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76
276화
금산 분리 위반 (5)
“제가 아는 얼굴과 착각했군요. 실례했습니다.”
오성규는 떨떠름한 얼굴로 준철을 훑었다.
단순한 실수라 하기엔 너무나 자연스런 태도다.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묘한 기시감도 느껴졌다. 정말로 만난 적이 있던 걸까?
오성규가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준철은 팔자 좋은 그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됐다.
살짝 태닝된 얼굴과 삐져나온 뱃살. 시종일관 만연한 웃음은 주인에게 듬뿍 사랑 받고 자란 충견의 모습이었다.
부회장이 배신만 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저런 얼굴이었을까.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오. 진짜로 나를 만난 적이 있나?”
“미안합니다. 아무리 봐도 착각이었네요.”
“나를 취조실로 불러온 건 고작 그 착각이었단 변명으로 안 끝날 겁니다.”
준철은 피식 웃었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더니, 옛날 말투 그대로다. 덕분에 소싯적 생각도 들고 편하다.
“착각한 건 미안하지만……. 지금 취조실에서 큰소리 칠 군번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
“영인컴퍼니 초대 바지 사장이 본인이잖아요. 가관이더군요. 부동산 임대, 골프장 사업, 리조트 설립……. 웬만한 건설사보다 더 잘나갔더군요.”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샐러리맨의 은퇴 생활 성공기?”
놈이 혀를 찼다.
“한심한 작자 같으니라고. 고작 내 자서전 얘기가 궁금해서 취조실로 불러? 3년만 기다리시오. 댁을 위해서 내가 출판사 한번 알아보리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한 치의 주눅 든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허위 등기의 공소시효는 5년으로, 설사 그가 바지사장이었다 한들 이제는 책임도 물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들려주시면 고맙죠. 사실 저희 공무원들은 인터넷 서핑하면서 야근 수당 받아 가는 놈들입니다. 시간도 널널한데 오붓하게 얘기 좀 해 볼까요?”
“뭐?”
“영인컴퍼니 사업 자금 어디서 끌어오셨습니까. 아니, 한명투자한테 어떻게 받아 온 겁니까.”
멍석을 깔아 주니 바로 입을 다물어 버리는 놈이다.
“특히나 이 골프장은 그린벨트로 50년 동안 묶여 있던 땅이었어요.”
“그, 그건…….”
“세상에 이 노른자 땅에다 골프장을 세웠으니 예약이 2년 동안 꽉 차지. 수완 좋습디다? 이 앞에 있는 러브호텔 다섯 곳도 영인컴퍼니 소유죠? 고객들한테 대실권까지 줘서 풀코스
골프장으로 입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리고 경주에 짓고 있는 이 리조트는…….”
쾅!
“건방진 새끼가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자금 조달 어떻게 했어?”
“뭐?”
“골프장, 리조트, 러브호텔 건립 비용. 이 막대한 돈 어떻게 끌어왔냐고. 그리고 네들한테 사업권 준 놈 누구야. 그 자식 이름도 알아야겠다.”
얘기가 민감한 영역으로 넘어가자 놈이 난동을 부렸다.
“내가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나. 어차피 다 공소시효 지난 걸로 아는데.”
“그러니까 당신한테 이런 특별한 기회를 주는 거야. 오늘 고해성사 하고 깔끔하게 텁시다. 어차피 우린 당신 처벌할 생각 없어.”
“흐하핫!”
놈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주인을 물라는 거야? 내가 왜? 충성한 대가로 내 평생의 노후를 책임져 주신 분한테.”
“진짜로 노후를 책임져 준 주인이라면 당신이 이렇게 소환되지도 않았겠지. 당신은 그냥 이용당한 거야.”
“조사관님. 이런 이용이라면 두 번, 아니 백 번도 기꺼이 당할 수 있습니다. 허허.”
놈과 얘기를 나눌수록 괴로움이 밀려왔다.
