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88
288화
악연, 끝냅시다 (3)
최영석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돌변한 목소리와 호칭 때문이 아니다. 무척 익숙한 기시감이 다시 들었기 때문이다.
“뭐?”
“내가 당신 측근이었다면 이런 싸구려 시나리오 말렸을 거야. 동생의 우호 지분 살살 꾀어서 내 편으로 확실히 만든 다음 이사회 열었을 거야.”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유능한 놈이 왕이 되는 게 아니다. 적이 없는 놈이 왕이 되는 거다. 이게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 준 교훈 아니었나.”
“내,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당황해하는 놈을 뒤로하고 준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대화는 길게 끌어서 좋을 게 없는 것 같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대하고 싶지만 과거만 생각하면 울컥하는 마음이 앞선다.
“영장을 막았으니 특검도 막을 수 있을 거란 착각 집어치워. 증거는 차고 넘치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검찰. 과연 국민들이 언제까지 참아 줄까.”
최영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아는 국민들은 지구 끝까지 참아 줄 것 같은데. 하하.”
“…….”
“그렇게 자신 있으면 어디 끝까지 해 봅시다.”
결국 자백도 수사 무마도 없이 대화는 끝이 났다. 서로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는 확실히 확인했다.
회사로 돌아온 최영석은 곧장 내리지 못하고 사옥을 수 바퀴 돌았다.
퇴근길 정체 도로처럼 그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특검이 통과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 아니다. 놈의 행동, 말투 모두가 너무 익숙하고 기분 나쁘다.
대체 이 기분 나쁨의 근원이 뭘까?
끼이익.
그러던 중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멈춰 섰다.
-본부장, 유능한 놈이 왕이 되는 게 아니다. 적이 없는 놈이 왕이 되는 거야. 알겠어?
“기, 김성균?”
아주 나쁜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
한명건설 게이트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지만 가장 시끄러워야 할 야당은 이를 악물고 침묵을 지켰다.
이는 굉장히 이색적인 장면이었다. 천재지변이 생겨도 여당 탓을 하는 사람들 아닌가.
뉴스만 틀면 한명건설 의혹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들은 집권 여당 견제라는 본연의 역할을 잊은 지 오래였다.
“저희 인사는 10명 정도 나왔습니다…….”
바로 사이좋게 해 먹었기 때문.
“하지만 대한당 쪽에선 20명 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죠.”
“여론 압박도 슬슬 심해지는데 이쯤에서 저희도 논평을 내는 게…….”
쾅-!
“그게 지금 말이나 될 소리야? 대한당 20명, 민국당 10명. 오십보백보지 이게 유리한 상황이냐고.”
“하, 하지만 대표님…….”
“입 다물어! 그 열 놈도 다 나온 숫자 아니야. 어쩌면 우리 당 인사가 더 많을 수도 있어.”
자수해서 광명 찾은 의원이 얼마나 될까. 수사가 진행되면 민국당 인사가 더 많이 거론될지도 모른다.
6선 의원이자 현 야당 대표인 박병호의 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현 수사 상황이 어떻게 돼?”
“검찰이 구속영장을 재청구했습니다만……. 이번에도 기각될 거 같습니다.”
“그 영장판사들 다 한명그룹 끄나풀이야?”
“예.”
“미련한 놈들. 무조건 수사 막는다고 능사가 아닌데, 왜 그걸 몰라!”
중진 의원 한 명이 조심히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최영석 부회장이 저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혼자 죽지 않겠다?”
“네. 여기저기 뿌려 놓은 돈 많으니 우리 선에서 막으란 뜻이겠죠.”
실제로 최영석의 계산대로 흘러가는 중이다. 정권을 뒤흔들 수 있는 게이트가 터졌건만 야당은 침묵하고, 여당은 묻어가는 중이다.
“솔직히 지금 이대로 계속 흘러가면 저희에게 더 불리합니다. 일각에선 벌써부터 야당의 역할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하아…….”
“이 여론을 무시하면 저희들에게 더 치명타가 될 겁니다.”
현 상황에서 가장 난감한 건 야당이었다. 싸우기 싫은데 계속 옆에서 부추기고 있지 않나.
그렇다고 주먹을 함부로 날릴 수도 없다. 여당도 이미 내막을 다 알고 있을 텐데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니다.
결국 화살은 돌고 돌아 애꿎은 놈에게 향했다.
“검찰을 부추기고 있는 게 공정위라고?”
“예. 이번 게이트 출처도 그쪽입니다.”
“담당자가 누구야?”
