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69
269화
부고(訃告) (3)
“말 그대로 백지수표. 계약금 10억은 선불로 줄 거야. 어때? 국내 최고 기업의 최연소 임원. 꽉 막힌 공무원 생활보다 더 근사하지 않겠어?”
입만 열면 거짓말만 튀어나오는 놈이지만 이 말만큼은 사실이다.
한명그룹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외 이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몸값도 타기업보다 높다. 여느 기업이 그렇듯 이 사외이사들은 숨만 쉬는 게 일이다. 아니, 숨만 쉬어 주는 게 일이다.
이들의 진짜 역할은 그룹에서 지저분한 일을 처리할 때 문제 삼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룹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관료들을 사활 걸고 포섭해 버린다.
“한명그룹 많이 죽었네. 고작 과장급한테 백지수표라니?”
“그만큼 내가 자네 생각한다는 거야. 우리 이 과장은 국장급으로 모셔드려야지.”
대화가 잘 풀리는 것 같자 최영석의 호칭도 어느새 편해졌다.
하긴 웬만한 국장급보다 더 크게 괴롭히긴 했지. 고작 사무관 하나가 총수 일가 세 명을 좌천까지 시켰으니.
게다가 이제는 권한도 더 많아진 서기관이다.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 내고 싶을 것이다.
“참고로 내 백지수표는 딱 여기까지만 유효해. 자네가 국장, 위원장 이상으로 가면 나도 관심 없어.”
“그건 무슨 셈법입니까? 자리가 높아지면 몸값도 더 높게 받아야지?”
“내 경험상 너 같은 놈이 고위직 가는 건 못 봤거든. 꽉 막힌 공직 사회가 너처럼 튀는 놈을 언제까지 받아 줄까?”
아버지의 죽음 이후 한층 더 성숙해진 걸까. 이젠 제법 고개가 끄덕여지는 소리도 할 줄 안다.
“그러니까 내가 주는 동아줄 받아.”
“나한테 그런 파격적인 제안을 하는 이유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자넬 보면 자꾸 기시감이 느껴져. 뭐랄까……. 내 밑에서 컸더라면 진짜 크게 썼을 것 같달까.”
“헛소리 말고 내 역할이 뭔데. 당신이 하는 일에 딴지만 안 걸어 주면 돼?”
“흐흐. 성질머리 만큼이나 입도 고약하군. 더 맘에 들어.”
기분 나쁜 소릴 내뱉어도 놈의 얼굴엔 웃음이 만연했다. 무섭도록 소름 끼쳤다.
“사외 이사는 숨만 쉬어 주는 게 일이지. 근데 젊은 나이잖아? 하고 싶은 모든 걸 해. 우리 감사과로 들어와서 군기반장 해도 되고. 기업 인수합병 때 해결사를 해도 되고.”
“듣고 보니 흥미가 좀 생기네. 내 체질에 맞겠어.”
여지를 남기자 최영석의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슬쩍 긁어 봤는데 너무나 큰 월척이 걸리지 않았나. 어쩌면 이놈이 아버지의 빈소를 찾은 것도, 이런 목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만나 본 적도 없는
아버지와의 인연 팔이를 하지 않았겠지.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얼마면 내가 이 과장님을 모실 수 있을까?”
최영석이 비릿한 웃음을 흘릴 때, 준철이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하하. 역시 공무원이라서 담이 작은가. 어디 5억 가지고 아파트나 한 채 살 수 있겠어?”
준철은 고개를 저었다.
“15억이라. 이제 겨우 서울 아파트 정도군. 좋아, 그 정도면 내가 이 과장님 사지.”
“…….”
“25억? ……좀 센데?”
“…….”
“35억……?”
“앞자리가 틀렸어.”
최영석은 책상을 내려쳤다.
“하여간 공무원 놈들은 돈 개념이 없어. 아무리 내가 아쉬운 처지긴 해도 고작 과장 놈한테 50억이나 쓸 것 같아?!”
“500억이었는데.”
“뭐?”
“보아하니 형제들끼리 치고받으면서 온갖 똥물이 다 나오겠구먼. 그거 다 눈감아 달라고 나 포섭하는 거 아니야?”
“…….”
