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8
28화
YK암보험 (2)
“자료가 좀 중구난방이에요. 과장님이 요구하신 자료가 워낙 많아서.”
“아닙니다. 정리는 저희가 해야죠.”
“일단 과장님께서 요구한 내용은 다 들어 있다 보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웃는 얼굴로 대답했지만 준철의 속내는 복잡했다.
홍 팀장이 준 자료는 중구난방이 아니라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치료법에 대한 의학계 입장, 타 보험사 분쟁 사례, 비슷한 판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이 자료들에서 실마리를 찾는 게 첫 과제가 될 것이다.
“근데 이 팀장님.”
“네. 말씀하세요.”
“찾다 보니 가입자 쪽에 불리한 자료가 하나 나왔는데.”
홍 팀장은 난처한 얼굴로 한 서류를 가리켰다.
“알아보니 10년 전에 대법원 판례가 있었더군요. 이것도 유경생명에서 당한 소송이에요.”
“판례요?”
“예. 요양치료를 ‘필수치료’로까진 볼 순 없다…… 이게 10년 전 대법 판례로 남아 있습니다. 유경생명에서 지급비 거절한 것도 다 이 판례를 근거로 했어요.”
준철은 그가 내민 서류를 받아 들었다.
확실히 가입자 쪽에 불리한 판례였다. 대법원은 요양치료가 필수치료가 아니라고 명시한 바 있다.
“해서 만약 저희가 유권해석을 내리면…… 보험사에서 대법 판례 가지고 따질 수 있겠습니다.”
그가 우려를 내비치자 준철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이 판례가 저희한테 더 유리할 수 있어요.”
“유리하다고요?”
“네. 벌써 10년 전에도 이 문제 가지고 대법원까지 갔는데, 유경생명이 약관 개정 안 했잖아요.”
“아…… 그럼 유경생명이 방치했다?”
“네. 요양치료가 필수가 아니라면 특약으로 설정하거나, 약관에 요양치료는 안 된다고 명시했어야죠. 지금은 오히려 이게 저희한테 유리합니다.”
보험사 약관은 늘 분쟁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문제 될 때마다 싸우고, 개정하고, 특약이 생기고 하는 과정이 있다. 이 책임은 전적으로 보험사의 몫.
한데 10년 전에 대법원까지 갔으면서도 약관에 명시를 하지 않았다?
이건 분쟁의 여지를 알면서도 개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 말씀하셨다시피 암은 발병 부위마다 천차만별이에요. 근데 10년 전 판례 보니까 치명 부위는 아니었네요. 이러면 별개 사안으로 따져야죠.”
준철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내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보니까 이 팀장님이 투지 넘치시네. 검토하고 부족한 거 있음 이 번호로 직접 연락 주세요.”
홍 팀장은 젊은 팀장이란 우려를 말끔히 지웠다.
판례가 나와 자신도 절망했는데, 그 판례의 허점까지 파고들다니. 자기가 하는 말은 조언이 아니라 잔소리가 될 거다.
그렇게 그가 나가고 나자 준철이 책상에 앉아 고심했다.
‘……복잡하긴 하네. 유권해석을 함부로 내릴 순 없겠어.’
판례를 역이용할 수 있다는 거지, 판례가 유리하다는 건 아니다.
요양치료는 필수치료로 볼 수 없다. 아마 이 판결문 한 구절이 사건 해결 내내 따라다닐 것이다.
준철은 곧 서류를 들었고 유리한 자료와 불리한 자료를 선별하기 시작했다.
최 과장 말대로 이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누구나 약관을 외우는 경지에 이른다.
과거 김성균은 이 약관을 외우는 정도가 아니라, 작성을 하는 사람이었다.
은퇴한 금감원, 공정위 전관(전직관료)들한테 수많은 자문료 바쳐 가며 쓰는 게 이 약관 아닌가?
경험을 토대로 자료를 파고드니 눈에 밟히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YK암보험은 부지급률이 2%를 육박했는데, 이는 업계 평균인 1%대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비급여 항목 때문에 분쟁을 겪은 횟수는 한 해 800여 건이었고, 그중 600여 건은 YK에서 가입자에게 소송을 걸었다. 이 또한 업계 평균치인 300건을 훌쩍 넘는다.
