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74
274화
금산 분리 위반 (3)
급한 연락을 받고 약속 장소로 나가자 상기된 최영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감 몰아주기 조사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요즘 들어 참 자주 보는 얼굴이다. 이러다 미운 정이 다시 고운 정으로 바뀌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놈은 첫마디로 이러한 기대를 산산조각 내 주었다.
“언론에 보도 뿌린 게 이 과장 작품인가?”
이 과장이라.
한 번 비위 좀 맞춰 줬다고 벌써 아랫사람 취급이다.
“내가 기잡니까? 기사를 쓰게.”
“그렇게 요란 법석 다 떨며 기소를 치니까 서초구 기자들이 다 따라붙지!”
“동생 망신 한번 주겠다고 제보 자료 가져온 건 본인 아니에요? 왜 이제 와 갑자기 위하는 척이지. 막상 동생이 곤경에 처하니 형제애가 피어오르나.”
“누가 그것 때문에 그래? 이런 중차대한 일이 있으면 나랑 좀 상의를 해야 될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지금 한명그룹이 온 언론사의 서포트를 다 받고 있는데, 나만 곤란하게
됐다고.”
준철은 최영석을 지그시 바라봤다.
“조사 상황을 왜 당신하고 공유해. 당신이 내 국장님이야?”
“그, 그야…….”
“최영석 씨, 선은 넘지 맙시다. 당신은 제보자, 나는 조사관. 우리 사이에 상의할 문제는 없어.”
“이 과장, 내 말을 오해한 모양인데…….”
“제보자는 나한테 절대 이 과장이라 부르지 않아. 조사관님이라 부르지.”
놈의 표정이 볼썽사납게 굳어졌다. 장단 좀 맞춰 주니 누굴 자기 사냥개로 안 모양이다.
“아, 제보자랑 나랑 상의할 문제가 하나 있긴 하네. 영인컴퍼니 거쳐 간 바지 사장들, 다 해외로 도피했던데 잡은 놈 있어요?”
최영석은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이 과장…… 아니, 조사관님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별수 없지. 난 오늘 추가 제보하려고 온 게 아니라 형량 조절 하러 왔소.”
“무슨 조절?”
“내 동생 그만 물어뜯으시라고. 과징금 1천억이야 그렇다 쳐도 실형 5년은 당신이 너무 나갔어. 내가 원하는 건 동생을 경영권에서 따돌리는 거지, 감방에 처넣는 그림이 아니야.”
준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내가 최영석 씨한테 도움 많이 되겠네. 최 상무가 징역 5년 살면 경영권이 아니라 영영 한명그룹 쳐다도 못 볼걸. 어쩌면 한명투자도 당신 손에 들어갈 수도 있고.”
“내가 지금 끝장을 보자고 이러는 게 아니라니까! 투자든 부동산이든 다 관심 없어. 그건 동생이 알아서 가져가라 그래. 난 건설만 가져가면 된다고.”
“허허 참. 회장님이 왜 돌아가실 때까지 후계자 안 정하셨는지 알겠네.”
“뭐, 뭐야?”
“장남이 이렇게 우유부단한데 어느 누가 후계자로 정하겠어. 대체 당신 의중이 뭐야. 동생 제치고 확실히 그 왕좌 가지고 싶어? 아니면 적당히 기 싸움만 하다가 다시 원상태로
복귀?”
의외였다.
일부러 놈이 가장 기분 나쁠 만한 얘기로 긁어 봤는데 얼굴에 미동 하나 없다.
“다 필요 없고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지금 조사를 멈추지 않겠다는 건가?”
“아시면서. 이 사태를 가장 빨리 끝낼 수 있는 건 추가 제보예요. 바지 사장 신원 확보한 거 있으면 얼른 넘기고, 동생 깔끔하게 보내 줍시다.”
시작은 놈이 했지만, 그렇다고 놈에게 조사 중단시킬 권한까지 있는 건 아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확인 한번 해야겠다. 한명투자의 지저분한 만행이 얼마나 더 있을지.
사실 처음부터 최영석의 들러리만 서다 끝낼 생각도 없었다.
