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80
280화
합병 심사
한솔테크.
국내 최고의 바닥재 회사로 점유율 40%를 자랑하는 중견기업이다. 세간에선 아파트는 한명, 인테리어는 한솔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다.
갖가지 특허를 보유한 한솔은 특유의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한때 시장 점유율 70%를 자랑한 적도 있었다.
전도유망한 기업의 매출이 반 토막 난 건 대기업이 돈 냄새를 맡기 시작한 직후다.
알짜배기 사업에 눈독 들이던 한명건설은 ‘책임 시공’을 선언하며 본격적으로 내장재 사업에 뛰어들었다. 아파트를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테리어 사업까지 독점하겠단 심보였다.
제아무리 내장재 1등 기업이라 해도 거대 기업의 횡포 앞엔 맥을 추지 못했다.
한명건설은 따내는 수주마다 자사 기업에 일감을 줬고, 한솔테크는 일감 몰아주기 신고로 이에 맞섰다.
두 기업이 피 터지게 싸워 대며 공정위를 들락거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기적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한명건설의 노골적인 일감 몰아주기에 한솔테크의 시장점유율은 현저하게 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업계 1위 타이틀도 반납하게 되었다.
“무례하구먼. 오늘 같은 자리엔 부회장님이 직접 나오셔야 되지 않나?”
“아이고- 한 회장님, 저희 사정 아시지 않습니까. 언론에서 다 동생 팔아먹은 형이라고 욕해 대서 동네 슈퍼도 못 나가십니다.”
“동네 슈퍼는 못 가도 인수 합병 회담장엔 나와야지. 그냥 마지막까지 이 늙은이 얼굴 보기가 싫은 거 아닌가?”
“그럴 리가요. 부회장님께서 사과의 말씀 전해 달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더 이상의 기싸움은 필요 없다. 어차피 오늘은 항복 선언하는 날이니.
한명수 회장은 한명건설 임원진들을 쓱 훑더니 말했다.
“앉으세.”
“예.”
좌우로 갈라진 양측 임원진들 사이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양측은 수십 년 내리 피 터지게 싸웠으며, 최근엔 지분 확보 문제를 가지고 신경전을 벌인 전력이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문 한 회장이 먼저 말했다.
“감회가 다 새롭구먼. 내가 오 사장이랑 차를 다 마시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서로 멱살 쥐었던 그땐가?”
“하하. 예. 회장님께서 저흴 일감 몰아주기로 신고하셨죠.”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이가 갈려. 한명건설은 대체 공정위에 뿌린 돈이 얼마기에 그걸 정당 경쟁으로 판단한다는 거야?”
“아이고- 그거 돈으로 이긴 거 아닙니다. 정말 법대로 싸운 거예요.”
그걸 믿으라고?
한 회장은 혀를 끌끌 찼다.
“자네들은 지독했어. 아파트 분양 따내는 족족 다 일감을 몰아줘 버리니, 당해 낼 재간이 있나.”
“회장님도 독하셨습니다. 그 돈을 다 때려 박았는데도 한솔의 점유율 40%는 못 무너트리겠더군요.”
“오 사장이 아부도 할 줄 아는구먼. 적장에 대한 예운가?”
“동종 업계 선배에 대한 존경심입니다. 진심으로 대단하셨습니다.”
30년간 지켜 온 인테리어 1위 회사가 오늘 무너진다. 인수 합병 사인 한 번으로.
피 터지게 싸웠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지금 이 늙은이의 투정은 애교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돈 얘기 들어 보면 알겠지. 말해 보게, 우리 지분에 값을 얼마나 쳐줄 겐가.”
오 사장은 일체의 망설임 없이 서류를 내밀었다.
“지분 24% 전량 매입. 2조 3천억입니다. 매입 방식은 블록딜이고요. 상기한 날짜 안에 모든 돈은 입금될 겁니다.”
“뭐라? 2조 3천?”
“예. 이 정도면 성의 표시가 됐겠죠?”
한 회장은 놀란 얼굴을 애써 감췄다.
현재 상장된 지분 가치는 고작 1.6조 원대. 아무리 경영권 프리미엄이 붙는다 한들 7천억은 과해도 너무 과한 금액이었다.
