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71
271화
청탁이냐 제보냐 (2)
“과, 과장님…….”
“방금 무슨 얘기야. 한명그룹이 금산 분리를 어겼어?”
“아닙니다. 투서가 하나 도착했는데 아무래도 그 출처가 내부자 같았습니다.”
“그럼 내부 고발이지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리포트 내놔 봐.”
준철은 재빨리 서류를 빼앗았고 이내 시시각각 표정이 변해 갔다.
서 팀장 말대로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다. 차남 최기석이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해 골프장과 여수에 리조트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
여기까진 문제 될 거 없으나 여기에 투자된 비용 모두 한명투자에게 대출 받은 사실이 문제다. 금융회사 오너가 자기 사업에 돈을 끌어다 쓰는 것은 명백한 금산 분리 위반이기
때문이다.
“5%? 기준 금리 3%시대에 기업 대출이 겨우 5%야?”
심지어 이건 금산 분리 위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금산 분리 위반이라도 금리만 제값으로 받으면 누가 뭐라 하겠나. 하지만 한명투자가 대출한 이율은 말도 안 되는 이율로, 이건 불법 대출까지 의심해 볼 여지가 있었다.
이는 김성균으로 살 때도 접하지 못했던 소식이다.
“서 팀장, 이거 제보 어디서 들어온 거야?”
“신문고 공익 제보실로 들어왔습니다.”
“공익 제보? 그럼 익명이겠네.”
“예. 그렇습니다.”
비록 익명이었지만 누가 보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제 생각엔 삼남 최만석이 내부 고발을 한 것 같습니다. 알아보니 호텔경영권과 관련해서 차남과 다툼이 있었더군요.”
“그놈은 건설 경영권하고 거리가 멀어. 크고 작은 다툼은 있겠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그럼…….”
“장남이겠지. 최영석. 그놈이 보낸 거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두 팀장은 조심스러웠다.
“과장님, 현 상황에서 일단 판단은 유보하는 게 좋겠습니다. 최기석 측근 중에 앙심을 품고 고발한 임원일 수도…….”
“이 정도 정보를 알 만한 측근들은 은퇴할 때 입막음비 다 받고 퇴직한다. 남는 게 뭐 있다고 자기 옛 주인을 배신해.”
“하면…….”
“이 사태 커져서 남는 게 있는 놈. 최영석이밖에 없어.”
이젠 두 팀장도 반박하지 못했다.
“근데 이거 너무 1차원적인 거 같지 않습니까. 최영호 회장 작고하고 지금 모두가 다 한명그룹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 투서를 제출할 리가…….”
“그리고 이건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자기 형제 팔아먹어 봤자 제 살 깎아 먹기예요. 진짜 그런 미련한 수를 뒀을까요.”
준철은 매우 단호히 끄덕였다.
“응. 뒀다.”
“……예?”
“최영석이는 비단 그룹 지배권 때문만에 이러는 게 아니야. 지난번 수모를 갚아 주려고 던진 거야.”
“지난번이라면 그 일감 몰아주기 조사 말입니까?”
“그래, 내가 그 사건 직접 담당해서 더 잘 알지. 그때 차남이 형의 치부를 다 자백해서 조사 빨리 끝냈다. 이건 분명 사사로운 감정도 얽혀 있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막가파식으로 가면 한명그룹 우호 지분이 다 떨어질 수도 있는데요.”
제아무리 경영권에 눈이 멀어도, 자기 형제 치부를 고발하는 놈이 어디 있나?
결국 그 치부는 그룹의 치부다. 차남은 따돌릴지 몰라도 더 많은 우호 지분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다.
“…….”
한명그룹의 전 계열사를 돌아본 김성균은 이미 그룹 내막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면에 드러나는 일은 없다. 각 경쟁자들이 약점을 비수처럼 들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치부를 들춰내면, 나의 치부도 드러난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고민을 거듭해도 최영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주 든든한 우호 지분을 확보했으니 이렇게 나오는지도 모를 일이지.
“일단 금감원에 자료 조회하고 이 자료 더 판다.”
“과장님, 근데 좀만 더 신중을 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건 자기들 경영권 다툼에 공권력 이용하겠다는 속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맡는 게 맞을지…….”