과거 김성균의 생각과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인정하십니까? 영인컴퍼니는 사실상 최기석 상무의 회사였고, 한명투자는 여기에 불법 대출 및 불법투자를 했다?”
“아니오. 영인컴퍼니는 죽었다 깨어나도 내 회사였습니다. 한명투자로부터 혜택을 받은 건 내 후배들이 나한테 예우를 해 준 거니, 우리 최 상무님도 어찌 보면 피해자예요.”
“대출, 투자액이 최소 3천억가량 되던데 이걸 최 상무도 모르게 진행되었다?”
“내가 후배들한테 못된 것만 가르쳤지. 네, 있는 사실 그대로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영인컴퍼니는 당시 골프장과 부동산을 소유하며 연 100억대 임대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돈 한 푼 받지 않은 채 소유권을 이전시켜 버렸다. 그렇게 2대, 3대 바지사장이 영인컴퍼니를 관리하게 되었다.
“그럼 소유권 이전은 왜 했습니까? 다른 임원들한테.”
“내가 키운 후배들이라 하지 않았소. 나도 챙겨 줬어야지.”
“그게 아니라, 최 상무가 퇴직금 챙겨 줬겠지. 돌아가면서.”
“뭐?”
“퇴직 앞둔 임원들, 그중에서 가장 자신이 믿을 만한 놈들로. 여기 바지 사장 시키면서 돈 받아 간 거 아니요.”
준철이 책상을 치며 서류를 내밀었다.
“그냥 딱 한마디만 해요. 영인컴퍼니 사실은 최기석 상무 회사였고, 한명투자는 여기에 저리로 불법 대출까지 했다고.”
딱 그 한마디면 된다.
증인이 그리 말하면 불법 대출과 금산 분리 위반 모든 혐의가 적용되며 놈에 대한 처벌도 완전히 끝난다.
하지만 그놈은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만 어쩌시겠습니까. 뭐 이미 공소시효도 다 끝나고 한 마당에 영장 가져오시겠수?”
“…….”
“아님, 뭐 나 고발이라도 할 거야? 대체 뭐야 네들? 왜 날 놈 데려와놓고 헛소리를 늘어놔.”
그리 말하며 일어났다.
“나도 듣는 소식이 있어. 당신들 부회장한테 사주받고 이러는 거잖아.”
“뭐?”
“한명그룹 경영권 투쟁에 공정위가 개노릇을 자처했다더군. 온 세상이 다 당신을 비웃고 있어. 청탁 받고 움직인다고. 만약 이 사건이 무혐의로 끝나면 당신은 무사할 것 같나?”
이제는 누구의 개란 소리를 들어도 별반 화가 나지 않았다.
좋든 싫든 세간의 평가가 그러했다. 섣불리 움직인 공정위를 질타하는 목소리도 많았고, 지라시에선 최영석의 사주를 받았단 말도 나돌았다.
“내 참. 오란다고 온 나도 등신이지. 이미 공소시효도 다 끝난 마당에. 이제부턴 뭐 영장을 치든, 코렁탕을 먹이든 알아서 해 보쇼. 내 얼굴 두 번 볼 일 없을 테니까.”
그렇게 그가 일어설 때였다.
“박지현……. 그 여자가 연예인 지망생이었나, 승무원 지망생이었나.”
멈칫.
“아, 그건 신지혜였지. 박지현은 아나운서 지망생이었고.”
“너, 너 이 새끼 지금 무슨…….”
“반백살에 애절한 로맨스 영화 한 편 찍으셨잖아요. 유부남과 여대생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그 결말이 내연녀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끝이었나?”
너무 당황해서 재대로 말도 튀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오 사장님이 의리는 기가 막힌 편이라 들었습니다. 그 내연녀 유학 끝날 때까지 키다리 아저씨 노릇하셨다고. 근데 그 얘기 사모님은 아십니까?”
“…….”
“아, 사모님은 죽었다 깨나도 모르시겠지. 최 상무가 준 퇴직금들 다 내연녀 뒷바라지하는 데 썼잖아요. 혹시 도피지를 하와이로 간 것도 내연녀 때문입니까.”
