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75
275화
금산 분리 위반 (4)
최기석은 야산에서 호랑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그건 취조실에 들러리처럼 앉아 있는 변호사와 검사도 마찬가지였다.
준철의 얼굴에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투는 시건방지지만 늘 선을 지키던 놈 아니었던가?
“다시 말해 봐. 내가 누구 개라고?”
“내, 내 말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언론에서 그렇게 받아 적잖소. 공정위가 편파 조사를 한다. 차남을 겨냥한 표적 수사다.”
준철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잠시 아픈 기억이 떠올라 과민 반응이 튀어나왔다. 말마따나 뉴스에서 다 그렇게 떠드는데 흥분할 필요는 없다.
애석하게도 최기석은 준철의 인내심을 오해하고 말았다.
“왜 대답이 없습니까?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닌가 보지?”
“…….”
“하이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하더니. 인정은 하시는구먼. 나도 물읍시다. 대체 큰형이 당신한테 뭘 제시했지? 큰돈? 아님 자리 약속? 그것도 아니면 은퇴 후에 예우 좀 해
주겠대?”
“최기석 씨, 지금은 당신이 나한테 뭘 물을 게 아니라,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자리야. 그 수인복 10년 동안 입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 내 의구심부터 먼저 풀어! 정말로 이 사건을 아무 사심 없이 조사한다?”
놈이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렸다.
“좋아, 그럴 수 있지. 백번 그럴 수 있지. 그럼 나를 찌른 이 제보 자료, 출처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당신 최측근 전직 임원…….”
“그놈들은 절대 아니야. 나한테 받은 그 퇴직금으로 섭섭지 않게 챙겨 줬고, 아직도 연락하고 있어. 이거 출처 큰형 아니야?”
“미안합니다. 공익 제보는 제보자 신상 누설이 절대 금지라. 근데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쳐도. 지금 중요한 건 당신 대답이잖아요. 해명을 하세요.”
“염병 떠네. 큰형 청부업자 새끼가. 쯧쯧.”
그는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 변호사, 내 답변은 알아서 준비해. 난 더 이상 할 말 없으니. 그리고 공정위 과장 양반도 그만 설치쇼. 취조는 검사가 하는 거지 공정위가 하는 게 아니야.”
공정위에게 전속 고발권이 있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한 놈이니 더 이상 사건에 손을 못 대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도 한번 망신 좀 당해 보라고. 흐흐.”
그가 나가자 썰렁한 분위기가 되었다.
변호사는 안경을 한 번 쓰윽 올리더니,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 안 하겠다는 거 아니에요. 이 정도 혐의는 인정할 테니, 딱 이쯤에서 그만둡시다. 안 그럼 피차 피곤해질 거요.”
서류를 확인하니 장황한 변명들이 적혀 있었다.
다른 자료는 볼 필요가 없다. 실형 1년에 집유 2년.
금산분리 위반, 불법대출 혐의는 아예 적혀 있지도 않다. 금산분리 위반은 무혐의, 불법대출은 업무상 과실로 둔갑되어 있었다.
황당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법 위에 있다는 게 재벌이라지만 죄목도 자기가 정하고 형량도 자기가 정해 버린다. 판사와 검사의 권력을 합쳤다는 건가?
“만약 우리 요구 조건에 응하지 않으면, 우리도 정말 더러운 방법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사관님 본인이 피곤해질 거예요.”
“내가 여기서 더 피곤할 게 있습니까? 이미 일주일째나 집에 못 가고 있는데.”
“언론에 자료 돌린 건 공정위의 실수였소. 이미 사람들은 공정위의 진정성에 의문을 보이고 있거든. 우린 그 의구심에 불을 지필 겁니다.”
언론플레이로 끌고 가겠다는 건가.
하긴 놈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카드는 조사관을 매도하는 것뿐이다.
사실 시기가 좋지 않아, 대중이 혹하기 딱 좋다.
하여 담당 검사가 은근한 눈치를 보내며 이쯤에서 합의하자고 재촉했다.
