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85
285화
2차 왕자의 난 (2)
형을 찌를 수 있는 큰 약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이성을 찾았다. 놈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줘선 안 된다.
“얼른 대답해 보쇼. 막아 줄 수 있습니까.”
잠시 대답이 없자 최기석은 한껏 더 달아올랐다.
이럴 땐 대답을 잘해야 한다. 협상의 제1원칙이 밀당 아닌가.
“이사회를 막으려면 보통 큰 건이 아니어야 할 텐데요.”
“스케일은 내가 장담합니다. 한명그룹을 무너뜨릴, 아니 어쩌면 이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을 만한 건이니까.”
“그렇게 좋은 칼을 왜 지금까지 들고만 있었어요.”
“나조차도 감당 못 할 스케일이었으니까. 사실 형이 선만 넘지 않았다면 나도 이 문제는 건들고 싶지 않았어.”
정권을 무너트릴 수도 있는 정보라.
굳은 그의 얼굴은 허풍이 아니란 걸 말해 준다.
“들어나 봅시다.”
“그 전에 약속부터 받읍시다. 내가 정말 정보 넘기면 큰형 무너뜨릴 수 있나?”
“내 조사 이력 보면 아시겠지만 내가 스케일 크다고 도망갈 위인은 아니에요. 이렇게 허풍 떨고 막상 별거 없으면 내 얼굴 두 번 다시 볼 생각 말아요.”
“한명건설이 따낸 아파트 십여 곳이 다 로비로 따냈어.”
“……뭐?”
“전직 국토부 장관부터, 현직 의원까지 없는 이름이 없다고. 건설사끼리 담합해서 따낸 아파트 수주, 그리고 그걸 눈감아 준 관료 실세들. 이게 큰형의 영업 방식이었다고.”
“……그런 음모론은 지라시에 늘 떠돌아다니는 얘깁니다만.”
“당연히 난 음모론 수준의 의혹이 아니지. 명확한 증거랑 이를 증언해 줄 만한 증인도 있소. 이게 우리가 파악한 명단이야.”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란 다짐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한명건설이 비리로 점철된 회사라는 건 익히 알고 있다. 김성균으로 살 때, 부회장을 대신해 떡값도 돌렸으니까.
최기석이 내민 명단은 김성균의 기억과 상당히 맞아떨어졌다. 거기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계좌 내역과 증언까지 나왔다.
그 내역을 하나씩 확인하다 보니 손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내가 허풍 같소?”
말문이 막혔다.
이 정도면 왜 약점을 잡고도 발설하지 못했는지 납득이 간다.
“아니오. 눈으로 보니 믿기는군요. 근데 이 정도 스케일이면 그냥 검찰에 가져다줘도 될 텐데.”
“검찰은 절대 안 돼. 서울지검장부터 총장까지 떡값 안 받아 먹은 놈이 없거든. 이거 가져다주면 내가 변사체로 발견될걸.”
소위 말하는 자살을 당하는 시나리오다.
“그런 자료를 나한테 넘기는 이유가.”
“역시 사람은 직접 맞아 봐야 알아. 큰형 칠 땐 그냥 미친놈이겠거니 싶었는데, 직접 조사당하니 얼마나 매운 놈인지 알겠어.”
“…….”
“나는 그 박력이 마음에 듭니다. 떡값 받은 놈들은 그렇게 물불 안 가리고 날뛸 수 없거든. 왜요, 막상 내가 자료 넘기니 감당 못 하겠나.”
혹시나 포기할까 싶어 살살 약도 올린다.
“그럴 리가요. 잡으려면 특검으로 잡아야겠는데 그럼 검찰이 더 빠르지 싶었습니다.”
“대답 한번 마음에 드는군.”
식은땀 흘리고 있을 게 빤한데 제법 여유로운 척도 한다.
사실 최기석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위직 장관부터 현역 의원들까지 거론된 명단. 이건 형 하나 끌어내린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지금 놈은 자폭 스위치를 누르고 눈을 질끈
감은 상태다.