이를 바라보는 최영석은 이제야 깨닫는 듯싶었다.
이리·승냥이 쫓아내자고 내가 호랑이를 불러왔구나. 이제 곧 60을 바라보는 둘째 동생이다. 그런 동생에게 실형 5년을 씌울 수는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경영권에서 따돌리는
그림이지, 동생이 옥사(獄死)하는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당신한텐 좋은 거 아니야. 영원히 따돌릴 수 있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삼남 비리도 아는 거 있으면 말해 줘요.”
준철이 또다시 속을 긁자 최영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역시 한배를 오래 탈 팔자는 아니구먼. 추가 제보? 개소리 하지 마. 더 이상의 제보는 없을 테니까.”
“그럼 여기서 끝? 바지 사장들 신변 확보는 못 했나 봐?”
“그래, 없어. 동생 놈이 아주 꽁꽁 숨겨 놔서 머리카락도 찾을 수 없더만.”
“그래요? 이상하다. 지금 우리 쪽에선 초대 바지 사장이 한국에 들어왔단 얘기가 돌던데.”
“정보 알아도 안 줘! 내가 너 같은 새끼를 믿을 거 같아?”
최영석은 기어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를 떠나 버렸다.
“성질 머리 하고는.”
준철은 혼자 남아 다 식은 커피를 들었다.
***
유 국장의 지시로 6개의 조사TF가 꾸려졌다.
뒤늦게 합류한 세 팀장은 시장감시국 사람으로 모두 금융베테랑들이었다. 이들은 한명투자의 대출 과정이 얼마나 불합리했는지를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덕분에 지금 수면 위에 드러난 사건도 얼마나 빙산의 일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한명투자가 사모펀드를 조성해서 영인컴퍼니에 투자를 했어요. 근데 보통 부동산 사모펀드가 5년 만기인데, 여긴 15년 만기 상품으로 되어 있더군요.”
“음……. 만기가 길다는 건 사실상 영구 대출이라는 뜻이죠?”
“네. 한 번만 연장해 줘도 30년 동안 투자금을 쓸 수 있습니다. 한명투자 전 상품을 다 뒤져 봐도 이 사례가 유일하더군요.”
밤낮없이 달려 온 조사에 끝이 보여 간다.
영인컴퍼니는 한명투자로부터 온갖 특혜를 받아 온 명실상부 최기석의 회사였다.
“하지만…… 모두 바지 사장을 써 입증은 요원합니다.”
“이렇게 많은 특혜가 있었는데도 안 될까요?”
“네. 그냥 재판 끝날 때까지 무조건 자기 거 아니라고 우기면 증불입니다. 자백이 나와야 돼요.”
대한민국에서 사모펀드 사기 사건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일어나지만 그때마다 주도자들은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재판엔 수많은 증거가 필요한데, 늘 증거 부족으로 다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애석한 건 이번 사건에도 그 징조가 보인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뭐 그건 차차 확보하도록 하고, 최기석 상무는 영장 쳐 주세요.”
“구, 구속영장요?”
“네.”
“하지만 지금은 좀 섣부른 게 아닐까요. 증인부터 확보하고 움직이시는 게…….”
“최 상무 계속 바깥에 두면 증인하고 접선할 겁니다. 그 끈을 끊어야 증인도 불안함을 느끼고 협조적으로 나오죠.”
다들 난색을 표했다.
최영석이 조사를 돕기로 하다 이탈한 상황 아닌가. 재벌 총수를 구속시키는 건 조사가 실패로 끝났을 때 감당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지금 한명그룹은 안팎에서 편파 조사 의혹을 받는 실정. 칼로 들쑤시기만 하다 어이없이 끝나면 공정위가 붙어먹었단 소리도 나올 것이다.
팀장들 반응이 시원치 않자 준철이 책상을 한 번 내리쳤다.
“뒤에서 증거 인멸할 게 빤한데 어떻게 이걸 불구속 수사합니까? 검찰에 우리 입장 설명하고 반드시 받아 내 주세요. 반드시 구속 수사로 가야 합니다.”