그는 더 이상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막말도 하지 않았다.
“……그 얘길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긴. 김성균으로 살 때 상대측 임원들 공금횡령부터 사생활 문제까지 싹 다 조사했으니 알지.
평생 써먹을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도움될 줄이야.
“내가 이 제보 어디서 받았는지 알죠?”
“설마…… 최영석이가?”
“긴말 않겠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정보 내주고 조용히 살래요, 아님 콩가루 집안 만들래요?”
“내 물음에 먼저 대답해. 최영석이가 정말 그 문제까지 거론했어?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도 그 새끼 약점…….”
“두 놈들 배꼽 아래 문제까지 관심 없고 우리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영인컴퍼니, 어떤 회사야!”
준철이 호통을 치자 오성규는 주저앉아 버렸다.
아무리 경영권 분쟁이라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남자들 배꼽 아래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어차피 서로 지저분한 문제니 말이다.
하지만 젊은 놈의 당당한 태도는 상대 쪽에서 이미 모든 걸 다 털어놨다는 걸 의미했다.
공포스러웠다. 건설 경영권을 향한 부회장의 집념과 광기가 느껴진다.
이 사실에 충격받을 아이들과 처를 생각하니 머리가 다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오성규 씨, 가정 문제엔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준철은 쓰러진 그를 일으켜 세우며 친절히 의자에 앉혔다.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놈이 아닙니다. 어차피 오성규 씨는 공소시효가 다 끝나서 여기서 무슨 증언을 하든 피해가 없어요. 그렇죠?”
“…….”
“반대로 나는 그 증언이 매우 절실하고, 당신의 인생을 산산 조각낼 약점도 쥐고 있어요. 그렇죠?”
“…….”
“거래합시다. 내가 원하는 정보 주면, 당신이 원하는 정보는 덮어 드리죠.”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다 끝난 게임 같은데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다.
하긴 얼마나 혼란스럽겠나.
자식과 마누라를 보호하기 위해선 주인의 발목을 물어야 한다. 주인이 마지막에 챙겨 준 사료를 딴 집 개에게 홀랑 다 바쳤으니 이에 대한 원망도 피할 수 없다.
“대체…… 어떻게 알았습니까. 정말 부회장이 이런 거 까지 말한 겁니까?”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오성규는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렸다.
“만약에…… 내가 상무님을 고발하면 처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처벌되겠죠. 근데 형량이 늘어날 뿐이지, 안 받을 처벌을 받는 건 아닙니다.”
“그 형량은 얼마나…….”
“5년 정도 살 겁니다. 협조하면 1~2년 정도는 참작해 줄 수 있고.”
찔끔찔끔 울던 놈이 갑자기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실형을 사는 것 자체가 경영권 배제를 의미하지 않나. 최영석은 그 공백기에 반드시 한명건설 경영권을 독차지해 버릴 것이다.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도 한 가지 약속 하나 해 주겠습니다.”
“약속?”
“내가 최영석이랑 붙어먹은 건 아니에요. 누군가 내게 그 놈의 약점을 가져온다면 이 이상으로 놈을 짓밟아 줄 겁니다. 아, 단순한 제보 말고 명확한 증거까지 갖춰서 줘야 돼요.”
“…….”
“그러니까 우리 괜한 입씨름 맙시다. 영인컴퍼니 차남 회사 맞죠?”
진심이었지만 믿지는 않는 눈치였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피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 회사는 최 상무님 회사였어요.”
“거쳐 간 다른 사장들은?”
“모두 나와 같은 측근들로 명의만 빌려줬어요. 만약 조사에 필요하면 내가 그 사람들 다 귀국시켜 놓겠습니다. 대신…….”
“대신?”
“우리 최 상무님 형량만 어떻게 해 주십쇼. 집유는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그 형량 더 살면 안 되겠습니까. 차라리 날 죽여 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