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77
277화
금산 분리 위반 (6)
준철이 취조실에서 나오자 배 팀장이 쾌재를 불렀다.
믿을 수 없는 결과다. 이미 공소시효가 끝났으며 놈이 절대로 제 주인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게 대체적이 관측이었다.
굳이 주인을 물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담당 검사는 조서를 보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놈은 심복 아니었던가요. 이걸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공소시효가……. 적용이 안 되는 얘기 몇 개 좀 했어요.”
“공소시효가 적용 안 되는 문제?”
“길 게 설명하면 긴데요. 조서는 잘 마무리된 겁니까?”
담당 검사는 격하게 끄덕였다.
“너무 완벽해서 제가 할 게 없을 지경입니다. 실소유자가 최기석이란 사실을 확실히 자백해 줬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쪽도 서류 검토해 보겠습니다.”
담당 검사가 신바람 나며 떠나가자 배 팀장이 다가왔다.
“과장님! 진짜 대단하십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뭐 이리 호들갑이냐.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니고, 있는 말 받아 낸 건데.”
“상대가 오성규였잖아요! 대체 진짜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이게 그렇게도 신기한 걸까.
하긴 놈의 사생활까지 거론하며 흔들었으니, 기상천외하긴 하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씁쓸함도 느껴졌다. 오성규는 주인을 팔아먹는 마지막까지도 주인의 선처를 바랐다. 상무님 대신 자기가 더 큰 처벌 받겠다는 게 공갈은 아닐 것이다.
저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화가 나는 이유가 뭘까.
‘…….’
과거의 내 모습 같아서 아니었을까.
주인이 먼저 뒤통수를 쳐 버렸다는 결말은 좀 다르지만.
“조서 줘 봐.”
“예. 여기 있습니다.”
준철은 어지러운 상념을 떨치며 내용 확인에 들어갔다.
“불법 대출 여부는?”
“나왔습니다. 최기석의 실소유 회사라 한명투자에서 일사천리로 대출해 줬다 하더군요. 영인컴퍼니는 제대로 된 사무실도 없는 회사였는데, 한투가 기업 실사도 나가지 않고 대출 승인을
해 줘 버렸어요.”
한명투자는 투자의 귀재다.
시골 촌구석에 컨테이너 하나 달랑 세워 놓은 회사에 무려 3천을 대출해 줬고, 꽤 많은 수익금도 얻었다.
이것이 오마하의 현자가 말했던 가치 투자란 말인가.
“이 과정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거냐?”
“일단 한투에서 기업 대출 하려면 최소 3개월 최장 1년까지 서류 심사에 들어가요. 그 회사의 장래성과 자본 비율을 다 봐야 하니.”
서류가 후루룩 넘어갔다.
“근데 여긴 고작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작 한 달?”
“네. 그것도 사업 계획서 몇십 장 제출한 게 전부입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 같은데?”
과거 왕 회장이 영국에 차관을 빌리러 갈 때, 500원짜리 지폐에 있는 거북선 보여 줬다던가? 백사장에 회사 깃발 하나 꼽고 여기서 배 만들 테니, 돈 빌려달라 했던 얘기는 유명한
일화다.
사실 말이 와전된 거지, 그때 이미 영국 은행과 한국 정부는 다 말을 맞춰 놓고 있었다.
그에 대한 보증도 확실하게 설정했을 정도로.
이 사건에서도 유효하다. 그렇게 돈을 턱턱 빌려준 건 담보와 보증인이 확실해서다. 바로 한투의 실질적인 회장인 최기석.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냐면요. 영인컴퍼니는 사실상 무늬만 회사예요. 애초에 서류 탈락감입니다.
“근데 영인컴퍼니가 벌인 사업이 많던데? 경주 리조트랑 골프장, 부동산 임대업은 어떻게 이뤄 냈지?”
준철은 건설업계 종사자답게 더 지저분한 일이 있었을 것 같았다.
