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68
268화
부고(訃告) (2)
“자넨 이름이 뭔가?”
“예, 영업자원부 김성균 대리입니다.”
“이번 비용 절감 프로젝트를 자네가 제안했다고? 불필요한 하청사도 다 잡아내고.”
“아닙니다. 차명석 사장이 일선에서 진두지휘한 프로젝트입니다. 전 옆에서 서류 복사만 부지런히 했습니다.”
“하하. 차명석이도 그러더만, 다 자기가 했대. 근데 내가 아는 차명석이는 그럴 만한 그릇이 아니야.”
말단 사원이 그룹 회장님과 독대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될까.
내 경우엔 그런 기적이 입사 5년 차에 일어났다.
당시 한명중공업에 빨대를 꽂은 하청들이 적발됐고, 이를 정리해 무려 50억대 절감 효과를 얻게 된 것이다. 그때 그 하청들은 갑질이 아닌, 정말 문제 있는 회사들이었다. 도대체 왜
상부에서 이걸 지금까지 몰랐나 싶을 정도로.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기에, 내 비용 절감안은 번번이 묵살 당했다. 하지만 집요한 보고서 제출에 결국 상부를 설득했고 결과는 내 예상대로 불필요한 하청사로 판명 났다.
“몇 가지 좀 물어보고 싶은데, 괜찮나?”
“물론입니다.”
처음 만난 최영호 회장은 생각보다 인자한 인상이었으며, 아랫사람에게 무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그 뒤 한참이나 무언가를 묻더니 혀를 찼다.
“에잉- 쯧쯧. 물불 안 가리는 새내기라 해서 기대했더니 영 싱겁구먼. 아니, 처세가 좋은 건가.”
“……예?”
“뭐만 하면 다 차 사장이 잘했다, 김 부장이 잘했다, 이 과장이 잘했다……. 난 오늘 그런 시시껄렁한 공치사나 듣자고 부른 게 아니야. 차명석이는 자네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주어진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는데, 그 외적인 일은 전혀 무관심하지.”
인자한 인상이 급격히 돌변했다. 거기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내린 차 사장에 대한 평가와 회장님의 평가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그치도 원래 그러진 않았어. 나랑 고속도로 뚫을 땐 잠도 안 자고 일했거든. 늙은 게지. 더 이상 몸이 따라 주지 않고, 편한 일만 찾아. 근데 안타까운 건 그놈의 욕심은 안
늙어.”
“…….”
“젊은 사람들은 좀 어찌 생각하나 하고 불렀더니, 영 숙맥이구먼.”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만족스런 대답을 못 드려서…….”
“아니, 자네는 내가 원하는 답이 뭔지 알면서도 일부러 대답을 안 하는 것 같아. 그만하세. 자네의 역량이 그 정도란 뜻일 테니.”
아직도 최 회장의 한숨을 잊을 수 없다. 달아올랐던 흥미가 팍 식어 버리는 얼굴. 그 얼굴에서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이만 나가 봐. 인사팀에 내 직접 언질을 줬다. 상여는 섭섭지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나가려던 찰나.
발걸음을 멈춘 내가 슬쩍 뒤로 돌았다.
그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회장님 저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대신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한 귀로 듣고 흘려 주셨음 합니다.”
“그건 들어 보고 결정하지. 뭐지?”
“저도 이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왜 상부가 이걸 오랫동안 방관했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이는 비용 절감도 아니라, 그간 과대 계산된 비용을 이제 정상화하는 거죠. 저희 한명중공업 마진
5%. 타사 대비 현저히 낮은 마진입니다.”
“그럼 왜 차 사장은 이걸 오랫동안 방관하고 있었을까? 임원들은 왜 말단 대리도 알 만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고.”
놀라운 일이었다.
나에게 흥미가 떨어져 있던 최 회장이 껄껄 웃었다. 뭔가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준 걸까?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사업 선정은 전부 차명석 사장이 맡고 있는 부분이라…….”