“그 사건들 다 합하면 최소 과징금 500억은 넘을 거 아니야. 그럼 이 돈도 싼 거잖아. 싫으면 됐고. 정직하게 그 돈 다 과징금으로 냅시다.”
“잠깐!”
그렇게 자리를 벗어나려 할 때, 노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에…… 내가 그 500억 챙겨 주면, 나한테 그 이상의 보답해 줄 수 있나?”
흔들리는 목소리와 비장한 얼굴은 그가 진심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기분이 참 오묘했다. 버림받은 놈한테 다시 쓰임을 제안 받다니. 그것도 웬만한 놈들은 꿈도 못 꿀 금액으로.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더러운 일을 퍽 많이 했나 보군.”
“묻는 말에나 대답해. 나한테 그 이상의 보답해 줄 수 있나.”
“이미 흥미 식었어. 난 부랄 작은 놈 밑에선 일 못 해. 그리고 의리 없는 놈하곤 일 안 해.”
“……의리?”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 없다.
어차피 이해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일 테고.
“최영석 씨, 내가 그래도 옛정이 있어서 한마디 합니다. 조세 피난처에 세운 유령 회사 세 곳,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상속세랑 우호 지분 확보하려면 돈 많이
들겠지만, 그건 급하다고 바닷물 마시는 격이야. 그 돈 움직이면 오히려 지금까지 회삿돈 주기적으로 횡령한 게 걸릴걸.”
최영석은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달아올랐다. 하지만 준철의 입에서 유력 정치인 몇몇이 거론되자 이내 사색이 됐다.
“그 사람들도 동아줄로 사용하지 마. 이미 현직에 있을 때 한명그룹 비리 못 본 척하며 떡값 이상은 했어.”
“너, 너 대체…….”
“김형석 총장, 이현민 대법관, 송석호 고검장 같은 사람들한테도 연락하지 마. 은퇴한 지 수년이 지났는데 법조계에 끗발이 먹히겠어?”
“너 대체 뭐야!”
고함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거론된 이름들 모두 이번 상속 전쟁을 위해 키워 온 최정예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내부자, 아니 자신의 최측근 사람들도 모르는 얘기다.
“누구야, 기석이야? 그 새끼가 이번에도 나 찔렀어? 아니, 만석이야? 그 새끼가 나 밀고했어?”
“출처 묻지 말고 그냥 내 얘기 새겨들어. 당신 상속 시나리오는 우리가 이미 꿰고 있어. 그 방법은 안 하는 게 좋을걸.”
“입 닥쳐! 어떻게 알았어! 동생들? 아니지 이건 내 최측근들이겠지. 혹시 전직 임원들이 나 팔았나? 누구지?”
준철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김성균.”
길길이 날뛰던 놈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준철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놈의 반응을 보니 그 죽음에 대한 의문이 모두 해결되었다. 역시나 배후는 부회장이었구나. 누구보다 맹렬하게 충성했던…….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눈으로 확인하는 건 또 다른 기분이다.
“오늘은 정말 이런 말 하려고 온 게 아닌데…….”
“…….”
“모쪼록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혼자 남게 된 최영석은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나 하찮아서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더 이상 필요 없어 헌신짝처럼 내버린 오랜 친구의 이름이었다.
***
최영호 회장의 운구 행렬은 한명건설의 사옥을 지나 수원 선산까지 이어졌다. 운구 행렬엔 전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애도를 표했고, 고인의 생전 유지를 기렸다. 초고도 경제 성장의
주역이자 대한민국 전 곳에서 활약했던 거장이 이젠 흙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가장 슬퍼해야 할 세 아들들은 복잡한 얼굴로 안장식을 지켰다.
아버지의 죽음의 그룹의 세대교체를 의미하며, 이 왕좌를 차지할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부회장님, 너무 염려 마십쇼. 놈이 뭘 알고 한 말 같지는 않습니다. 재벌들 상속세 낼 때 비자금으로 내는 거 모를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법조계, 국회의원 이름도 이미 다
지저분한 추문으로 입방아에 오른 놈들뿐입니다.”
“그럼 김성균은? 그 이름이 어떻게 거기서 나오지?”
“본부장 죽음과 관련해서는 그때도 뒷말이 많았습니다. 괜히 부회장님 흔들어 보려고 찔러 본 거겠죠.”