YK암보험에서 치료비를 전액 보장받은 비율이 20%였는데, 이는 말기 암 환자 평균 생존율(30%)보다 낮았다.
암보다 암보험이 더 무서웠던 것이다.
‘독종이네.’
그렇게 서류를 탐독할 때.
“으악-!”
갑자기 찢어질 듯한 두통이 엄습하며 머릿속이 까마득해졌다.
불명의 대화가 들리는 증상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
“지급권고라, 지급권고…… 어떻게 생각해 다들?”
흰머리의 한 노년 사내가 회의석 중앙에 앉아 있었다.
“편하게들 말해. 그러라고 부른 자리야.”
사내가 재차 말하자 회의실이 금방 불타올랐다.
“사장님. 금감원의 지급권고는 사실상 1차 선고입니다.”
“행여나 우리가 재판까지 진행하다 언론에 나가면…… 그땐 가입 실적이 바닥을 칠 겁니다.”
“그냥 지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석호 사장은 일말의 웃음기 없이 표정을 굳혔다.
노골적으로 뜻을 드러낸 거나 다름없지만, 임원들의 성화는 더욱 커졌다.
“외람되지만 사장님. 이참에 저희 보험약관을 전면 대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면 개정?”
“예. 작년 저희 YK암보험 부지급률이 2%로 업계 최다입니다.”
“가입자가 제일 많은 암보험인데, 당연히 똥파리도 제일 많은 거 아니야?”
“그 변명 뒤로 벌써 6년을 숨었습니다. 이젠 저희도 근본적인 대책을 내놔야죠. 이번 기회에 분쟁이 많은 약관 내용 개정하고 부지급률 낮춰야 합니다.”
임원 하나가 기어코 터부를 건드리자 한 사장이 돌발행동을 보였다.
‘ㄷ’자 회의실 정중앙으로 갑자기 서류를 내던진 것이다.
“우리 임원들이 그런다면야 지급해야지. 그럼 이제 재원 어떻게 마련할지 다들 말해 봐.”
“…….”
“앞으로 요양치료 지원하려면 200억은 들 거고, 그간 시간 끌어서 합의한 놈들은 소급 적용해 달라고 달려들 거고. 넉넉잡고 한 300억? 이거 어떻게 마련해야 돼?”
“아무래도 보험료 인상이 불가피…….”
“인상은 얼어 죽을. 그거 말고 제일 쉬운 방법 있잖아. 왜 그 말 안 꺼내?!”
이 자리에서 그게 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 전무, 자네 밑으로 임원들 사직서 받아 와.”
“예?”
“엄한 돈 나가게 생겼는데 구조조정해야 할 거 아니야. 아닌가? 박 전무는 가만있었는데, 우리 말 잘하는 심 전무가 가져와야 하나?”
“사장님. 저희 말은 그게 아니라.”
한 사장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임원들의 낯빛이 바뀌었다.
“거봐. 다들 밥그릇 내놓으라면 못 할 거면서 왜 남의 돈은 쉽게 내자고 해?”
“…….”
“내가 그냥 싸우라는 것도 아니야. 우린 10년 전에 받은 대법 판례도 있어. 요양치료는 필수치료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사장님. 암은 발병 부위마다 천차만별이라 판례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깊게 따지고 들면 저희가 불리할 겁니다.”
“그럼 늘 하는 거 있잖아, 시간 싸움! 어차피 얘기 복잡해지면 나가떨어지는 건 그놈들이야! 내가 치사하게 이거까지 알려 줘야 돼?!”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이제는 이의 제기를 하는 임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방금 사표 가져오라는 말에 모두 눈길만 피하지 않았나?
임원들의 조용해진 입은 이미 회의가 끝났다는 걸 말해 주었다.
한 사장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제일 골치를 썩였던 심민석 전무를 봤다.
“자네는 내일 안으로 사표 가져와. 앞으로 대안 없이 반대만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정도 각오는 해야 할 게야.”
그 말을 끝으로 불명의 대화는 끝이 났다.
