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83
283화
합병 심사 (4)
막상 입을 떼려니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시총 괴물인 한명그룹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기업, 한솔테크. 한 회장은 이 한명건설과 피 터지게 싸웠으며 수십 년간 1등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 냈다.
한명건설이 웃돈 7천억을 쓴 것만 봐도 이 노인이 얼마나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적만 제거하면 7천억 이상의 수익을 낼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개인적으로 참 안타깝습니다. 한솔테크는 40여 년을 이어 온 내장재 시장의 전통 강자인데, 이렇게 한 번에 사라지다니.”
“기업의 흥망성쇠는 다 하늘에 달려 있겠죠.”
“그래도 회사를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거 아닙니까?”
“웃돈 7천억이 어디 쉬운 금액인가요. 제값은 충분히 받았습니다.”
정말 미련이 없는 걸까.
한 회장은 눈길도 주지 않으며 차를 홀짝였다.
“독대하는 자리에서 우리 회사 강점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그만 용건 꺼내시지요.”
노련한 노인답게 눈치 한번 빠르다.
“저희는 이 합병안 거부할 생각입니다.”
“거부? 무슨 근거로?”
“두 회사 합병 시 시장 독점 우려가 너무 크거든요. 아무리 진입 문턱이 낮은 시장이라지만 80%는 너무 큰 점유율입니다.”
“한명건설이 그걸 두고 볼까요? 이 합병에 거부권 쓰면 법정 소송으로 가게 될 겁니다. 이 늙은이가 보기엔 법정 싸움은 공정위에 불리해 보이오만.”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 합병, 철회해 주실 수 없습니까?”
노인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다시 차를 홀짝였다.
아무래도 이 모든 상황을 다 예상하고 있던 모양이다.
짧은 침묵 끝에 나온 목소리에선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합병 철회라……. 허허, 나도 공정위에 하나 물어봅시다.”
“말씀하세요.
“대관절 이제 와 이러는 이유가 뭐요? 우리가 한명건설의 일감 몰아주기를 고발할 땐 아는 체도 안 했잖습니까? 피 터지게 싸울 거 다 싸우고 이제 우리가 백기를 들겠다는데.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요?”
한명건설은 철옹성이었다.
전관을 얼마나 포섭했는지, 누가 봐도 일감 몰아준 정황이 번번이 무죄가 되었다.
그렇게 시장 점유율을 뺏겼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그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기에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저희를 원망하는 부분은 이해합니다만…….”
“이해한다면 그만두쇼. 보다시피 난 내일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이고, 한명건설을 이제 막 부상한 공룡 기업이야. 더 싸우라는 건 늙은이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닌가.”
“…….”
“거기다 웃돈을 7천억이나 더 받았는데,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장사지. 앞으로 내장재 시장에 시장 독점이 이뤄지건 말건, 한명이 일감을 몰아주건 말건. 우리 알 바 아니요.
공정위가 소임을 다 하시오.”
한 회장 입장에선 철회할 이유가 없는 합병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내장재 시장 독점은 공정위가 일감 몰아주기를 방관한 대가다.
게다가 한명건설은 당분간 현 경영진 체제를 보장해 주겠다 약속했다. 대체 거부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윤 국장은 뜻대로 대화가 풀리지 않자 결국 한마디 거들었다.
“한 회장님, 이게 다 이용당하고 있는 건 아시죠?”
“이용?”
“한명건설이 이 합병에 서두르는 건 최영석의 경영권 때문입니다. 곧 이 성과를 대대로 선전하며 이사회를 소집할 겁니다. 그 회장 자리에 앉기 위해.”
“그걸 내가 신경 쓸 필요 있습니까. 알아서 하라고 하쇼. 남의 집안일엔 그다지 관심이 없으니.”
공정위에 대한 원망인지, 아님 7천억에 대한 욕심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미 한 회장의 마음은 떠났다는 것.
한 회장은 혀를 끌끌 찼다.
“에잉 싱거워. 독대하자고 해서 긴장을 다 했는데, 결국 합병 철회해 달라 소리였구먼. 이만 더 할 얘기 없으면 일어나겠습니다.”
“잠시…….”
“다시 말하지만 시답잖은 이유로 이 합병 거부하면 법원으로 가게 될 거요. 부디 망신을 자초하지 않길 빕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정말 그 이유가 전부라면 7천억은 너무 싸지 않나요?”
