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7
27화
YK암보험 (1)
“정 부장. 섬유종증 치료비 지원? 어제 올린 그거 뭐야?”
“아, 예. 이사장님. 일전에 말씀드린 희귀 질환 안건입니다. 알아보니…… 좀 애매하긴 하지만 저희 보장 내역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퉈 봐야 승산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급 결정 내렸습니다.”
툭-.
“다퉈 봐야 승산이 없다? 그러니 지금 거저 주겠다는 거야?”
“이사장님. 그 말씀이 아니라.”
“가입자들 병원비 다 지원해 줄 거면 보험심사과는 왜 있어?! 특약이었다, 필수치료로 볼 수 없다, 누군 양심이 없어 이 짓거리 해?”
“하지만 지금 금감원에…….”
쾅-!
답답한 놈들.
금감원 무섭다고 보험료를 다 지급하다니.
당연히 줘야 할 돈도 악다구니 써서 막아야 하는 게 보험심사과다. 그렇게 한 번 싸우면 전액 지원할 돈도 부분 지원이 될 수 있다.
“금감원이 뭐?! 우리가 이 보험약관 만들 때 얼마 쓴 줄 알아? 전직 금감원장, 공정위 약관 국장, 판검사, 의대 교수들! 전관들한테 자문료 수십억씩 처발라서 만든 게 이
보험약관이야.”
“…….”
“빠져나갈 구멍 다 만들어 놓고 파는 건데, 왜 네들이 앓는 소리야?!”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회삿돈 좀 아까운 줄 알아! 영업부에서 보험 100만 개 팔아 오면 뭐 해, 100만 명 다 지급해 버리면 파산하는데! 고기 잡아 오면, 네들은 살만 찌워!”
***
“흐억…… 헉. 헉.”
악몽에서 깬 준철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를 만난 이후 늘 같은 꿈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악몽도 꿈도 아니다.
과거 자신이 했던 만행이 꿈속에서 적나라하게 구현됐을 뿐이니까.
“하아…….”
트집 잡아 보험료 지급을 미루는 일.
가입자에게 소송을 걸어 전액 지원을 부분 지원으로 바꾸는 일.
그게 바로 한명보험 심사과가 하던 일이었다. 보험 사기꾼이랑 싸우던 건 한 절반이나 될까? 대부분은 다 가입자들과 보상비 가지고 싸웠다.
‘결국 내 업보네…….’
선잠에서 깬 준철은 힘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부당한 관행을 바꾼다면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까?
지나간 과거가 오늘따라 야속하게 느껴진다.
***
“굿모닝. 매우 좋은 아침.”
황금연휴를 마친 김 반장은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사무실에 입성했다.
맡은 사건마다 구원투수처럼 해결하고, 늘 과장님의 특별 휴가까지 받는다.
신바람 나는 출근길이 바로 이런 것일까?
“오셨습니까, 반장님. 베트남 다녀오셨다면서요?”
“어, 박 조사관. 어떻게 알았어?”
“카톡 프로필로 광고해 놓고선 무슨. 좋으셨어요?”
“그랬나. 크큭. 좋긴 좋더라. 물가 싸고 경치 죽여줘. 와서 하노이 초콜릿 좀 먹어 봐.”
김 반장이 기념품을 풀자 사무실은 왁자지껄해졌다.
하지만 그런 훈훈한 분위기는 얼마 가지 못했다.
“일찍들 오셨네요. 휴가 잘 보내셨어요?”
준철이 서류 폭탄을 들고 등판하자 반원들 얼굴이 굳어 버린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그리 물을 겨를도 없이 준철이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
“반장님. 저희 소비자정책국이 몇 번이죠?”
“예?”
“아, 약관심사과로 가야 돼요. 내선 번호가 몇 번이죠?”
“약관심사과는 106번이긴 합니다만…… 그건 왜요?”
“자료 좀 요구하고 싶어서요.”
준철이 대수롭지 않게 내선 전화를 들자 박 조사관이 허겁지겁 달려와 전화를 잡았다.
“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 오늘 막 업무 복귀했습니다!”
“대체 이 폭탄 자료들은 뭡니까?!”
과장님이 업무 내려 줄 때까지 당분간 휴식기다.
그렇게 믿고 출근했는데 갑자기 업무폭탄이 떨어지니 혼비백산할 것 같았다.