-찍찍.
“법정에서 봅시다.”
이쯤 했으면 대답이 됐겠지.
***
[처음부터 계획된 조사?] [사건 배후 논란, 공정하지 않은 공정거래위원회]논리로 안 되니 뒤를 털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이튿날부턴 음해성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정위가 편파적으로 조사를 진행했고, 대가성이 있다는 게 내용의 골자였다.
생각보다 그 파장은 엄청났다. 한명투자는 투자 그룹답게 광고를 많이 뿌리는 기업. 그쪽에 사주받고 글을 쓰는 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튿날 출근길엔 아예 기자들이 줄을 지었다.
-최근 장남 최영석 부회장과 공정위의 청탁 관계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까. 이게 사실입니까?
-이 제보의 출처가 어디였습니까.
준철은 좌우를 물리치며 묵묵히 자리를 벗어났다.
열거된 내용 자체는 사실이니 부정할 수 없었다. 어설픈 변명을 내놔 봤자 오해만 더 커질 것이다.
“저…… 과장님.”
“괜찮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아무리 그래도…….”
“내가 감당해. 지금 영인컴퍼니 실소유주 찾았어?”
서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다 한국 떴어요. 머리카락도 못 찾겠더군요.”
“실소유주 입증보단 불법 대출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현재로선 영인컴퍼니가 최기석이 소유라는 증거가 없다.
거쳐 간 바지사장들이 다 해외로 떠나 버렸으니, 찾기 쉽지 않다. 남은 건 왜 영인컴퍼니에게 저리 대출을 해 줬냐 하는 것.
이럴 경우 연역적 추론으로 당연히 실소유주가 되겠지만, 법은 답답하고 무식하다.
“불법 대출로 가닥을 잡으시죠.”
팀장 하나가 그리 말했지만 준철은 고개를 저었다.
“이거 어차피 해도 안 됩니다. 이미 대출금 다 갚았다면서요.”
“그건 그렇죠.”
“대출 과정에서의 자기 내부 기준이 있었다고 둘러대면 형량도 미미할 겁니다.”
제일 화가 나는 건 최기석이 부랴부랴 돈을 갚았다는 것이다.
이러면 법원도 형량에 참작해 준다. 불법 대출은 어디까지나 부실 기업에 대출 허가가 떨어졌을 때 형량이 커지지, 건실 기업에게 약간의 특혜를 줘 봤자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이를 아는 최기석이 부랴부랴 대출을 갚으며 건실 기업임을 입증한 것이다.
“최기석이 보석 신청했어?”
“네. 지병을 앓고 있다고…… 20억짜리 보석인데, 아마 허가될 것 같습니다.”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마 놈을 가둬 두고 있으니, 이 정도지 나오면 더욱 교묘하게 증거를 인멸할 것이다. 사실상 막지도 못하겠지.
그렇게 한숨을 내쉴 때, 갑자기 배 팀장이 달려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과, 과장님. 영인컴퍼니 바지사장 하나가 한국에 와 있었답니다.”
“뭐?”
“공소시효 다 끝난 놈이라 한국에 왔나 봐요. 지금 소재지 파악했다는데 이거…….”
“지금 거기 어디야?! 당장 출발해!”
***
“김성균 본부장 그만하자. 어차피 서로 계속 싸워 봤자 득될 거 없잖아?”
“뭘?”
“거기 전략실에서 우리 최 상무님 약점 털고 있는 거 다 알아. 근데 우리라곤 가만있을까?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최영석 부회장 먼지 다 찾아낼 수도 있어. 이쯤에서 휴전하는 게
어때?”
오성규 부사장.
과거에 인연이 참 많았던 자다.
최기석의 오른팔로 늘 더러운 일을 담당했던 놈이었으니. 모시던 주군은 서로 경쟁 관계였고 우리도 서로 앙숙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먼지를 다 찾아낸다……가 아니라 이미 다 찾지 않았나?”
“뭐?”
