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78
278화
금산 분리 위반 (7)
유 국장은 밤낮없이 걸려 오는 전화에 지쳐 아예 핸드폰을 꺼 놓고 있었다.
한명그룹의 위엄이 실감 난다. 뉴스 보도가 나간 이후 유력 정치인부터 얼굴도 잊은 대학 선배까지 수시로 전화를 해 대고 있었다.
모두들 무슨 목적인지 알았기에 특별히 더 몸조심하는 그였다. 일선에서 뛰고 있는 준철을 따로 부르지도 않았고, 대면 보고도 피했다. 상사의 눈짓, 몸짓 하나에 실무자들이 어떤
부담을 느끼는지 아니까.
하지만 그에게도 피할 수 없는 자리가 있었다.
“국장님, 두 분 지금 오셨습니다.”
“같이 왔어?”
“예.”
“오래 살고 볼 일이구먼. 위원장 자리 두고 박 터지게 싸우던 양반들이.”
“불편하시면……. 적당히 둘러댈까요?”
“됐다. 그냥 오늘 단도리 하는 게 나아.”
은퇴 후 찾아온 선배 둘의 방문이었다.
두 사람은 한때 공정위원장 자리를 두고 다툰 라이벌이기도 했으며, 유 국장의 선배이자 상사이기도 했다. 얄팍한 인연을 팔아 이 자리에 찾아 온 건 그리 좋지 않은 징조다.
무심한 얼굴로 기다리니, 선배 두 사람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왔다.
“에그머니나. 이게 얼마 만인가, 유 국장.”
“안 본 세 신수 훤해졌구먼.”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과장 섞인 환대를 보아하니 이미 한명그룹에 재취업을 했나 보다.
“어서 오십쇼. 오랜만에 선배님들 얼굴 뵈니 좋네요.”
“예끼 이 사람아. 미리미리 연락 좀 하지 그랬어. 자네처럼 유능한 사람이 왜 종합국 국장이야.”
“우리한테 미리 연락했으면 말년은 본청 기획실에서 편안히 보냈을 텐데 말이야.”
과장은 아니다.
두 사람은 한때 공정위원장 자리를 넘봤으며, 조직에서 20년을 몸담은 원로들이다. 은퇴한 지 겨우 3년도 안 된, 소위 말하는 아직 끗발 남아 있는 선배들이었다. 전화 한 통이면
사람 하나 끌어올리는 건 식은 죽 먹기다.
“하하. 전 이 자리 만족합니다.”
“만족은 무슨. 타 부처 뒤치다꺼리하는 게 종합국인데, 자네처럼 유능한 사람이 있음 쓰나.”
“아이고 선배님, 저도 은퇴가 코앞인데 이제 와 자리 욕심 내 뭣하겠습니까.”
“은퇴가 끝이 아닐세. 이젠 인간이 이백 살까지 산대. 자네도 은퇴 후 생활 계획은 해야 할 게 아닌가.”
선배들이 오늘의 용건을 암시해 주자 오히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설마 오늘 제 취업 자리 때문에 오신 겁니까?”
“계획은 해 두라는 거지. 나도 현직에 있을 땐 몰랐는데, 막상 정년이 닥쳐 보면 정말 까마득하더라고.”
“그럼 선배님들은 재취업하셨고요?”
“아직 취업 제한 3년을 다 못 채워 적을 둔 곳은 없지. 근데 이리저리 오라는 곳은 많네.”
“혹시 거기가 한명그룹입니까?”
선배들은 노골적인 물음에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뭐 피차 사정 알 테니 긴 말 안 하겠네. 유 국장, 사람이 너무 단단하면 부러져. 눈 한 번 딱 감고 적당히 타협하는 게 어떻겠나?”
“이번 한명투자 건은 우리가 봐도 문제가 많은 비리였어. 근데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란 말도 있잖나.”
“저에게 원하시는 게 뭘까요?”
예상보다 호의적인 반응에 두 사람의 얼굴이 상기됐다.
“적당한 처벌.”
“적당한이라…….”
“구형 5년은 너무 세. 안 그래도 지금 안팎에서 한명그룹 경영권 두고 얼마나 뒷말이 많은데.”
“흠…….”
“여기서 차남 매장시키는 건 사실상 공정위가 장남 편에 서겠다는 거야.”