“별거 아닙니다. 들은 얘기가 있는데 뭘 좀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무슨 확인요?”
“유경생명, YK다이렉트 암보험이요. 지금 가입자 몇 사람이 보험료 지급 건 가지고 여기랑 싸우고 있다네요.”
준철이 간략히 상황에 대해 설명하자 몇 사람은 이미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리 들어도 고생을 사서 하겠단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해서 저희 쪽도 약관을 한번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아요.”
“아니 팀장님. 근데 엄밀히 말해 보험은 금감원 업무 아닙니까?”
“금감원 일이기도 하고, 공정위 일이기도 하죠. 약관이 문제라는데.”
“그럼 공문을 보내서 한번 조사해 보라고 하세요. 보통 이럴 땐 선빵 친 쪽이 업무 독박 씁니다.”
“맞아요. 저희가 직권조사하는 게 약관심사과에 실례가 될 수 있어요.”
직권조사.
신고된 혐의가 없어도 그냥 자율적으로 하는 조사를 뜻한다.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듯, 공무원이 제일 싫어하는 일이다.
반원들이 뭘 우려하는지 알았기에 준철도 달래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확인만 하고 주무부처에 잘 보내겠습니다.”
그 말은 왠지 모르게 전혀 믿기지가 않았다.
***
공정위 소비자정책국.
이곳은 몽둥이를 들고 있는 ‘소비자보호원’이다. 분쟁조정 뿐 아니라, 강력한 행정명령도 내릴 수 있는 부서니.
그중에서도 약관심사과는 보험 업계에서 저승사자로 꼽혔다.
말장난 쳐 놓은 약관을 다 따지고, 시정명령을 요구할 수도 있는 부서니까. 보험사에서 갑자기 약관 개정을 발표하면 십중팔구 여기서 깨졌다는 뜻이다.
그런 곳에 입성하니 파블로프의 개처럼 준철의 몸이 움찔거렸다.
김성균 이사장이 얼마나 들락거린 곳인가?
“처음 뵙겠습니다. 이준철 팀장…….”
“종합감시국에서 왔어?”
“아, 예.”
“웬일이야. 자네들이 일을 찾아서 만들고?”
“…….”
“오해는 하지 말고. 빈정거리는 게 아니라 대체 얼마나 심각한 사안이기에 종합팀에서 직행으로 왔나 물어보는 거야.”
약관심사 최기철 과장은 긴장한 준철에게 그리 말했다.
다행히 목소리만 들어선 적의는 없어 보였다.
“예. 약관 하나가 걸리는 게 있는데, YK생명 암보험입니다. 먼저 읽어 보시죠.”
준철이 서류를 건네자 그가 씨익 웃었다.
“나야 보험사들 약관은 다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야. 정확히 어떤 분쟁인데?”
“치료 방법이요. 현재 가입자가 요양병원비를 요구했는데, YK에서 거부했습니다. 요양치료는 그쪽에서 필수치료로 볼 수 없다는군요.”
준철이 순차적으로 설명하자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네 말만 들어선 모르겠네. 이건 우리 소관이 아니라 금감원 같은데?”
“예. 이건 금감원에서 넘어온 자료입니다. 그쪽에선 중징계를 내릴 모양이더군요. 저희 공정위가 ‘조항에 문제가 있다’고 유권해석 내리면 바로 징계 절차 들어갈 것 같습니다.”
유권해석이란 말에 최 과장이 혀를 찼다.
금감원이 징계 때리고 싶은데, 공정위가 편 좀 들어 달란 뜻 아닌가?
하지만 이 유권해석은 함부로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개별 사안에 공정위가 편을 들면 그 분쟁 사례만 개입한 건데, 이 유권해석은 업계 전체에 행정명령을 내리는 거다.
“……어지간하면 지급권고로 끝내는 게 좋을 텐데.”
“이미 수차례 지급권고를 해 왔답니다.”
“뭐? 그럼 YK가 지금까지 금감원 권고를 무시했다는 거야?”
“교묘하게 피해 갔습니다. ‘권고’를 하니 오히려 그걸 가지고 피해자와 협상을 해 버렸더군요. 어차피 권고일 뿐이니까 적당히 이 돈으로 합의하자, 안 그럼 재판 가겠다.”