“금산 분리 위반했는데 우리가 안 맡으면 어디가 맡아. 설마 금감원, 금융위, 금조부. 타 부처에 일감 떠넘기라는 건 아니지?”
두 사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절대로 그 방법은 안 쓸 모양이다.
준철은 서류를 덮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사건 디벨롭 해서 넘기는 건 찬성. 근데 이거 안 하면 직무유기다.”
준철도 알고 있었다.
이미 주가가 테마에 따라 움직이며 도박판이 된 지 오래다. 많은 투자자와 애널리스트들이 한명그룹 피바람을 예상하고 있었다.
공정위가 여기에 끼어든다면 당연히 편파 논란이 휩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 맡을 수도 없었다. 멀쩡한 공익 제보를 묵살하면 그다음은 직무유기 혐의가 뒤따라오기 때문이다. 제보가 접수된 이상 편파 논란은 피할 길이 없다.
“나도 최영석이한테 장단 맞춰 주기 싫다. 근데 우린 우리 본분만 생각하자.”
그깟 자존심은 잠시 제쳐 두기로 했다. 신빙성 있는 자료가 접수됐으면 그냥 하는 거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도 맡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과장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준철은 끄덕인 후 고개를 돌렸다.
“서 팀장, 지금 연락해서 최영석이 좀 보자고 해. 날짜 잡아라.”
“날짜요? 최영석은 왜…….”
“제보자를 직접 만나야지. 내가 직접 담판 놓는다.”
***
“또 뵙는군요.”
다시 만난 최영석은 얼굴에 웃음이 가득이었다.
아버지를 보냈다는 아쉬움은 사라진 지 오래다. 눈치 볼 사람이 하나 없어졌으니 어쩌면 지금이 더 편안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꾸 기업인들 봐도 되는 겁니까. 정분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여유로운 걸 보니, 오늘 왜 보자고 한 건지도 아시나 봅니다?”
“모르겠는데. 용건이 뭐요?”
“국민신문고에 공익 제보가 하나 접수됐는데, 아무래도 사익 제보 같거든요.”
“난 머리가 나빠서 어렵게 말하면 모릅니다만.”
“좋습니다. 피차 바쁠 텐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한명투자, 최기석 상무. 금산 분리 위반 의혹 제기한 거 본인 아닙니까.”
최영석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공익 제보 접수를 왜 나한테 따지고 들어? 내가 했다는 증거 있어? 그리고 언제부터 조사기관이 익명의 제보자를 찾아 나섰나. 출처가 나면 조사 안 하는 거요? 제보가 접수됐으면
그 자체의 신빙성만 따져야지, 이게 무슨 경우야.”
“제보자 찾자고 부른 거 아닙니다. 다만 이 제보 증거가 부실해서 조사가 안 될 수도 있어서.”
“뭐? 아니, 그게 왜 조사가 안 돼? 증거 부실은 개뿔 어떻게 조사해야 하는지까지 다 시나리오 짜 줬잖아.”
“아직 공익 제보 내용 말씀 안 드렸습니다만, 내용을 잘 아시나 봐요?”
“그, 그야……. 뭐 당신이 나 찾아왔으니까 해 본 소리.”
“어설픈 연극놀이 그만하고 우리 허심탄회하게 대화해 봅시다. 이거 출처 당신이지?”
최영석은 더 이상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막내는 이미 경영권과 멀어졌으니 자신이 의심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면 어쩔 거요. 안 할 겁니까.”
“그럴 리가요. 몇 가지 부실한 증거가 있지만 제보 내용 자체는 상당히 신빙성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증거 부실은 핑계다. 내일 당장 영장이 나와도 손색없을 만큼 모든 내역이 자세히 나와 있다.
아무리 봐도 이 젊은 놈이 자신을 떠보는 것 같았지만, 최영석은 놈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이번 조사의 최대 수혜자는 어찌 됐건 자신이었으니.
“좋아. 뭐 제보가 어떻게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는 선 안에선 다 말해 드리리다. 뭐가 궁금하지?”
“확인부터 합시다. 그러니까 차남 최기석이 금산 분리를 어긴 게 사실입니까?”
최영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잘 몰랐지만 그룹 내부에선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더군. 영인컴퍼니, 이거 사실 기석이 소유야. 한명투자의 대출 과정 전부 다 불투명했어. 기업 대출이 고작 5%인 것만
봐도 답이 딱 나오잖아. 불법 대출.”
