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86
286화
악연, 끝냅시다
한명건설의 조바심을 증명하듯 블록딜은 금방 이뤄졌다. 최영석은 사내유보금에 사재까지 털어 한솔테크 지분을 사들였다. 정부의 고용·투자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모아 온 알토란 같은
돈들이다.
이로써 한명건설의 사내유보금은 거덜 났으나, 다가올 독점 시장을 생각하면 무모한 금액도 아니다.
걸림돌 제거하고 잔디까지 깔아 놨으니 이젠 실컷 달리는 일만 남았다. 합병 문제가 마무리되자 한명건설은 곧 이사회 공고를 띄웠다.
맹렬히 타오르는 주가는 벌써부터 최영석의 회장 취임을 축하해 주는 듯했다.
그렇게 이사회 당일.
언론은 ‘대관식’이란 이름까지 붙여 가며 현장을 생중계 했다. 대한민국 최대 재벌 그룹의 후계자가 정해지는 날이니, 대통령 취임식 못지않은 관심이 쏟아졌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이사회장엔 냉랭한 긴장감이 일었다.
오늘은 누군가에겐 축배의 장이나, 다른 누군가에겐 항복 서명의 날이다. 최영석의 측근들은 이미 한 계단씩 승진한 듯 얼굴이 밝았고, 최기석 우호 지분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하지만 이미 구심점을 잃은 그들이다. 최영석의 회장 취임을 막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진 여러분. 지금부터 한솔테크 인수합병 결과와 향후 시장 전략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십시오.
오늘 이사회 소집의 형식적인 안건은 양사 합병안이었다.
피피티엔 한솔테크 사옥에 HM인테리어 간판이 걸린 모습이 나왔다.
-현 대한민국 인테리어 시장은 한솔과 한명건설의 피로 세웠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양사의 무의미한 출혈 경쟁은 부실 공사란 부작용만 키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봤을 때, 합병은 양사에게 절실한 안건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가격 경쟁은 없습니다. HM인테리어는 질적으로 향상된 서비스, 그리고 제값 받는
서비스를 제공하여 소비자들의 만족도를 더 높일 것입니다.
독점 시장이 열렸으니 이제 소비자들의 등골을 빼먹겠다, 이 한 줄이면 되는 설명을 장장 두 시간에 걸쳐 홍보했다. 이를 주도했던 최영석의 성과를 더욱 크게 홍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사정을 알았기에 이사진들은 시큰둥하게 발표를 들었다.
어차피 이 모두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의 에피타이저 아닌가. 진짜 중요한 건 이 그룹의 주인이 누구인지다.
-그럼 이로써 양사 합병안이 통과되었음을 공표합니다.
지루한 에피타이저가 끝나자 이사진들 눈빛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다음 안건은 한명그룹의 회장 선임안입니다.
본 건이 등장하자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시다시피 최영호 회장님의 타계 이후 한명그룹은 혼란의 도가니였습니다. 그룹은 잇속과 계파 갈등으로 사분오열 되었고, 정작 중요한 현안은 계속 뒤로 미뤄져 왔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차남 최 상무는 수인복까지 입게 되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불만의 헛기침이 들린다. 그걸 주도한 게 누군데?
-하지만 계속 과거에 연연해 대승적인 결단을 미룬다면 그룹에 미래는 없습니다. 다변화 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신속한 의사 결정과 이에 책임을 지는 경영자가 필요합니다.
과거의 악연을 뒤로하고 우리 모두 그룹의 미래 하나만을 생각합시다.
정치든, 경제든, 역사든 과거를 잊자 말하는 놈들은 꼭 잘못한 놈들이다.
생각보다 조용한 반응에 최영석과 그 측근들은 입술이 씰룩거렸다. 불만 세력들이 이때쯤 한번 깽판을 칠 것으로 예상했는데 너무 조용하지 않은가.
-이에 대해 의견 개진할 이사진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멍석도 깔아 줬지만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조금은 기이하게 느껴졌다. 최기석 우호 지분도 대거 참석한 자린데, 어째서 한마디 말이 없을까. 이미 자기 주군에겐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걸까.