“그냥 말해. 자네도 차 사장 의심스럽지? 누가 봐도 불필요한 외주 사업인데 지금까지 문제 삼지 않았잖아? 혹시 차 사장이 친인척 명의로 세운 비자금 창구 아닐까, 이런 생각 들지
않았어?”
회장님의 질문이 내 허를 찔렀다.
사실 그랬다. 너무나 당연한 문제를 상부에 보고했는데 묵살되었고, 그것이 꽤 성공적인 비용 절감으로 이어졌는데 오히려 눈칫밥만 받게 되었다.
하지만 고민이 든다. 이걸 과연 밀고하는 게 옳은 걸까.
“대답해 봐. 아닌가?”
여러 고민이 들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내 임원들을 고발하는 일이었기에.
하지만 기대도 들었다. 인생에 이런 기회가 또 올 수 있을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현재 정리된 불필요한 하청사들 보면 간판만 빌려주고 막대한 외주 사업비를 챙겨 갔습니다. 임원들이 왜 이런 일을 묵인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사태 해결
과정 또한 그렇습니다. 평소 비용 절감안 가져가면 쌍수 들고 환영하는 임원들이, 어쩐지 이 사건에서 만큼은 시큰둥했습니다.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아직도 저를 미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속사포처럼 말이 끝났을 때, 갑자기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최 회장 입가엔 미소가 떠올랐지만 아까와 같은 호탕한 웃음은 더 이상 없었다.
“고마우이. 이 늙은이 가려운 분 긁어 줘서.”
“예?”
“차명석이가 최근에 수상해졌거든. 감사팀에서 여러 번 보고가 올라왔는데 내가 묵살했어. 그놈을 미더워서가 아니라, 그놈을 사장 자리에 앉힌 내 안목의 실패를 인정할 수 없었던
거야.”
“…….”
“그래도 창업 멤버라고, 회삿돈 적당히 용돈 챙겨가는 건 묵인했는데 결국 이 사달이 나는군.”
“혹시 제가 한 말을…….”
“비밀? 그런 게 존재하겠나? 하하. 자네랑 나랑 독대했다는 건 이제 회사 경리까지 다 알걸세. 그리고 난 오늘부로 중공업에 감사과 투입할 거야. 기든 아니든 자네는 어쩔 수 없이
상사 팔아먹은 놈이 될 걸세.”
참 이상한 일이었다.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단 얘기였는데, 이상하리만치 나는 담담했다.
“그렇군요.”
“그렇군요? 그게 끝인가?”
“이미 낙인 찍혔습니다. 제 역량 밖이죠. 그래도 회장님이 만족할 만한 대답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그렇게 다시 인사를 올리고 나갈 때, 최 회장의 음성이 들렸다.
“자네. 혹시 물산 계열사로 갈 생각 없나?”
물산? 한명그룹에 물산 계열사가 있던가?
“아직은 없지만 곧 인수할 거거든. 내 장남인 최 이사가 물산 사장으로 영전될 거야. 어때? 한명건설 대리면, 물산 부장 정도로 생각하는데.”
가라는 뜻이다.
“근데 제가 사실 물산은 몰라서…….”
“그까짓 거 몰라도 돼. 자넨 감사과 부장으로 영전할 테니까. 지금처럼 누가 회사 돈 뒤로 처먹고 있는지만 감시하면 돼.”
“…….”
“이건 제안이자 부탁일세. 자네 인사 평가서를 쭉 지켜봤는데 마음에 들더군. 만약 일 잘하면 그땐 한명건설 부장으로 다시 부르지. 한번 일해 보겠나?”
그것이 내 인생의 두 번째 기회였고, 나는 그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나는 회장님의 약속과 달리 한명건설 부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것을 인연으로 부회장의 신임을 단단히 얻었고 나는 그를 따라 한명그룹 전 계열사를 돌며 몸종이 되었다.