“우리 전략실이 움직이는 건 네들이 먼저 우리 부회장님 비자금 내역을 찾았단 첩보가 입수돼서야. 휴전 제안은 내가 꺼내는 게 맞지 않겠어?”
“흐하핫. 하여간 정보통 하나는 알아줘야 돼.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한명건설은 국정원에 빨대라도 꽂아 두셨나.”
“말 돌리지 말고 먼저 확실히 대답해. 우리 공격할 거야? 그럼 우리도 끝장 본다.”
사심은 없었지만 우리는 만나서 으르렁거리는 게 일이었다.
사실 오성규 부사장은 내게 두려운 존재였다. 일처리 확실하고, 눈치 빠르고, 무엇보다 권모술수에 능해 내 허를 찔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틈만 나면 자신의 약점을 찾아댔으니, 최영석도 여간 거슬려 했던 게 아니다.
“듣고 보니 자네 말이 맞구먼. 내가 먼저 사과하지. 우리 그만둔다, 그럼 그쪽도 그만둬 줄 수 있나.”
“거기서 그만두면 우리도 그만둬. 약속하지.”
“좋아. 그럼 이제 일어날까.”
“아, 한 가지만 더.”
“제안할 게 또 남았나?”
“이건 제안이 아니라 부탁인데……. 최 상무 설득 좀 해 줄 수 없나.”
“뭐?”
“한국 사회는 아직도 장자 계승이 원칙이야. 회장님이 부회장을 건설 임원에 앉힌 건 건설을 맡기겠단 뜻이겠지. 만약 우리가 물려받으면 한명투자 지분 깔끔하게 정리해서 독립시켜
준다.”
오성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설득 못 하겠군. 우리 상무님은 아직 한명건설의 왕좌가 공석이라 생각해서 말이야.”
“그러니까 설득을…….”
“무슨 명분으로 설득해?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최 부회장은 지독히도 무능해. 하청들 쥐어짜서 영업이익만 높이는 게 어떻게 경영 실적이냔 말이야.”
“…….”
“물론 최 상무도 더러운 짓은 많이 하지.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실적도 있다. 그러지 말고 자네야말로 한번 잘 생각해 봐. 최영석이 찌를 수 있는 비수 몇 개 가지고 우리 쪽에
붙어. 우리 상무님은 전향자에게 아주 관대하다.”
나는 껄껄 웃었다.
“웃기는군. 부회장님도 내게 같은 소릴 하던데.”
“뭐?”
“최 상무 더러운 똥물 몇 개 가지고 우리 쪽에 전향해. 내가 책임지고 자네 계열사 사장 자리는 줄게.”
“흐흐. 콩 심은 데 콩 난다더니 형제가 똑같은 생각이구먼.”
“아무래도 타협 못 볼 문제겠지?”
“그래, 먼저 얘기 꺼내서 미안하다. 그만하자.”
오성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말했다.
“그래도 언제 한번 술 한잔하지. 두 형제들 진흙탕 싸움 대리인 말고 인간 대 인간으로.”
“그런 날이 올까. 하하.”
“뭐, 언제까지 가겠어. 회장님 돌아가시면 형제들도 평생 싸우진 않겠지.”
“그건 그러네.”
“아무튼 난 오늘 얘기 잘 끝난 걸로 알고 이만 일어날게.”
그것이 오성규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허심탄회하게 술 한잔할 수 있는 날은 영영 내게 오지 않았다.
김성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놈은 평생 신임을 받았고 김성균은 못 받았다는 것이다.
놈은 영인컴퍼니 초대 사장으로 막대한 이권을 배당받았다. 그간 충성했던 대가를 일시불로 받았을 것이겠지.
반대로 김성균은 충성의 대가를 받기 직전에 위장 교통사고를 당했다.
후회가 든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그 제안을 받아들일걸. 최 상무가 그럼 날 진짜로 환대해 줬을지도 모를 텐데.
“오랜만입니다. 오성규 씨.”
취조실에 들어가 인사하자 놈이 날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압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