-없다면 바로 안건에 부치겠습니다. 구성원 중 회장 추천 인사가 있다면 발표해 주십시오.
회의장 모든 시선이 삼남 최만석에게 향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발언권을 가진 자다.
최만석은 슬쩍 엉덩이를 들더니 말했다.
“한명건설 최영석 부회장을 대표이사로 추천합니다.”
최영석은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단상으로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또 추천 인사가 있습니까?
이미 짜고 치는 판이니 더 이상 추천자가 나올 리 없다.
-입후보자가 한 명밖에 되지 않으니 찬반 투표로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반대하시는 분, 거수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찬반 투표도 필요 없었다. 이사회장에서 입후보자가 한 명이면 자연 당선이다. 하지만 과반 이상 확보해 명분을 확보하겠단 최영석의 의지였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결과는 압승이었다.
반대 임원 서넛이 보였지만, 고작 지분 3%도 되지 않는 핫바지들. 어차피 이놈들은 골수 최기석파로 경영권만 삼키면 모두 처단해 버릴 놈들이다.
오히려 눈에 띄게 행동해 주니 편하다.
-그렇다면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주십쇼.
이에 나머지 임원들이 모두 손을 들며 찬성의 뜻을 내비쳤다.
이미 예고된 결말이었다.
-그럼 한명그룹의 회장 선임안은 이것으로…….
그때였다.
“안 됩니다! 지금은 중요한 회의 중이에요!”
“회의? 우린 더 중요한 공무 집행 중이에요. 얼른 비키세요.”
“아, 공무 집행이고 나발이고 안 된다니까!”
“어쭈? 지금 내 몸 건드렸어? 당신 이름 뭐야? 공무 집행 방해로 콩밥 한번 먹어 보자.”
“건든 게 아니라 슬쩍 스쳤…….”
별안간 문 바깥에서 소란이 들리며 회의장 정문이 와당탕 열리고 말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 미처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있을 때 웬 양복쟁이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최영석 측근들이 일제히 일어나 단상으로 올라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주군을 보호해야 한다.
“당신들 웬 소란이야! 이 자리가 어떤 자린지 알아?”
“뭔 일인지는 모르지만 썩 나가쇼! 이게 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
그렇게 짖어 댈 때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최영석은 서서히 얼굴이 굳어졌다. 다가오는 이가 다름 아닌 준철이었기 때문이다.
준철은 표정 변화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란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김성균으로 죽고 난 이후 단 한 순간도 부회장을 잊어 본 적이 없다. 이준철로 살며 지난 삶을 반성했고, 뉘우쳤다. 이젠 그 당사자도
뉘우쳐야 한다.
그렇게 그의 앞에 바짝 다가갔을 때, 준철이 기소장을 내밀었다.
“최영석 씨, 이제 이 악연 끝냅시다.”
***
-다음 소식입니다. 한명건설의 이사회가 열린 오늘. 공정위가 입찰 담합 및 리베이트 의혹으로 최영석 부회장을 기소했습니다.
시공권을 따낸 아파트 수십 채가 부정으로 얼룩졌다는 내용인데요. 벌써부터 수많은 정관계 인사들이 오르내리며 파장이 더욱 커질 전망입니다.
공정위는 이 모든 내용이 익명의 제보로 이뤄졌다 설명했지만, 그 내용과 증거가 자세해 내부자 소행이 아니냐는 관측이 흘러나옵니다.
-결국 오늘 이사회는 파행으로 끝났습니다. 한명그룹은 회장 선임안을 무기한 연기하고 자료 검토에 들어가겠단 입장입니다. 공정위 의혹 제기에 적극 반박하기보단 한 수 접은
모양새인데요.
이를 두고 업계에선 의혹이 모두 사실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유력 정치인부터 법조계 인사까지 거론되고 있어 당분간 진통이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잔치집이 초상집으로 뒤바뀌었다.
이사회 당일 9시 뉴스는 모두 한명그룹 게이트로 도배가 되었다.