내가 다시 한명건설로 돌아왔을 땐…….
“축하드립니다. 김성균 이사님.”
한명건설의 핵심 주축인 임원이 되어 있었다.
***
몇 번이나 고민했다.
내가 이 자리에 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하지만 생각을 한쪽으로 정리했다. 어찌 됐건 내게는 인생의 기회를 준 사람 아닌가. 내 나름대로라도 그와의 인연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예를 담아 영전 사진 앞에 고개를 숙였고, 국화를 얹었다. 하지만 최영석과 그 형제들은 살기 가득한 얼굴로 날 노려 볼 뿐이었다.
보는 눈이 없었다면 뺨이라도 쳤을 기세였다.
“이 팀장님……. 아니, 과장님으로 승진했다죠? 아무튼 어려운 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따로 뵐 수 있을까요.”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일까?
최영석이 한껏 예를 차리며 나를 안내했다.
“간댕이가 부은 건가, 아님 누구 염장 지르러 왔나.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와?”
하지만 보는 눈이 사라지자 이내 그 본성을 드러냈다.
“아버지 장례식엔 왜 왔어? 우리 영감님은 네놈 때문에 와병 중에도 맘 고생하셨어. 살아 있을 때도 괴롭히더니. 이젠 죽어서도 괴롭혀?”
“가장 많이 괴롭힌 건 본인 아니에요? 회장님 일평생 걱정이 자식 걱정이었는데.”
“뭐. 뭐야?”
“그만합시다. 상주 자극하려고 조문 온 거 아니니까. 회장님과 내 개인적인 친분 정리하려 왔어요.”
최영석은 기가 찬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인연? 하하. 고작해 봐야 행시 붙은 5급 나부랭이가 재벌 총수하고 무슨 인연?”
“쯧쯧……. 그 나이면 체신머리 챙길 때도 될 텐데.”
“뭐야?”
“이제 곧 형제들하고 박 터지게 싸울 거 아니요. 앞으로 카메라 많이 받을 겁니다. 이젠 자나 깨나 말조심하쇼.”
지금 한국에서 가장 큰 관심거리는 장례식 이후의 한명그룹 주가다.
벌써부터 각 부회장들에 따라 테마주가 요동치고 있었다.
“오호라. 지분 싸움 날 것 같으니까 미리 와서 선수 친 거야?”
생각보다 표정이 밝았다.
아무래도 자신과 엮인 테마주 반등에 자신감이 한껏 고무 된 모양이었다. 삼 형제 중에서 가장 월등한 반등을 보이고 있었으니.
이쯤에서 놈의 속을 한번 긁었다.
“원망되시죠? 영감님이 지분 정리하고 가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데.”
하지만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안 그래도 고민이야. 이 미친 동생들이 건설 회장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잖아. 이럴 때 좋은 책사가 옆에서 조언을 해 줘야 하는데……. 내 주변엔 그런 브레인이 없어.”
여유까지 보이며 웃는다. 이미 김성균이란 존재는 머릿속에서 잊힌 지 오래겠지?
“해서 말인데 어때? 우리 이 과장도 생각 있으면 들어 와. 앞으로 승계 작업하려면 크고 작은 합병 많이 해야 할 텐데, 나한텐 브레인이 필요해.”
한명그룹은 법조계 전관보다 공정위 전관들에게 돈을 더 쓰는 족속들이다.
특히나 기업 합병 심사를 준비할 땐 공정위 전관들을 거의 대통령처럼 모신다.
“이래 봬도 또 내 경영 철학이 인재 경영이야. 사람 귀한 줄은 알지. 우리 이 과장 정도면 내가 백지수표 줄 수 있는데.”
“몸값이 얼마나 되는데요?”
그럼 그렇지 돈 앞에 장사 없다. 고고한 척하지만 이놈도 별수 없는 공무원이다.
슬쩍 던져 본 떡밥에 묵직한 월척이 걸리자 얼굴이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