준철의 단호한 의지를 확인한 팀장들이 쏜살같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구속영장까지 쳤으니 반드시 증인을 확보해야 한다. 아무래도 젊은 과장은 적당한 선에서 조사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
-한 말씀만 해 주십쇼! 영인컴퍼니가 본인 회사 맞습니까?
-공정위에선 상당한 대출 특혜와 투자 특혜가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사모펀드 만기가 어떻게 15년이나 될 수 있나요?
최기석의 구속 길엔 기자들이 가득 메워 진을 치고 있었다.
법원에서 이례적으로 영장을 빨리 발부한 건 그만큼 증거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플래시 세례가 터지고 최기석에게 질문이 쏟아졌지만 그는 끝끝내 한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상투적인 말도.
“허허. 이 옷도 오랜만이구먼. 이젠 잠옷처럼 느껴져.”
수인복으로 갈아입은 최기석은 취조실에서 여유를 떨었다.
“편하시다니 다행이네요.”
“편하지는 않고. 한두 달 입다 버리기엔 제격이지.”
“못 들으셨나. 한두 달이 아니라 5년 동안 입으실 텐데.”
최기석이 미간에 힘을 주자 준철이 서류를 내밀었다.
“거기서 1-2년 정도 빼 줄 의향은 있거든요? 우리 쉽게 갑시다. 영인컴퍼니 본인 소유고, 한명투자가 여기에 대출 특혜와 투자 특혜를 줬죠?”
“당최 무슨 소린지.”
“다 부정하는 겁니까?”
“영인컴퍼니는, 퇴직한 임원들이 설립한 회사고 꽤 사업 아이템이 좋아 보여 우리가 투자를 했소.”
“대출 특혜는?”
“아, 그 저금리 대출? 평생을 한명투자를 위해 헌신한 임원들인데, 그 정도 편의도 못 봐줍니까? 뭐 그게 불법 대출이었다 생각하면 내가 그 죗값은 받겠소.”
탄탄한 시나리오를 들고 온 걸 보니 변호사와 말을 다 맞췄나 보다.
“아, 그리고 우린 그 대출을 이미 갚은 걸로 압니다만?”
“네. 동분서주하셨더군요. 부랴부랴 돈 끌어다 모으느라 애썼습니다.”
“그럼 끝 아닙니까?”
“부당 대출 사실은 명백히 남아 있는데 어떻게 끝이에요?”
“그래서 갚았다는 거 아니요. 최소한 부실 회사는 아니었잖아.”
“부실 회사가 아닌 것과 저리 대출을 한 건 다르지.”
“아니, 뭐가 다르다는 거야? 그래서 다 갚았잖아.”
준철은 최기석을 한심스럽게 쳐다봤다.
“누가 갚은 거 가지고 그래? 이게 무슨 버팀목 전세 대출이야? 소상공인 대출이야? 왜 말도 안 되는 저리로 기업한테 빌려주냐고.”
“그, 그건 임원들…….”
“전직 임원이었단 핑계는 그만둬. 공금을 임원 복지에 쓰면 그게 횡령이고 배임이니까. 못 갚으면 실형 10년을 받는 거지, 갚았다고 끝이 아니야. 당신의 불법 대출은 이미 지울 수
없는 흔적이라고.”
언성을 높이자 놈이 주춤거렸다.
하지만 아직 믿을 만한 게 있었다.
“거 듣고 보니 좀 웃깁니다. 그래서 그게 내 회사라는 증거 있어?”
“영인컴퍼니 배당금이 해외 계좌 몇 바퀴 거쳐서 다 본인 통장으로 갔던데.”
“나야 받을 돈 있어서 따로 받은 거고, 그게 그 돈이란 증거 없잖아. 어찌 됐건 나한테 가는 건 없다는 거네?”
성능 좋은 세탁기를 고용했나 보다. 돈세탁한 흔적은 들키지 않을 거란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쯤 합시다. 우리가 돈세탁 흔적 못 찾겠어요. 시일은 걸리겠죠. 그냥 자백하면 우리가 실형 2년으로 끝낼 생각입니다.”
“흥! 웃기는 소리. 너는 이미 큰형 개새끼잖아. 어디서 형량 가지고 흥정질이야.”
준철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누구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