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70
270화
청탁이냐 제보냐
불 다 꺼진 HM호텔 중식당.
삼남 최만석이 현재 대표 이사를 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최만석은 급하게 약속 잡은 큰형을 못마땅한 눈치로 훑어봤다.
“이렇게 만나는 건 지금 좀 위험한 거 아니야?”
“하하. 큰형이 막냇동생한테 술 한잔 사겠다는 게 뭐가 위험하냐.”
“이게 진짜 단순한 술자리라고?”
최만석은 큰형을 한껏 경계하고 있었다.
“그룹 지배 구조 얘기라면 그만둬. 어차피 나야 건설 경영권 관심도 없어. 난 아버지가 남기신 현금성 자산만 최대한 많이 챙기면 그만이야.”
“넌 없다는 얘긴, 다른 누군가는 있다는 얘긴가?”
“알면서 뭘 물어. 둘째 형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잖아.”
“그럼 나도 속 시원하게 묻자. 건설 지분 삼등분되면 너에게도 많은 지분이 갈 거야. 나랑 기석이랑 싸우면 넌 누구 편에 붙을 거지?”
단순한 술자리란 말이 무색할 만큼 본론이 먼저 튀어나왔다.
막냇동생은 혀를 끌끌 찼다.
“내 참. 둘 다 똑같구먼. 그 얘길 자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둘 다 똑같아? 그럼 기석이도 너한테 이런 제안한 적 있다는 거야?”
“왜 아니겠어. 장례 끝나자마자 생전 안 하던 전화를 다 하고 선물 보내 주던데.”
김 비서의 말이 맞았다. 둘째는 순순히 건설 경영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다.
한발 늦었다는 사실에 얼굴이 굳는 최영석이었다.
“그래서 넌? 뭐라 대답했지?”
“내 대답은 똑같아. 이긴 사람 편, 그리고 나한테 더 많이 챙겨 주는 사람 편.”
“네가 국민연금이냐? 무조건 이긴 놈 편들게.”
“그게 형제들 막장 싸움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
최영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오히려 나랑 기석이의 싸움을 부추기는 거다. 캐스팅 보트는 네가 쥐고 있어. 네가 누구 편을 드느냐에 따라 나랑 기석이는 덜 싸울 수도 있단 말이다.”
“대신 내가 선택 안 한 형과는 평생 남이 되겠지. 아니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겠지.”
“그러니까 명분 있는 놈을 밀어줘. 어차피 다 우리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회사 잘 키워 보자고 이러는 거 아니냐? 가장 실력 있는 놈한테 밀어줘야지.”
큰형이 실력이 있던가?
회사의 외연 확장은 실패하고, 하청들 쥐어짜며 영업이익만 높이지 않았던가? 때문에 한명건설의 갑질 논란은 연일 입방에 올랐다.
하지만 굳이 그 얘긴 않기로 했다.
“기석이 그놈은 노욕이야. 금융회사가 어떻게 건설사까지 인수해? 금산 분리 위반으로 공정위에서 합병 승인도 안 해 줄 거다.”
“형님. 둘째 형이 바보야? 건설은 조카들한테 물려주고 금산 분리 규정 잘 피해 가겠지.”
“기석이가 너한테 그런 얘기까지 했냐?”
“아, 몰라. 두 사람 지분 다툼에 더 이상 나 끼어 들이지 마.”
막내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오는 걸 보면, 이미 저쪽은 철저하게 준비를 마쳤나 보다.
“그래 우리 막내는 그런 거 몰라도 되지. 대신 내가 너한테 좋은 제안 하나 할게. 우리 계열사 중 일신시멘트라는 회사가 있어. 내 지분 100%인 자회사에 일감도 몰아준다. 그거
명의 이전해 주마.”
“큰형. 나 호텔이랑 리조트 운영하면서 돈 버는 관광 업계 종사자요. 아무 연관도 없는 시멘트 회사 나한테 넘겨서 뭐 하게?”
“그러니까 주는 거다.”
“뭐?”