“왜 아니겠어. 이건 형제간의 경영권 다툼에 공정위가 이용당하는 거야. 실형 5년? 사실상 차남을 제치겠다는 거지. 손에 피 묻히지 마. 싸움은 두 놈이 알아서 하게 두고 공정위는
심판 역할만 하라고.”
유 국장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선배님들이 생각하는 적, 당, 한 처벌은 어느 정도인데요?”
“뭐 그런 거까지 우리 입으로 할 얘기는 아니지만……. 구형 5년은 좀 세지 않나?”
“한 3년이면 그래도 공정위가 편파 조사를 했다는 뒷말은 나오지 않을 게야.”
그게 최기석에게 받은 지령인가 보다. 살짝 동조해 주자 침 넘어가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아니면 집행유예로 적당히 끝내서…….”
“그만. 그만 듣겠습니다.”
“뭐?”
“선배님, 그런 말씀하시면 안 부끄러우십니까. 이미 확인된 불법 대출과 투자가 3천억을 넘었습니다. 영인컴퍼니 실소유주가 차남이란 것도 밝혀졌고요. 명백한 금산분리 위반 행위에
집유? 이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선배들이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이대로 공정위 위신을 다 깎아 먹자는 게야?”
“현 상황에서 공정위가 장남 편 들면, 네들이 붙어먹은 거라고. 왜 볏짚 들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거기 경영권 분쟁하는지 몰랐어?”
“그게 이 사건과 무슨 상관입니까. 혐의가 이미 다 확인 됐는데.”
“자네는 정당하다 생각할지 몰라도 제3자는 아니니까! 뭐 쪽팔리게 내가 전관예우 받자고 실무자들한테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거 아니다. 근데 진지하게 생각해 봐. 경영권 분쟁에
공권력 이용하는 게 맞아?”
유 국장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신빙성 있는 제보가 왔고, 그게 또 확인됐는데 그럼 어쩌겠습니까?”
“아, 아니 이 사람이…….”
“그게 누군가의 이득이 된다고 처벌 수위를 낮추면……. 그거야말로 편파적이고 정치적인 겁니다.”
“유 국장!”
“선배님,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말라고 가르치신 게 두 분이십니다. 이제 와 후배 얼굴 보기에 부끄럽지 않습니까?”
유 국장은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뒷모습을 보인 건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그 뒷모습을 노려보더니 툭 쏘아붙였다.
“자네가 요상한 자리에 앉더니 변했구먼.”
“…….”
“듣자하니 이거 담당자가 여간 꼴통 새끼가 아니라지? 그놈이 그 전직 국장 모가지 날려 버린 놈이잖아. 분수도 모르고 설치다가.”
뒤돌아선 유 국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방금 선배들이 꺼낸 얘기가 곧 자신에게 경고를 날리기 위함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 전임자 꼴이 자네라곤 예외가 아닐 거야. 처신 조심 할 게야.”
“…….”
“내 참. 사람 진짜 치사한 놈으로 만드는구먼. 누가 보면 우리가 기업들 청탁 전하러 온 브로커들인 줄 알겠어.”
“…….”
“부디 현명하게 생각하고 처신하게. 이런 기회는 두 번 오지 않아.”
유 국장이 끝끝내 돌아서지 않자 선배들은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서 있길 한동안.
슬쩍 뒤돌아서니 선배들이 떠난 자리엔 얇은 봉투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백지수표라……. 허허.”
최기석이 보낸 백지수표였다. 유 국장은 한 치의 고민 없이 찢어 버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
-다음 소식입니다.
영인컴퍼니 실소유주가 확인된 가운데, 최기석 상무의 병보석이 거부되었습니다. 당초 어렵지 않게 허가를 받아 낼 거란 예상과 달리, 법원에서 모두 거절한 건데요.
공정위가 실소유주를 밝혀 내며, 그간 영인컴퍼니를 거쳐 갔던 모든 사장들이 줄줄이 입국하고 있습니다.
측근들은 줄줄이 소환당해 자신을 배신했고, 마지막으로 믿고 있던 전관 카드도 먹히지 않았다.
법원에 신청한 병보석이 불허되자 최기석은 완전히 전의를 잃고 말았다. 강력한 처벌을 내리겠다는 법원의 의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가는 퍼포먼스를 보였지만 되레 기자들의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재 영인컴퍼니를 거쳐 간 임원들이 모두 자백했습니다. 영인컴퍼니는 본인 소유가 맞습니까?