“아, 그건 오햅니다. 여기에 정치인이 연루된 흔적은 없습니다.”
“그놈들 말은 다 걸러서 들어야 돼.”
“근데 여기 조서에도 나와 있다시피……. 진짜 유력 정치인이 연루됐으면 이렇게 잠잠했을까요?”
“흠.”
“외압이 없는 걸 보면,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준철은 어렵지 않게 끄덕였다.
그래, 만약 진짜 더러운 놈들이 붙었으면, 이미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을 거다.
아니라면 진작 외압을 가해 막았겠지.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걸 보니, 이권은 없나 보다.
안심하는 동시에 불안함도 들었다. 최기석은 정치인에 줄 댄 자금이 없어 지금 이렇게 쉽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영석은? 이미 토건 세력이라 불릴 만큼 정치인과 야합한 놈이다.
놈을 치려면 더한 수고를 거쳐야 한다. 이 사건은 최영석을 치기 위한 모의고사에 지나지 않는구나.
“좋아. 그럼 사건 어느 정도 정리됐네?”
“네. 나올 건 다 나왔습니다.”
“그럼 이 사실들 언론에 싹 다 뿌려 버려.”
배 팀장이 화들짝 놀랐다.
“지, 지금 바로요?”
“왜?”
“민감한 사건이니 아무래도…….”
“지금 재고 따질 시간 어디 있냐. 계속해서 나한테 사주받았다고 쪼아 대는 마당에. 바로 뿌려라.”
“알겠습니다.”
배 팀장은 잠시 주저했지만 곧 싱글벙글 웃음이 났다.
내일 뉴스엔 아주 화려한 불꽃 축제가 열릴 것이다.
***
[영인컴퍼니, 최기석 소유였나?] [핵심 관계자 증언 확보] [유명무실한 금산 분리법]오성규의 증언은 언론에 적나라하게 보도되었다. 영인컴퍼니가 최 상무의 회사라는 것도, 이 때문에 한명투자가 막대한 특혜를 주었다는 것도.
영인컴퍼니의 실소유주가 확인되자 여론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투자 회사 오너가 사기업 소유한다는 게 말이 되냐?
부동산, 골프장, 경주 리조트. 웬만한 건설사보다 더 잘나가는 회사네? 만약 영인컴퍼니 부도났으면 한명투자에 예치된 돈 들 연쇄 부도네?
⌞ㅇㅇ 영인컴퍼니 터졌으면 한명투자에 들어간 돈 싹 다 연쇄 부도. 금융과 산업 분리 해 놓은 의미가 없음.
-대출 특혜 미쳤다
서류 탈락감 회사에 3천억을 땡겨? PF투자는 또 뭔데? 이딴 회사에 2천억짜리 자금 조달을 해 줘?
⌞오너가 쥐고 있는 회산데 당연히 프리패스지ㅋㅋ
⌞영인컴퍼니 벌인 사업들 보면 그것만 특혜 받은 게 아닌 것 같음. 배후는 분명 더 있다.
뉴스 보도로 그간 따라 다녔던 편파 조사 논란은 완전히 사그라졌다. 도리어 영인컴퍼니가 어떻게 그리 알짜배기 부동산만 취득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만 커져 갔다.
건설업과 정치권의 야합은 늘 있는 주제였으니. 조사 규모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었다.
이튿날엔 한명투자의 탈출 러시가 본격화되며 주가가 하한가로 마무리되었다. 이와 함께 최기석 테마주엔 모두 시퍼런 파란불이 켜졌다.
“이런 육시랄!”
최기석은 수인복을 찢어 버리며 괴성을 질러 댔다.
사건 터지면 잠시 주춤하는 그런 수준의 주가 하락이 아니다. 테마주 동반 하락은 주주들이 자신에 대한 기대감을 접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구치소에 갇혀 있었지만 그는 실시간으로 싸늘한 여론의 반응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이 사건은 자신과 큰형의 경영권 분쟁이 아닌, 오롯이 자신의 비리 사건이 되었다.