아마 그 회의가 마지막 회의였을 것이다.
사장님이 공개적으로 사표를 받는 건, 재론하지 말란 명령이니까.
***
“뭔진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건 금감원이랑 얘기해. 보험약관? 솔직히 우리 애들도 몰라. 그건 전문가들끼리 해야지.”
오 과장은 예고도 없이 방문한 최 과장이 반갑지 않았다.
종합감시국이 아무리 토탈 부서라 해도 기피 부처가 있다. 약관심사과는 얼굴만 봐도 질린다.
“안 반가운 건 아는데, 그래도 손님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손님은 무슨. 또 뭔데?”
“흐허허. 역시나 종합국이 일을 만들어서 할 위인들이 아니지. 그놈이 혼자 찾아왔구먼.”
“뭐?”
“나야말로 피해자야. 안 그래도 일 많은데 왜 갑자기 폭탄을 가져와?”
오 과장은 경계하다 최 과장이 내민 서류를 들었다.
첫 장만 확인했을 뿐인데,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말았다.
“아니 이게 무슨…….”
“자네 밑에 팀장 하나 있지. 이준철이라고. 이거 그 친구가 가져온 거야.”
“이 팀장이? 난 오더 내린 적이 없는데?”
“직권조사했대. 수상해서 딱 하나 가져와 봤는데, 월척이더라고.”
오 과장은 속사포처럼 서류를 넘겼다.
“이거…… 뭐야?”
“YK암보험. 요양치료가 필수냐 아니냐로 몇 년씩이나 싸우고 있더라고.”
“그거 말고. 금감원 권고 어겼다는 거 사실이야?”
“완전히 어긴 건 아니고 교묘하게 빠져나갔어. 시한부 환자랑 시간 싸움하면 누가 이기겠나?”
“…….”
“이놈들 그거보다 더한 짓도 많이 했어. 들여다보니까 문제 될 거 많데.”
“근데…… 여기 대법원 판례가 나왔네? 10년 전에 유경생명이 이겼어?”
“그것도 깊게 들어가면 복잡해. 암은 발병 부위마다 천차만별이라지 않나. 우리가 섭외한 사람들 얘기 들어 보면, 이젠 암도 요양치료 필수래.”
최 과장의 말을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얼마나 골치 아플지는 벌써 예상이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폭탄 배달당한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데?”
“요란법석 떨 생각 없으니까 그 친구만 파견 보내.”
“이준철이만?”
“응. 우리도 유권해석만 내리고 금감원에 보낼 거거든. 그럼 금감원에서 중징계 때릴 명분 돼.”
말은 쉽게 했지만 정말 지옥 같은 여정이 될 것이다. 공정위의 유권해석을 막으려고 전 보험사가 달려들지도 모른다.
고민에 휩싸인 오 과장에게 최 과장이 슬쩍 파견서를 내밀었다.
“당연히 해 줘야 할 일인데 뭘 이렇게 고민해? 딱 2개월만 이 친구 쓰자.”
“……할지 안 할지가 아니라 이놈이 적임자인지 고민하는 거야. 그럼 그냥 경험자 데려가는 게 어때?”
“촌스럽게 경험 타령은 무슨. 사건 들고 온 게 그놈이야”
“나도 이 나이 때는 얻어걸린 거 많아. 소 뒷걸음질 치다 쥐 한 번 못 잡겠어?”
“이게 어떻게 뒷걸음질이야? 쥐구멍 어디 있는지 찾아내서 물어 왔구먼. 그냥 줘, 부족한 부분 있으면 내가 채우면 돼.”
오 과장은 대답 없이 한숨만 쉬었다.
정말 미친놈 아닐까?
약관심사과에서 지원 요청이 오면 과장들은 갖은 핑계를 대 거절해 준다.
여긴 껍데기만 공정위지, 실상은 금감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민원이 발생했을 때, 어쩔 수 없이 한 번 해 주는 게 바로 약관심사다. 근데 이걸 직권조사해 버리다니.
오 과장이 대답을 주저하자 최 과장은 손을 덥석 잡아 버렸다.
“고마워, 오 과장.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내일 당장 금감원에 공문 보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