준철의 말이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뭐라?”
“한명건설이 일감 몰아줘서 점유율 뺏기고 이젠 퇴장까지 해 주는데……. 이건 너무 싸잖아요. 그간 해 온 마음고생에 비하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게요?”
“광을 팔았으면 값이라도 제대로 받아 가십쇼. 최소 2천억은 더 받아 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과장, 지금 무슨 소리야?
아무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에 윤 국장이 더 당황했다. 하지만 준철의 도발적인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희가 바람 잡아 드리겠습니다. 여러 이유를 들어 합병 심사에 딴죽을 걸어 드리죠. 근데 어차피 지금 가장 아쉬운 건 최 부회장이죠?”
“그게 무슨…….”
“그럼 한솔테크의 몸값은 더 치솟지 않겠습니까. 회사 넘기실 때 절까지 받아 가세요. 최소 2천억은 더 받아 낼 수 있을 겁니다.”
우뚝 멈춰선 한 회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한명건설의 간절한 사정을 이용해 몸값을 더 높여 받자, 이건 한솔 임원진들 사이에서도 제기된 의견이다. 그 말을 공정위 조사관에게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되면 한명건설을 더욱 궁지에 몰 수 있다. 한솔테크의 갑의 지위가 더욱 공고해진다.
“대체 우리한테 그러는 이유는?”
“그간 공정위가 소임을 당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하지요.”
“난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아닙니다. 공무원이 자기 일 못한 보상으로 기업 대신 깽값을 받아 내 준다니.”
“뭐, 선택은 자유지만 저희는 방법을 알려 드리는 겁니다.”
그리 말하더니 서류를 찢었다.
“자, 다시 원점입니다. 우린 오늘 1차 간담회에서 이 합병안을 거부할 겁니다. 시장독점 우려와 한명건설의 일감 몰아주기가 더욱 노골화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죠.”
“…….”
“하지만 2차 간담회 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합병을 승인할 겁니다. 말씀대로 법정 싸움 가서 유리할 게 없으니까. 하니 더 받아 낼 수 있을 때, 받아 내세요.”
한 회장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갑자기 왜 공정위가 자신 편을 들어주는지 도통 모르겠다.
***
“이 과장, 이게 대체 뭐지? 설명을 해 봐.”
간담회를 파하고 나왔을 때, 윤 국장의 노기 어린 음성이 날아왔다.
준철은 차분하게 답했다.
“반응 보니 글렀습니다. 이 합병은 못 막아요.”
“못 막는 것과 별개로 왜 저쪽에 저런 제안을 했냐고. 우리가 지금 한쪽 기업 편들어 줄 때야?”
“당연히 아니죠.”
“그럼?”
“한명건설이 더 돈을 쓸 수 있는지 보는 겁니다. 만약 한 회장이 돈을 더 요구하면 그쪽에서 분란이 생길 수도 있죠.”
“그렇게 양 기업을 서로 이간질시키겠다는 거야?”
사실 이런 광경은 합병 심사에서 늘 있는 경우다.
법적으로 제동을 걸 순 없지만 탐탁지 않은 경우. 공정위가 계속 딴죽을 걸며 양 기업 싸움에 불을 붙인다. 이렇게 해서 무산된 합병 심사도 한 트럭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 마당에 최영석이 1~2천억 더 못 쓰겠어? 부르는 대로 줄걸.”
“그럼 그것대로 부담일 겁니다. 사실 전 무슨 수를 써도 이 합병 못 막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승자의 저주라도 씌워야죠.”
“독배를 마시게 한다?”
“예. 인수한 기업한테 큰 부담을 지울 겁니다.”
합병을 거부 못 하더라도 좋은 경고가 될 것이다.
당국이 한명건설을 곱지 않게 보고 있다는 경고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다.
“국장님, 저 한번 믿어 주십쇼. 이렇게 불씨를 지펴 놓으면 저쪽도 피 터지게 싸울 겁니다. 어쩌면 논의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죠.”
동의할 수 없는 방법이었지만, 윤 국장은 반박할 수 없었다.
방금 그 노인의 의지를 읽지 않았나. 절대로 자기 손으로 합병을 철회할 방법이 없다.