“한명건설이 급하긴 급하구먼. 고작 이 회의실 한 칸 차지하는 건데 7천억을 더 써?”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회사니까요. 저흰 한솔테크의 잠재력이 그 이상일 거라 생각합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한명과 한솔의 시장점유율은 각각 40%대로, 이는 두 회사가 합병 시 한쪽이 시장을 독점할 수 있단 얘기가 되었다.
“우리 회사의 잠재력이 아니라, 독점 시장의 잠재력 아닌가.”
“너무 고약하십니다, 회장님. 값도 꽤 후하게 쳐드렸는데.”
“아무렴 좋아. 돈 받고 물러나는 입장인데 후하게 쳐주면 좋지. 그리고 그때 말한 그 조건은?”
“당연히 들어드립니다. 인수 합병 후에도 한 회장님을 명예 회장님으로 추대할까 합니다.”
이에 한솔테크 임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한 회장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건 곧 자신들의 자리도 당분간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저희는 점령군 행세할 생각 없습니다. 한솔테크가 가진 독보적 기술력과 인력 자원 모두 존중합니다.”
모든 조건이 너무 완벽하다. 이젠 한 회장의 사인만 남았다.
“좋구먼. 아주 흡족해.”
“네. 서로에게 윈윈이죠.”
“내가 여기에 사인하면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오 사장이 군침을 흘리며 펜만 바라볼 때, 갑자기 한 회장이 고개를 휙- 돌렸다.
“가만. 이 중차대한 얘기에 내가 임원들 의견을 안 들어 봤구먼.”
“……예?”
“추 사장, 한명건설에서 2조 3천을 제시했는데, 이 가격에 넘기는 게 맞나?”
부름을 받자 옆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한명건설이 저흴 너무 얕잡아 보네요. 이 가격은 헐값입니다.”
“허, 헐값이라뇨. 추 사장님, 무려 7천억이나 더 드렸습니다. 경영권 프리미엄 감안해도…….”
“이 경우엔 경영권 프리미엄이 아니라, 경쟁자 제거 프리미엄이 붙어야 맞겠죠?”
“예?”
“회장님, 두 회사 합병 시 국내 내장재 점유율은 HM인테리어가 80%나 독점하게 됩니다. 앞으로 내장재 공사는 부르는 게 값이 되겠죠.”
“추 사장님!”
“뿐이겠습니까. 이런 가시적인 성과를 근거로 최영석 부회장은 이사회를 열고 단숨에 회장 자리에 앉을 겁니다. 그럼 경영권 프리미엄에 더해 백기사비도 저희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 사장은 웃음을 거두고 건조하게 말했다.
“지금 저희 간절함을 이용해서 값을 더 흥정하겠다는 겁니까?”
“촌스럽군요. 이런 자리에서 감성팔이라니.”
“뭐? 감성팔이?”
“오 사장님, 한명건설이 내장재 진출할 때 우리도 간절하게 부탁했어요. 제발 서로 밥그릇 침범하지 말라고. 근데 그 간절한 부탁 들어주셨습니까?”
오 사장은 받아치려다 말고 한 회장의 얼굴을 살폈다.
신선놀음 구경하듯 흡족하게 웃고 있는 얼굴. 상황 돌아가는 꼴을 보니 추 사장 놈이 이 늙은이의 마음의 소리인 것 같았다.
어쩌면 사인하기 전에 이런 상황극을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추 사장님은 돈의 가치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이군요. 2조 3천억이면 우리가 직접 지분 매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길 바라십니까?”
“흥, 적대적 인수 합병? 절대 그 가격으론 안 될 텐데.”
“못 할 것도 없지요.”
“허세가 심하십니다. 최영호 회장님 타계 이후 지금 국세청이 한명그룹만 바라보고 있답디다. 부회장님 상속세 내려면 신용 대출까지 당겨야 한다죠? 당신들이 진짜로 돈으로 우릴 살 수
있겠어?”
역시나 대본이 맞다. 준비한 말인 게 확 티가 났다.
“그래서요? 우리랑 계속 경쟁하실 겁니까?”