“오성규가 자백을 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그놈이 날 어떻게 배신해!”
“공정위에서 오 사장 약점을 쥐고 흔들었다고……. 애인 문제까지 거론했답니다.”
최기석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상무님!”
아무리 냉혹한 경영권 분쟁이라 한들 남자의 배꼽 아래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공정위가 해당 사실을 그냥 알게 되진 않았을 터. 필시 배후는 큰형이다. 진짜로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끝장을 보자는 건가.
임원진이 전부 달려들 때, 그가 세차게 뿌리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마! 고작 이 문제 하나 해결 못 한 놈들이 무슨 낯짝으로!”
“죄, 죄송합니다.”
“송 변호사만 남고 모두 나가. 그리고 자네들은 오늘 당장 가서 사표 제출해. 밥값도 못하는 얼간이들은 내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
사표는 제출하나 마나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장남이 모든 경영권을 가져가면 동생들 측근부터 정리해 버릴 것이니.
어두운 얼굴로 모두 사라지자, 송 변호사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고정하십쇼, 상무님. 아무래도 구속까지 되다 보니 안팎에서 동요가 심했던 모양입니다.”
순순히 구속을 받아들인 게 패착이었을까. 어떻게든 바깥에 남아서 자신의 건재를 확인시켰어야 했는데.
“어설픈 위로는 그만하시게. 말 못 들었어? 애인 문제까지 거론하며 흔들었다잖아. 내가 있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사실 그 부분은 저도 예상 못 했습니다. 부회장이 이렇게 비겁한 수를 쓸 줄은…….”
최 상무는 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앞으로의 상황은 어떻게 되지?”
“승산이 많이 없습니다. 오 사장이 자백해 버렸으니, 다른 증거를 제시하지 않아도 영인컴퍼니는 상무님 소유라는 게 입증될 겁니다.”
“그에 대한 혐의는?”
“불법 대출 및 금산 분리 위반 행위 모두 적용될 겁니다.”
최기석은 마른침을 삼키며 절대로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을 꺼냈다.
“형량은……?”
“검찰에서 5년 구형하겠다고 하는데……. 1심에선 이를 그대로 선고할 가능성이 큽니다.”
“혹시 3심까지 끌면……?”
“여론이 잠잠해졌다 해서 형량이 낮아지진 않을 겁니다. 사실상 3심은 단념하는 게 좋습니다. 하루빨리 대중들 뇌리에서 이 사건을 지우는 게 급선무니까요.”
제아무리 기를 써도 실형을 피할 방법이 없다.
실형을 살고 있는 사이 한명그룹을 전부 장악해 버리는 형의 얼굴도 그려졌다.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은 지금이라도 자백하고 선처를 바라는 겁니다. 제가 잘 조율해서 1년이라도…….”
“실형 4년이나 5년이나 내게는 큰 의미 없어. 어차피 형이 경영권 장악하는 데엔 충분한 시간 아니야?”
“그건 그렇습니다.”
최기석은 젊은 과장 놈의 얼굴을 떠올렸다.
선처를 바란다고 해 줄 놈도 아니다. 그놈이 큰형을 어떻게 털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지 않은가. 난다 긴다 하는 유력 정치인들이 눈치를 줘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놈이다.
“그럼 진짜로 마지막으로 쓸 수 있는 카드는 그 방법뿐입니다.”
“전관?”
“네. 되도록 공정위 출신 전관들 섭외해서 회유에 들어가겠습니다. 동정을 구하든 협박을 하든 구형을 낮추는 게 우선이죠. 이와 함께 재판도 전관 법조인으로 구성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좋은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최기석은 침통한 얼굴로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 방법이라도 써 보자. 최대한 공정위 압박해서 내 형량 하루라도 줄여 봐. 나도 이 경영권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