“내 참. 별 이득도 없는데.”
그는 혀를 찼다.
“근데 이 과장, 자네 뭐 딴생각 있는 건 아니지?”
“예?”
“내가 모르는 무슨 큰 그림. 자넨 속이 아주 능물스런 사람이잖아. 이 그림만 봐선 자네 말이 잘 납득이 안 돼. 혹시 내게 말 안 한 다른 그림이 있나?”
“……그런 거 없습니다.”
젊은 놈이 눈길을 돌리며 대답을 회피한다.
눈 하나 깜빡 않고 거짓말할 위인은 못 되는 건가.
하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집요하게 묻는다고 대답할 놈도 아니다.
“그래, 뭐 아니면 말고.”
“죄송합니다. 독단적으로 결정해서.”
“아니야. 가만 생각해 보니, 이렇게 이간질시키는 게 나아. 잘했어.”
윤 국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렇게 해 봐.”
그렇게 자리에서 떠나갈 때. 준철은 홀로 남아 생각했다.
한명그룹의 재정 상태는 누구보다 잘 안다. 이미 7천억의 웃돈으로 세간에선 말이 나온다. 과연 돈을 더 썼을 때 이사회 반응이 어떻게 변할까?
‘…….’
때론 키워서 먹어야 할 때도 있는 법.
이건 차지하는 게 실인, 승자의 저주가 될 수 있다. 재정 악화가 계속되면 최영석의 입지도 위태로워진다.
그때 딱 불씨 한 번만 불 지펴 준다.
‘최기석…….’
차남 최기석은 아직 쓸 만한 패다. 최영석을 꺾어 줄 마지막 히든카드는 분명 이놈에게서 나올 것이다.
***
“뭐? 2천억을 더 달라고?”
간담회를 마치고 난 뒤, 한명그룹은 날벼락을 맞았다.
갑자기 한솔테크에서 인수 자금을 더 요구하지 않나.
“이 노망난 영감탱이가 어디서 흥정을! 이미 7천억도 더 준 거야. 절대 안 돼!”
최영석이 노발대발했지만, 임원들의 반응은 극히 냉소적이었다.
“부회장님, 지금 공정위에서 합병 거부 기류가 보이고 있어요. 독과점이 우려된다고.”
“그걸 가지고 한솔 테크를 계속 압박하는 모양입니다.”
다 차린 밥상인데, 누가 와 자꾸 똥물 냄새를 풍긴다. 이건 냄새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언제고 똥물을 뿌려 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 같이 버텨야지! 양사 합병 사인을 억지로 찍었어? 이런 굴곡 다 함께 이겨 내야 되는 거 아니야? 이걸 왜 우리한테 청구해.”
“냉정하게 생각하십쇼. 그런 상황에서 한솔테크가 합병을 거부를 받아들이면, 이 모든 게 다 물거품이 됩니다.”
물거품이란 말에 최영석은 진짜 거품을 물 것 같았다.
이미 이게 다 언론에 쏟아지며 왕좌를 차지하게 되지 않았나. 근데 말짱 허사가 되면 리더십에 손상만 입게 된다.
“어차피 7천억 쓴 돈 아닙니까.”
“…….”
“한솔에서 요구하는 돈 좀 더 채워 줘도 푼돈입니다.”
“2천억이 어떻게 푼돈이야?”
“어차피 시장 독점하면 단가 다 올릴 텐데요. 놈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릅니다. 결국 여기서 쓴 돈은 다 소비자들에게 전가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의 손해를 생각해선 안 된다.
거대한 독점 시장을 차지했을 땐 그 이자까지 쳐서 몇 배는 더 가져갈 수 있으니.
“하아…… 그래서?”
“그쪽에서 2천억을 불렀습니다. 이 돈을 주면 확실히 끝까지 합병 철회 안 하겠다는군요.”
“옌장할, 그래도 2천억은 너무 커.”
“괜히 여기서 몇 푼 흥정하느니, 속 시원히 주는 게 낫습니다.”
임원들의 극렬한 말에 결국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하나만 생각해야 한다.
동생의 빈틈을 타고 차지해야 할 왕좌. 그것만 생각하면 2천억쯤은 푼돈처럼 느껴진다.
“알겠다. 대신 똑바로 약속받아. 이젠 무조건 넘겨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