-불법대출에 대한 의혹이 모두 사실입니까?
-이 밖에도 다른 소유의 회사가 있습니까?
최기석은 수모란 수모는 다 당하며 다시 구치소로 돌아오게 되었다.
준철은 측은한 얼굴로 그에게 위로를 건넸다.
“유감입니다, 병보석 거부는.”
의외였다. 오만 표독을 다 떨 줄 알았는데, 최기석은 세상 무너진 얼굴로 구치소에 앉아 있었다.
혀 깨물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자신의 최측근이 배신한 것은 물론, 줄줄이 다 소환되고 있으니.
“사실 이제 정황은 다 완성됐습니다. 측근들의 자백이 나왔으니, 저희가 따로 증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죠.”
“…….”
“이제 마지막 퍼즐만 남았습니다. 이 회사, 본인 소유인 거, 그리고 금산분리 위반 행위 일체 모두 인정하십니까?”
최기석은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목메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 대답하기 전에……. 나도 하나 물어봅시다.”
“말씀하세요.”
“큰형이 정말 내 임원들 사생활 자료까지 제보했나? 내 목을 치라고?”
“그럼 제가 유도신문을 했다 보십니까?”
“아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큰형 또한 이런 문제에 있어 깨끗한 사람은 아니거든.”
준철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부회장이 제보한 게 맞습니다.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그게 아니라면 공정위가 이런 치부까진 알 수 없겠지.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진실을 말해 줘도 납득을 못 할 것이다.
“하나만 더 물읍시다. 내 형량은 어떻게 되는 거요?”
“아마 다 충분한 설명을 들으셨을 겁니다. 들으신 내용 그대로 될 겁니다.”
“실형 5년이라……. 하하. 한명건설은 그 안에 그 양반이 차지하겠구먼.”
실성한 건지 놈이 크게 웃어 젖혔다.
“인정하리다. 모든 혐의 다. 그리고 형량도 마음대로 부르쇼.”
3천억을 가지고 논 대가가 고작 5년.
일반 사람들 기준으론 한없이 작은 금액이다. 하지만 한 때 한명그룹 경영권을 넘봤던 이에겐 이만한 형량도 없다.
준철은 조서를 내밀었다.
“형량을 조금 줄여 볼 방법이 있긴 한데…….”
“줄여?”
“당한 만큼 갚아 주십쇼. 당신이 아는 내용을 우리 쪽에 제보하면 어느 정도 참작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제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최영석이 어떠한 비리를 저지르고 살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증거가 없으며, 증거가 없으면 조사도 진행할 수 없다.
가장 가까이서 견제했던 그라면 이에 대한 증거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제발 내 뜻에 따라 주기를…….
하지만 놈의 입 밖에서 나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젊은 과장, 이간질시키려는 수작은 그만두시게.”
“……네?”
“당신 입으로 큰형 소행이라 했지만 난 그 말 믿지는 않아. 큰형은 내가 더 잘 알거든. 절대 임원들 사생활 캐서 나 묻으라 하진 않았을 거야. 물론 자네가 어떻게 그 내용을
알았는지는 나로서도 모르겠지만.”
역시 호락호락한 놈은 아니구나.
김성균으로 살 때도 가장 신경 쓰이던 놈이었는데.
“당신이 아무리 이간질해도 난 큰형 안 팔아. 내 입에서 나올 말은 없어.”
말은 그리했지만 눈빛은 이미 복수심에 타오르고 있었다.
당연히 이 말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의심은 가나 아직 결정적인 한 방이 없으니 협조를 못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아쉽게 됐네요. 이대로 당하는 수밖에.”
“…….”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근데 큰형한테 이렇게 경영권 쉽게 빼앗기면 어디 억울해서 살겠어요? 어차피 재판까지는 깁니다. 그때 생각해 보세요.”
준철은 그리 말하며 자리를 떴다.
아직 재판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다. 형제간에 불신의 씨앗을 심어 놨으니, 앞으로 더 많은 의심을 할 것이다.
구태여 놈을 재촉하지 않았다. 한창 의심이 싹 텄는데 다그치면 반감만 생길 것이다. 다 된 밥을 뜸 못 들여 망치는 건 억울한 일이지.
이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