“시간 끌었다?”
“예. 요양비가 1억이면 거의 2-3천 수준으로 가입자들과 합의를 해 버렸습니다. 다섯 차례 모두.”
“흠…….”
그제야 최 과장이 보험약관을 들었다. 금감원의 권고도 이용해 먹는 악덕 보험사라니.
배짱이 좋은 건지,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의 검토 끝에, 그가 인터폰을 들었다.
“홍 팀장 좀 내 방으로 오라 그래.”
이윽고 사내가 들어오자 최 과장이 말했다.
“홍 팀장, 최근에 YK생명과 관련한 신고 있었나? 암 보험.”
“YK암보험이면…… 늘 있었습니다. 혹시 요양병원비 문제입니까?”
“어. 그걸 어떻게 알아?”
“저희 쪽에서도 분쟁조정 들어왔는데, 저희가 금감원에 넘겼었습니다.”
“왜?”
“약관이 애매한 게 아니라 치료 방법이 애매한 경우라서요. 암 전문가들한테 자문을 구하니, 어떤 사람은 요양치료가 필수라 하고, 또 어떤 쪽은 아니다라 했습니다.”
최 과장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뭐 이렇게 중구난방이야?”
“그게 저…… 정확히 말씀드리면 암은 발병 부위에 따라 천차만별이랍니다. 그래서 딱 잘라 단정할 수 없다는 게 의학계 입장이었습니다.”
“그럼 혹시 그건 약관에 나와 있나? 어떤 암은 요양치료 지원되고, 어떤 건 안 된다.”
“그건 없는 걸로 압니다.”
충분한 대답을 들었는지 최 과장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홍 팀장, YK생명과 관련한 내용 전부 이 친구한테 넘겨줘. 아니, YK뿐 아니라 다른 보험사들 약관 전부 다 가져와. 비슷한 조항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아, 예.”
“그리고 심평원, 건보공단, 대학교수들까지 가서 자문 좀 받아 와. 암 케이스 다 제시하고 어떤 게 요양치료 필수인지 정리해.”
심평원, 건보공단, 의대교수.
약관심사과가 이런 총동원령을 내릴 땐 하나뿐이다.
대규모 법적 분쟁이 될 수도 있는 사건을 맡을 때.
홍 팀장이 허겁지겁 나가자 최 과장이 다시 눈을 돌렸다.
“들었지? 암은 케이스마다 달라서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는 거.”
“예.”
“우리가 아무리 가입자 편이라 해도, 전문가들이 필수치료 아니다라고 하면 편 못 들어.”
세상 단단해 보이던 그도 이 말을 할 땐 목소리가 떨렸다.
“자네도 최대한 중립적으로 파악하란 뜻이야. 암보험이란 게 다 절박한 사람들 상대하는 거라 감정에 치우칠 수밖에 없거든.”
“명심하겠습니다. 저도 최대한 중립적으로 보겠습니다.”
“그래. 자료 넘어오면 연락할 테니, 그만 나가 봐.”
“감사합니다.”
준철이 인사하고 나가자 그가 참아 왔던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금감원의 권고도 협박 수단으로 써먹는 놈들?
이놈들은 공정위가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해석하면 바로 행정소송을 제기할 놈들이다.
“후우…….”
더 큰 문제는 다른 보험사들도 약관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
자칫하면 보험 업계 전체로부터 이의 제기를 당할 수도 있다.
그리 고민할 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어, 홍 팀장.”
-과장님. 말씀하신 보험 업계 전체 뒤져 봤는데요. 암보험약관은 대개 다 똑같습니다.
“요양병원비 관련한 규정이 하나도 없어?”
-예. 그리고 유사 사례가 있는지 찾아봤는데, 다른 곳도 이 요양치료 가지고 계속 분쟁이 있어 왔습니다.
문제가 계속 있었다면 애매한 약관이라는 건 확실한 거다.
원칙적으로 약관이 애매하면 가입자한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게 맞는데…… 참 난감하다.
보험 업계에 선전포고를 해야 하다니.
“옌장할- 칼춤 한번 춰야겠네.”
-어떻게 할까요?
“진행해. 아까 말한 전문가들 찾아가서 소견 받아 와. 암 발병 부위별로 어떤 게 요양치료 필수인지.”
-아,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최 과장은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일이 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제는 이기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