“소, 솔직히 그쪽에서 먼저 시작한 거 아니야. 나 구치소에 처넣은 동안 기다렸다는 듯 이사회 작업을 하고 있네? 아직 1심 결과도 안 나왔는데?! 난 거기서 이미 눈 돌아갔어.
내가 뒈지더라도 이건 끝장을 볼 거야.”
이 정도면 동기부여로는 충분하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검토해 보죠.”
“이건 혹시나 하는 말인데……. 내가 혹시 이 자료를 넘긴다면.”
“감형 말씀하시는 겁니까.”
“……구차하지만 나한텐 급해.”
이 정도 선물은 준비했다.
“검찰에 얘기해 놓겠습니다. 실형은 3년 정도. 하지만 집행유예는 절대 안 됩니다.”
“이보세요, 과장님. 내가 넘긴 정보의 질도 있잖습니까. 어떻게든…….”
“3년 때린다고 그 3년 다 정직하게 살다 나올 거예요?”
“…….”
“어차피 경제인 특사나 가석방, 사면 모든 카드 다 써서 반도 안 채우고 나올 거 아닙니까. 이 정보가 실형 면제에 대한 대가라면 나도 더 이상 듣지 않겠습니다. 한명건설이
형님한테 넘어가는 거 구경하시죠.”
궁둥이를 슬쩍 들자 다급하게 손이 날아왔다.
“알겠습니다! 드릴게요!”
최기석은 진땀을 쓸어내렸다. 애초에 이놈과 흥정하려 했던 자신이 잘못한 일이다. 이런 부류는 절대 먹히지 않는다.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나머지 자료도 내밀었다.
여기엔 또다시 정계 거물들이 거론됐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얼마의 돈을 받았는지 자세히 나와 있었다.
건설사끼리 담합해 공사비를 부풀리고 일감을 나눈 정황도 나와 있다. 너무도 단순한 이 방식은 당국이 충분히 적발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위에서 모두
입막음시켰기 때문이다.
모든 자료를 다 검토했을 때 입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다.
이건 전무후무한 건설 비리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니까 현금 지급할 땐 다 차떼기로 지급했다는 거죠.”
차떼기는 자동차에 현금을 가득 담고 배달하고 오는 것을 뜻한다.
“네. 확실히 뒷돈 많이 받아 본 실력자들답습디다. 현금 아니면 절대 안 받는 부류도 있었어.”
“근게 그러면 처벌 어렵습니다. 현금은 원래 처벌이 어려워요.”
“이 배달 기사도 우리가 확보했어. 연락처 나와 있으니, 친절하게 응대해 줄 겁니다.”
“이 정도 의혹이면 그 사람 신변이 위험할 수 있는데…….”
“걱정 말아요. 내가 아는 해외로 도피 갈 수 있게 다 짜 줬으니.”
그러면 중간에 돌아설 일 없다.
자료 내역을 하나하나 확인한 준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이 자료는 좋은 데 쓸게요.”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걱정 말아요. 이 자료 가지고 최영석한테 붙어먹을 생각 없으니까. 그리고 형량은 안타깝지만 죗값을 치러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집니다.”
***
전국 아파트 20여 곳. 총 로비액수 4천억 원.
거론된 여야 의원들 이름만 해도 십수 명이다. 국토부 관계자를 포함한 고위직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부동의 건설 업계 1위는 이런 더러운 짓을 바탕으로 이룩한 성과인
것이다.
자료를 검토하던 유 국장은 간간히 한숨을 내쉬었다. 터지면 그야말로 지상 최대 토건 스캔들 아닌가.
“처음부터 말해 봐. 이 자료 어떻게 입수했지?”
예상외로 목소리가 차분하다. 큰 사건만 보면 일단 하지 말라고 노발대발하던 양반인데.
“최기석에게 받았습니다.”
“최기석이면…… 한명그룹 차남?”
“네. 주총 앞두고 나니 심경 변화가 있던 모양이군요.”
유 국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걱정 마십쇼. 이거 가지고 형량 협상한 거 없습니다. 어차피 3~4년 떨어져도 특사, 가석방으로 나올 놈 아닙니까.”
“그래도 뒷말 조심해라. 이 과장 너 이번에 너무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어.”