김 비서의 말에 조금 수긍이 가긴 했지만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김 비서, 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전혀 아닙니다. 본부장 죽음과 관련한 일은 저와 부회장님 말곤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혹시 일 처리한 놈들 중에서…….”
“그놈들은 그 차에 누가 타는지도 모릅니다. 절대로 외부에 누설되지 않았습니다.”
심란해하는 부회장을 보며 김 비서가 서둘러 주제를 돌렸다.
“그리고 본부장이 죽은 지가 몇 년인데요. 이건 필시 최근에 일했던 임직원들 소행입니다.”
“옛말 그른 거 하나 없군. 머리 검은 것들은 거두지 말라더니. 혹시 의심 가는 인물 있나?”
“최기석 상무의 소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석이? 둘째? 그놈은 내 최측근 아니잖아. 내 상속 시나리오 절대 몰라.”
“다리를 두 번 거쳤다는 겁니다. 최 상무가 우리 쪽 사람들에 접근했고, 그 비밀을 공정위에 찌른 것 같습니다.”
설득력 있는 얘기였다.
아버지가 후계자를 명확하게 정하지 않으며, 임원들도 한동안은 줄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중엔 이쪽 사람이었다가 저쪽 사람이 된 경우도 있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사실 우리 상속 시나리오는 이미 많이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고위 관료, 정치인들 만나는 건 다 임원들이 담당했으니. 반대로 저희도 최 상무 상속 시나리오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가장 걸리적거리는 건 둘째다.
금융 부분을 맡고 있는 놈은 경영 실적도 나쁘지 않았고, 업계 특성상 재계에 발이 넓은 편이었다. 이번 테마주 사태 때 급등을 보인 걸 보면 주주들의 기대도 큰 모양이다.
“솔직히 지금은 위로 올라가기보단 밑으로 끌어내리는 데 더 주력해야 합니다.”
“지금 나더러 기석이를 공격하라는 거야?”
“마뜩지 않으시겠지만 과감할 땐 과감해야죠.”
최영석은 손사래 쳤다.
“아서. 지금 상황에서 그놈 찌르면 누가 봐도 내 소행이야.”
“먼저 시작한 건 그쪽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최 상무가 누굴 팔아먹었는지.”
“아무리 그래도…….”
“아닌 말로 우린 지금 속 편합니다. 이미 지난 일감 몰아주기 사태 때 샤워 한번 했고, 대중의 머릿속에서 많이 잊혔어요. 그럼 최 상무도 샤워 한번 해야죠.”
최영석은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비자금 사태 때 자신을 팔아먹은 동생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김 비서는 최영석을 더욱 부추겼다.
“얘길 들어 보니 최 상무는 벌써 사장 취임을 준비한답니다.”
“그거야 원래 예정된 일이었잖아. 나랑 그때 동반 은퇴 당하면서 무산된 거고.”
“제 눈엔 출사표로 보입니다. 주변 얘기 들어 보면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더군요.”
위험한 놈이다.
싹을 잘라 내지 않으면 필시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솔직히 지금 최 상무의 인기가 높은 것도 똥물 한 방울 튀기지 않았으니 저러는 겁니다. 민감한 사건 몇 개 터트리면, 최 상무의 추악한 이면이 다 드러날 겁니다.”
최영석은 팔짱을 끼더니 나직이 되뇌었다.
“그래. 당한 건 갚아 줘야겠지?”
“네. 당한만큼만이라도요.”
“하지만 나 혼자 움직이기엔 부담이 너무 커.”
“그럼 제가…….”
“아니, 만석이까지 끌어들여 보고.”
“최 이사 말씀이십니까?”
최만석은 한명그룹의 삼남.
어렸을 때부터 각종 추문에 시달렸고, 경영 실적도 시원치 않아 후계 구도에서 가장 멀다고 평가를 받는 동생이었다.
“나 혼자 움직이면 무조건 독박이야.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는데 당연히 조력자가 많아야지.”
막내 동생은 이미 경영권에서 멀었지만 놈에겐 아주 중요한 무기가 있다. 바로 지분.
셋째의 지분만 우호 지분으로 끌어들이면 둘째를 몰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김 비서, 일단 만석이랑 약속 잡아 봐. 내가 해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