“아무 연관도 없는 시멘트 회사 지분 가져가고, 평생 네 비자금 창구로 써. 어차피 밑에 놈들이 일은 다 알아서 할 거다. 넌 그 회사에 등기만 치면 돼.”
사실상 바지사장 하란 얘기다.
“그러다 형이 시멘트 회사 바꾸면? 일감을 다른 곳에 몰아주면?”
“내가 미쳤어? 그럼 네가 건설 지분 들고 바로 둘째한테 쪼르르 달려갈 텐데. 하하. 우리 한명건설에서 취급하는 모든 시멘트는 다 거기 통해서 거래할 거야. 여기 네 비자금 창구로
써라.”
등기만 치면 알아서 돈을 벌어 주는 회사. 이건 투자금도 필요 없고, 머리 아플 일도 없다. 한명건설이 건재하는 한 대한민국 최대의 시멘트 납품 업체가 될 것이다.
“이 좋은 걸 공짜로 주진 않을 테고. 조건이 뭐야?”
“둘째랑 나랑 진흙탕 싸움할 건데, 네 허락을 구하고 싶다.”
“허락?”
“알잖아. 그 새낀 경영권 앞에선 핏줄도 없어. 나 일감 몰아주기 걸렸을 때 결정적 진술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지? 난 그때 그 사건으로 아직 이미지 회복이 안 되고 있다.”
지금까지 형제들이 유배를 당해야 했던 그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그룹 내부 일이 외부에 완전히 흘러갔고, 아버지마저 이 문제를 작은 형의 소행이라 생각했다.
이는 선을 넘은 일이었다. 제아무리 경쟁자라 해도 어떻게 당국에 이런 일을 한단 말인가.
“나는 딱 당한 만큼만 갚아 줄 거야. 네가 진짜 중립적이라면 나랑 동조하자.”
“무슨 계획인데?”
“기석이 계열사 중 하나가 기업을 소유하고 있더라. 해외 법인으로 포장하긴 했는데, 이거 한명투자 회사더라고.”
“설마 비자금…….?”
“까진 모르겠지만 일단 하나는 확실해. 금산 분리를 어긴 거.”
투자 회사는 기업을 소유할 수 없다.
현행법은 금융과 산업을 엄격히 분리한다.
“난 이걸 공정위에 제보할 거고, 딱 당한 만큼만 갚아 줄 거다.”
최만석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시나리오까지 짜 온 걸 보면 내 동의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굳이 이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는 뭐야?”
“내가 기석이를 공격하면 그놈이 누굴 찾아가겠냐.”
“음…….”
“득달같이 네게 달려가서 나를 음해할 거야. 그때 흔들리지 마. 나는 기석이 놈에게 당한 만큼만 갚아 줬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의 역할이었다.
침묵의 대가로 한명그룹의 용돈 창구인 시멘트 계열사 하나를 넘겨받는다. 밑져서 나쁠 게 없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심지어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큰형에겐 나름의 명분도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최만석이 괜히 말했다.
“몇 가지 확실하게 합시다. 그 계열사는 나한테 넘기는 거 맞지?”
“물론.”
“형님 시나리오 중에 내가 따로 해야 할 역할은 없는 거고?”
“대표이사 등기만 쳐. 일은 어차피 밑에 놈들이 다 할 거야. 그리고…… 한번 생각해 봐. 주총 때 내 편 들어주면 내가 더더욱 많이 챙겨 줄 테니.”
슬쩍 본심을 꺼내 봤지만 막냇동생은 거기까진 동조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 못난 형들 싸우는데 막냇동생까지 끌어들일 필요 없지. 내가 원하는 건 딱 이거다.”
“에휴…… 아버지 돌아가시니까 어째 형들하고 더 멀어진 것 같아.”
“시련이 어찌 없겠냐. 그래도 곧 지나갈 싸움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지지부진한 싸움을 가장 빨리 끝낼 수 있는 건, 전적으로 네게 달렸어.”
동생은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동조하겠다는 얘기. 둘째 놈의 이미지 타격이 상당할 것이다.