“그 자료 출처는?”
“그쪽에 있는 내부 고발자. 전직 임원들.”
준철은 피식 웃음이 났다.
“이미 그쪽 사람들까지 다 포섭하셨나 보군. 회장님 돌아가시기 전부터 계획했던 건가.”
“그래.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잖아. 나만 당할 수는 없지.”
은혜는 잊어도 원하는 절대 잊지 않는다.
과거에 알던 최영석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가 대답 한번 했으니, 이젠 나도 하나 물어봅시다.”
“말해요.”
“내 승계 시나리오, 누가 밀고했지? 아무리 찾아봐도 전직 임원들은 아니야. 최기석이 그쪽 사람인가? 그쪽에서 우리 승계 시나리오를 알고 있는 건가?”
김성균……이라는 대답으론 충분치 않았던 걸까?
하긴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벌써 몇 년도 더 지난 일인데 이제 와 그럴 거라곤 상상도 못 하겠지.
“맞아. 최기석이 쪽에서 시나리오 나왔어.”
“젠장.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 새끼가 내 뒤통수를 두 번이나 치네. 근데 그놈은 내 승계 시나리오를 어떻게 알았지?”
“그건 본인한테 스스로 물어봐요. 원한 진 임원들 없어요? 퇴직금을 섭섭하게 줬다거나. 아님 퇴직금 주기 싫어 묻어 버렸던가.”
“뭐, 뭐? 이 사람이 지금 뭔 끔찍한 소리를 해!”
“그러니까 대답을 나한테 찾지 마시고 혼자 고민해 보라는 겁니다.”
살짝 붉어진 놈의 얼굴을 보는 게 괴롭다.
그 와중에 큰소리 내는 걸 보니, 뻔뻔함은 여전한가 보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사건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예기치 않았지만 상황이 잘 풀려 간다. 형제 사이에 불신의 싹이 트지 않았나.
지금은 놈의 장단에 맞춰 칼춤을 추지만 언젠간 그 화살이 자기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럼 할 얘긴 다 끝났고, 우리가 몇 가지 자료만 더 요구합시다.”
“무슨 자료?”
“영인컴퍼니, 뭐 다 바지 사장이겠지만 대표이사가 너무 바뀌었어. 수소문해 보니 여기 거쳐 간 사람들은 다 이민 갔더군.”
“그래서?”
“이대로라면 최기석 소유라는 거 입증 못 해. 한 사람이라도 좋습니다. 딱 한 사람만이라도 잡아서 나한테 자백시켜요. 그럼 혐의 입증됩니다.”
최영석이 비열하게 웃었다.
“이거 안달이 나셨군. 내 사냥개 역할 하는 건데 그리 좋은가?”
“목적이 같아서 잠시 한배 탔는데 왜 편이라고 생각하지. 우린 누구라도 물어뜯을 수 있는데.”
보면 볼수록 탐나는 놈이다. 저런 야성미 넘치는 놈이 내 밑으로 들어왔었다면 진작 경영권 걱정은 떨쳐 낼 수 있었을 텐데. 최선을 다해 내 적들을 물어뜯어 줬을 텐데.
하지만 절대로 남 밑에서 일 못 하는 부류라는 것도 잘 안다.
“잡담은 여기까지. 응할 생각 있으면 말하쇼. 증인 한 명만 있으면 조사 일사천리로 끝낼 수 있으니.”
“그건 생각해 봅시다. 나도 증거만 제출하면 될 줄 알았지, 증인까지 필요할지는 몰랐네.”
“좋아요. 노력해 봐요.”
놈과 나눌 대화는 여기까지다.
준철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이러면 본인한테 좋을 게 있나? 동생의 치부든 뭐든 결국 한명그룹의 치부야. 그걸 들춰내면 결국 그룹 내 우호 지분이 떨어질 수도 있는데.”
“그 부분은 염려 마. 가장 강력한 사람한테 지지를 얻었으니까.”
“삼남?”
“노코멘트.”
역시나 그거 아니면 이럴 수가 없지.
뭐 뒷사정을 다 알 필요는 없다.
“비밀이 많으신 분이군. 좋아요. 그럼 당분간 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