큰형한테 받은 자료로 동생을 찔렀고, 그 동생한테 받은 자료로 큰형을 찔렀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언론엔 최대한 익명 제보라 둘러 댈 생각입니다.”
“아무튼 지금 이 자료 신빙성은 상당하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최상급의 요리 재료를 배달 받았는데…… 요리사가 없다.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도 문제고.
준철은 유 국장의 고민을 예상이라도 한 듯 먼저 불을 지폈다.
“국장님, 그냥 이 사건은 처음부터 시끄럽고 요란하게 가야 됩니다.”
“뭐?”
“특검요. 여야 의원들에 전직 국토부 장관까지 돈 받아먹었는데 어떻게 조용히 조사가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공론화시켜 버려야 합니다.”
언론플레이라면 학을 떼는 유 국장이었지만 이번엔 반대 하지 못했다. 능히 그럴 만한 스케일 아닌가.
하지만 하늘이 결정 내린다는 말이 있다.
“요란 떠는 거? 좋지. 맘 같아선 나도 백번 그렇게 하고 싶다. 국민들이 다 알고 있어야 암살이라도 안 당할 거 아니냐.”
“예.”
“근데 네 말대로 여야 의원들 나란히, 그리고 전직 장관들까지 연루됐어. 이렇게 사이좋게 나눠 먹은 돈은 절대 특검 안 열린다.”
“그러니까 더욱 여론 조성에 열을 올려야죠. 국민들의 압박 수위가 커지면 청와대도 길게 못 버팁니다.”
“그게 말이나 쉽지…….”
“특검을 거부하는 놈이 범인이다. 이 프레임으로 가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여야 의원들 나란히 거론된 금융 범죄가 늘 안 밝혀졌던 건 아니다.
국민들의 특검 요구가 높아지면 울며 겨자 먹기라도 결국 백기 들게 돼 있다.
“하면 어떻게 하게?”
“일단 최영석이 기소부터 하겠습니다. 한창 이사회 준비하느라 정신없을 텐데 지금이 적기입니다.”
“구속영장도 칠 거야?”
“네. 형 동생 나란히 구치소 동기 만들어야죠. 그놈 바깥에 두면 증거 인멸 신나게 할 겁니다.”
과연 검찰이 여기까지 도와줄까. 거론된 이름 중 상당수가 법조계 출신인데.
“알았다. 일단 돌아가라.”
“국장님…….”
“안 하겠다는 거 아니다. 이놈아, 딴 사람은 몰라도 위원장님께는 보고드려야지. 이 정도 스케일 사건을 뉴스 보고 아셔야겠냐?”
“아, 아닙니다.”
“입찰 담합도 많아서 위원장님도 안 하라곤 못할 거다. 걱정 말고 돌아 가.”
준철이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자 깊은 한숨을 내쉬는 유 국장이다.
***
내 표정이 저러 했을까. 박수철 공정위원장에게 이를 보고 하니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박 위원장은 몇 번이나 같은 자료를 다시 봤고, 통탄의 한숨을 내뱉었다. 건설 업계 비리가 원체 스케일이 크다지만 이건 그 정도를 뛰어 넘는다.
TV만 틀면 나오는 현역 의원들에 전직 장관. 게다가 그들이 어떻게 돈을 받았는지에 대한 정황까지.
너무나 생생한 증거들 앞에 더는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유 국장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죽겠구먼. 끊었던 담배가 생각 날 지경이야.”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건 없지. 뇌물 명단에 자네 이름은 없던걸? 그리고 자네도 피해자 아닌가. 그 이준철인가 뭔가 하는 놈이 가져왔다고?”
“예……. 그렇습니다.”
“유 국장,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한명건설이 지금 한솔테크 인수한다고 9천억인가 더 썼잖아. 혹시 오늘 이 날을 위해서 사내 유보금 거덜 낸 거야?”
“그건 아닙니다. 정말 우연찮게 차남에게 제보가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놈 배후에 장남이나 차남 있는 거 아니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박 위원장은 심호흡 한 번 하며 물었다.
“좋아. 그럼 이제 제대로 논의해 보자. 이거 어떻게 특검 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