최영석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동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다, 막내야. 이제 내 동생 같네. 하하.”
***
배 팀장은 조사를 잘 마쳤다는 후련함을 만끽할 새 없이 눈치만 봐야 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데이트 어플 사건은 분명 다 성공적으로 마쳤는데, 과장님의 기분이 늘 우울하지 않나.
우연히 들은 최영호 회장의 비보에 과장님은 그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굳고 말았다. 그 뒤론 그 총기 가득했던 사람이 혼 빠진 사람처럼 눈에 초점도 없었다.
“해서 말인데, 과장님. 어떡할까요.”
“…….”
“저…… 과장님?”
“예?”
“영성기업 리베이트 사건요. 검찰에 기소 요청할까요?”
얼빠진 얼굴을 보니 또 회의에 집중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 네……. 그렇게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요즘 제가 잠을 설쳐서. 남은 회의는 보고로 대체하겠습니다. 서류만 올려 주세요.”
팀장들은 우려스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로봇이랑 대화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배 팀장, 요즘 과장님 왜 저러냐?”
“너도 이상하지?”
“이상하다마다. 요즘 다른 팀장들이 만나기만 하면 이 얘기야. 과장님이 갑자기 로봇이 된 것 같대. 소개팅 앱 그거 뭐 일 처리 안 됐어?”
“무척 잘 끝났어. 해외로 야반도주하려던 놈 체포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도 잘 마쳤어. 나도 대체 왜 저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평택항에서 회사 대표를 잡지 않았나.
가입자들에게 피해금도 줬고, 보기 드물게 언론에서 칭찬까지 받았던 조사다. 그 사건 때문에 저러는 건 절대 아니리.
답답한 대화가 계속되자 서 팀장이 머리를 북북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젠장. 이거 각이 안 보이네.”
“왜?”
“지금 심각한 제보 하나가 들어온 게 있거든. 그래서 오늘 회의에서 그거 발표하려 했는데…….”
“리포트로 대체하라잖아.”
“리포트로 해결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서.”
“무슨 사건인데?”
서 팀장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한명그룹 경영권 분쟁, 아무래도 벌써 시작한 모양이야. 투서가 도착했어.”
“투서? 아니, 그 장례식이 언제 끝났다고…….”
“내부에서 이미 칼을 갈고 있었다는 거지. 장례 끝나자마자 바로 도착했다.”
최 회장이 죽은 지 겨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투서가 도착했다고?
“한명금융이 금산 분리를 어겼대.”
“금융이면……. 차남인가?”
“응. 금융회사가 일반 회사를 소유했어. 명백한 금산 분리 위반인데……. 이거 터지면 아주 대형 사건이 될 거야.”
한국뿐 아니라 모든 선진국들이 금융과 산업을 철저히 분리시킨다.
돈을 쥐고 있는 놈이 산업까지 쥐면 올 대출을 해 주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한 기업이 망함으로 예금자 전체가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
“아니,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금산 분리는 우리랑 금감원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상황인데.”
“그 자세한 내용이 제보에 다 나와 있더라. 법의 허점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어.”
“그 제보서는 그걸 또 어떻게 알고 투서를 했대?”
“그러니까 누구겠냐. 그룹 사정을 잘 알면서도 적인 사람, 최기석이 형제들이겠지.”
두 사람은 잠시 숙연해졌다.
경영권 분쟁의 서막이 올랐다. 둘째의 치부를 들춘 것은 분명 형제들일 터. 기업 분쟁에 공정위가 칼잡이 노릇을 한다는 게 석연치 않다.
“근데 이 시국에 이런 사건 맡고 싶지가 않은데…….”
“접어.”
“뭐?”
“이건 과장님께 보고 올릴 필요도 없다. 누가 봐도 우릴 지들 사냥개로 쓰겠다는 거야. 과장님이 이런 사건을 하겠냐.”
“아무래도 그러겠지?”
“당연하지! 이건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그때였다.
“서 팀장. 그게 무슨 얘기야?”
갑자기 뒤에서 준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 거의 로봇처럼 무미건조했던 과장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