이는 비단 한명그룹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뉴스 보도와 함께 여의도가 왈칵 뒤집어졌으며 국회의원들은 카메라 피해 다니기 바빴다.
본래 이런 사건이 터지면 방송국 카메라를 죄 동원해 상대 당을 비난하기 바쁘건만. 이번엔 여야 의원 나란히 사이좋게 걸려 어느 누구도 웃을 수 없었다.
국회의원들이 카메라와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을 때, 최영석도 잠행에 들어갔다. 왕좌를 목전에 놓쳤다는 아쉬움? 그딴 건 안중에도 없다. 뇌물 공여 시기, 액수, 대상 이 삼박자가
모두 일치한다.
이건 자신을 지금까지 지켜보며 약점을 캐치했단 뜻이고, 그런 놈은 지금 구치소에 들어가 있는 둘째밖에 없다.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된다.
여의도 로비는 자기에게 더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인데 이걸 어떻게 터트린단 말인가.
그것보다 더욱 소름 끼치는 건 그 젊은 과장 놈의 한마디다.
-악연을 이제 끝내자.
그놈의 표정이 계속 걸린다. 그 젊은 놈이 앞만 보고 달리는 조사관이라서가 아니다. 몇 번 보지도 않은 얼굴인데 왜 자꾸 기시감이 느껴지는 걸까. 정말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처럼…….
이렇듯 칩거에 들어갈 때,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진짜로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서울지검장은 준철과 그 휘하들을 노려봤다.
이 사건이 기소가 되었던 건 벌써 한 달 전 일이다. 한눈에 봐도 너무 큰 사건이었기에 검찰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거부해 버렸다.
하지만 그 뒤 뻔질나게 찾아오며 검찰을 압박해 댔다.
덮으면 공범이란 말, 언론에 뿌려 버릴 거란 협박. 이 생떼는 검찰총장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기소까지 치게 된 것이다.
“적당히 한명그룹 임원 몇 명 처벌하고 끝냈으면 오죽 좋습니까. 꼭 그렇게 이사회장 난입해서 초를 쳐야겠어요?”
“검찰이 협조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저도 그렇게까진 안 했겠죠.”
“아니, 지금 이게 우리 탓이라는 거야? 당신 이거 월권이야! 공정위가 검찰이야, 경찰이야, 아님 특사경이야? 어딜 거기 가서 기소장을 내밀어.”
“그 부분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근데 검찰이 부담스러워하는 일 저희가 대신 총대 맸다고 생각해 주십쇼.”
기소권, 수사권도 없는 공정위가 피의자에게 기소장 내미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월권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우리한테 정말 용서를 바라는 거면 이 이상의 월권 하지 마요. 이 수사는 우리가 진행합니다.”
“어떻게 하실 건지는 들어 봐야죠. 저희가 고발부처인데.”
“일단 확실한 자들부터 조사해 나가 점진적으로 수사를 확대시킬 계획입니다.”
“지금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만.”
“이봐, 방금 말 못 들었어? 네가 천방지축 나대는 바람에 지금 세간에선 떡검 소리 나오고 있어. 이 정도로 넘어가 주는 것도 많이 봐준 줄 알아!”
아무래도 이자는 좋은 말로 타이르긴 그른 것 같다.
“지검장님, 혹시 한명건설에 돈 받은 거 있어요?”
“뭐, 뭐야?”
“그렇게 점진적으로 수사하면 잔챙이들만 몇 마리 잡다 끝날 것 같은데……. 왜 그리 미련하게 수사하나 싶어서요. 진짜 돈 받으셨나.”
“이게 진짜 미쳤나!”
“내 생각이 아니라 지금 시국이 그렇습니다. 여야 의원들 아직까지 아무런 성명도 없죠? 조금이라도 편들면 그 화마가 자기에게 튈까 봐 몸 사리는 겁니다.”
“…….”
“만약 검찰이 계속 밍기적거리면 전 또다시 언론사 찾아갈 겁니다. 검찰이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는 게 꼭 무언가를 덮으려는 모양새 같다고. 저희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