장을 봐야 성미가 풀리는구나. 그래, 그럼 한번 끝까지 가 보자.”
최영석은 나가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그래도 보는 눈이 있는데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피 터지게 싸우는 꼴은 싫지? 사흘만, 딱 사흘만 효도하자.”
살아 계실 때 제대로 된 효도 한번 한 적 없는 이들이다.
두 동생들도 이 말만큼은 형의 말에 동의했다.
***
[역사의 산증인, 불굴의 기업가] [최영호 정신, 21세기 한국]비록 자식 농사엔 실패했지만 최영호 회장은 사회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의 마지막 길엔 각계 인사들이 자리에 참석해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 주가 폭등락 기사만 늘어놓던
언론사들도 장례식 때만큼은 애도를 표했다.
이렇듯 온 국민이 진심으로 애도했지만, 정작 상주(喪主)들은 정계 거물들에게 눈도장 찍느라 바빴다.
막대한 상속세와 추후 지배 구조.
모두 정관계 인사들의 협조 없인 이뤄질 수 없는 일들이다. 이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고위직 관료들에게 인사했고, 자신이 한명그룹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최영석은 다행히도 그룹의 장남이었기에 더 많은 정관계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는 예기치 못한 불청객도 있었다.
“아니,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