오 사장도 한솔테크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지금 한명이나 한솔이나 시장 독점하려고 계속 출혈 경쟁 하는 거 아니오. 언제까지 서로 적자 보면서 시공할 생각이오.”
“우린 꽤 여유가 있어요. 한명건설이 상속세 때문에 총알 많이 떨어질 텐데.”
“이런. 오늘 얘기하러 나온 게 아니구먼.”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날 때, 한 회장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추 사장, 그 무슨 무례한 말이야. 같은 재벌 총수끼리 상속세를 함께 슬퍼해 줘야지. 아픈 자리에 염장까지 지르면 쓰나.”
“……죄송합니다.”
“오 사장, 결례를 용서하시구려. 원래 돈 오가는 얘기하다 보면 이런저런 얘기 나오는 거지.”
“됐습니다. 이미 합병할 의사는 없…….”
“받아 가게. 여기 내 사인이니.”
한 회장은 부지불식간에 사인을 휘갈겨 서류를 내밀었다.
예상치도 못한 기습이었다.
“아니 이건…….”
“아, 얼른 받아가. 인수 합병 안 할 거야? 노인네 손 떨어져.”
엉거주춤 받아 가기도 잠시.
잡기 직전에 그가 손을 뺐다.
“대신 한 가지 약속은 꼭 지켜 줘. 나를 명예 회장으로 앉히고 우리 임원진들 자리 보장하겠다는 내용.”
“……예?”
“허울만 씌워 놓고 여기 내부 분탕 칠 속셈이라면 단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딱 5년. 우리 체제 보장하고 그 뒤엔 당신들 마음대로 쓰게. 이게 내 마지막 조건이야.”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자리 보장을 정확히 약속받기 위해 막판에 심통 한번 부린 것이다.
“네……. 꼭 그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오 사장님. 제가 결례가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계열사’로.”
경쟁사에서 단숨에 계열사가 되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악수하는 것으로 인수 합병 논의가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
“말 꺼내길 잘했지?”
“네. 표정을 보니 꽤 당황했던 것 같군요. 딱 봐도 점령군처럼 임원들 물갈이 다 진행할 생각이었나 봅니다.”
“고얀 놈들. 어디 늙은이를 속여. 뭐? 적장이 아니라 업계 선배? 하하.”
회담을 마친 뒤.
한 회장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않나. 한명건설은 치가 다 떨릴 정도로 일감을 몰아줬고, 자신들을 말려 죽였다.
공정위 관계자를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일감 몰아주기 신고도 안 먹혔다.
법조계, 정치계 꽉 잡고 말려 죽인 놈들이 진짜로 점령군 행세를 안 한다? 지나가던 소가 다 비웃을 일이다.
“그런데 회장님. 정말 여기서 끝을 내실 겁니까.”
“무슨 말이지?”
“반응 보아하니 몇천억 더 불러도 넙죽 받아먹을 기세던데요. 가격을 더 받을 수 있었는데…….”
회담이 너무 쉽게 풀리니 아쉬움까지 든다.
방금 분위기 봐선 5천억 선까지 맞춰 볼 수도 있지 않았나.
“2천억 더 받아서 뭐 하누. 임원들 퇴직금 몇 푼 더 챙겨주고 끝나겠지.”
“하지만…….”
“과욕은 금물이다. 자리 약속받았잖아. 어차피 놈들은 여기 점령하러 온 게 아니야. 가장 까다로운 적을 친구로 만들 작정이지.”
상대 기업과 경쟁하는 낭만적인 시대는 갔다.
이젠 그 상대 기업을 바로 합병해 버린다. 바로 적대적 인수 합병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한솔테크 입장에서도 더 이상 출혈경쟁 하며 한명과 싸울 수 없으니, 깽값은 다 받아 냈다.
“근데 공정위가 이걸 통과시켜 줄까요? 누가 봐도 적대적 합병인데.”
“좀 걸립니다. 시장 독점이 보이는 문제데.”
회장이 웃었다.
“그건 우리 손을 떠난 문제 아닌가. 기다려 봄세.”
어쩐지 그 웃음에는 회한이 많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