“이준철이란 놈인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도 꽤 많이 만졌더군요. 커리어 보면 절대 물러설 놈이 아닙니다.”
박 대표는 혀를 찼다.
“어차피 영장 청구 먹히지도 않을 텐데 왜 자꾸 시도하지?”
“아무래도 짓밟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목적인 것 같습니다.”
“뭐?”
“차고 넘치는 증거 앞에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한 검찰, 이걸 국민들에게 보여 줄 심산이에요. 이것 때문에 계속해서 특검 여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숨이 턱 막힌다.
이런 놈들은 두 번째 영장이 불발된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세 번째, 네 번째……. 보다 못한 국민들이 특검 요구 시위를 벌일 때까지 계속 신청할 것이다.
“꼴통이라는 거지? 주변 말 절대 안 듣는.”
“예. 그나마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뭐지?”
“그 윗선을 압박해 손 떼게 만드는 겁니다. 제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과장이에요. 국장, 위원장급을 꿇게 만들면 놈도 별수 없을 겁니다.”
이번엔 당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나라곤 그 생각을 못 해 봤겠나. 소용없어.”
“예? 설마…….”
“그 위에 놈들은 우리 전화도 안 받아. 애초에 말이 안 됐지. 이런 특급 스캔들을 윗선 허락 없이 터트렸겠나? 든든한 지원이 있으니 설치는 거겠지.”
여기저기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수사기관이 권력자들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건 끝장을 보겠다는 얘기. 이제는 정말 막을 방법이 없다.
모두가 비통한 얼굴로 침묵을 지킬 때, 허겁지겁 한 사내가 들어왔다.
“대표님! 지금 누가 찾아왔는데요.”
당대표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검찰이야?!”
“그게 아니라 공정위에서 찾아왔다고…….”
“공정위?”
뒤이어 등장한 사내.
“처음 뵙겠습니다. 공정위 이준철 과장입니다.”
***
온갖 적대적인 시선이 꽂힌다.
중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걸 보니,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베테랑들이었다.
“아이고. 귀한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대표가 두 손 꼭 잡으며 인사를 건네자 이들의 얼굴도 달라졌다. 한 공간에서 숨도 쉬기 싫을 텐데……. 어찌 보면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당대표가 눈짓을 보내자 중진들이 헐레벌떡 엉덩이를 들기 시작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 선생. 대단한 조사를 많이 하셨다고?”
“대부분 다 과장된 얘기들입니다.”
“과장은 무슨. 가만 보니 내가 국감에서 몇 번 얼굴 본 것도 같은데.”
“아, 그런가요.”
“사실 내가 정치하면서 젊은 사람들 많이 만나 봤는데, 우리 이 선생은 눈에 총기가 남다르구먼. 큰일을 하셔야겠어.”
사람들을 내보낸 게 이런 이유였나. 젊은 놈 비위 맞추는 꼴 보여 주기 싫어서?
“당대표님, 그냥 본론부터 말씀드려도 될까요?”
“뭐, 그럽시다. 이 선생 시간도 없을 텐데.”
“야합하지 마십쇼. 민국당에 더 불리할 겁니다.”
그 한마디에 살가웠던 분위기가 바로 뒤바뀌었다.
“아시다시피 이번에 적발된 의혹만 해도 스무 건이 넘습니다. 아파트 지어야 될 돈을 떡값에 썼으니 현장엔 부실 공사가 난무했죠. 저희가 추산하기엔 약 200여 건의 부실시공이
있었고, 이 중 100여 건이 현장 사망사고로 이어졌습니다.”
“이 선생, 그 소린 뉴스만 틀면 나오는 얘기니 그만합시다. 그래서 뭘 하지 말라?”
“야합요. 사실 현 상황에서 가장 난감한 건 민국당일 거라 생각합니다. 여야 의원들 나란히 다 걸렸으니 강한 메시지를 낼 수 없겠죠. 하지만 이 문제를 야당이 문제 삼지 않으면
누가 거론하겠습니까.”
당대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여당과 타협하지 말고 특검 열어 주십쇼. 솔직히 현 수사 인력으로 저 사건 벅찹니다. 어설프게 해 봐야 핵심 인물들 다 놓치고 잔챙이 몇 마리만 잡다 끝날 겁니다.”
“문제는 그 핵심 인물이 우리 쪽에도 있다는 거 아닌가.”
“어려운 결단이란 걸 알기에 찾아뵌 겁니다. 근데 이 상황에서 목소리 안 내는 건 오히려 여당이 바라는 겁니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왜지?”
“국회에서 특검안 통과 안 시키면 청와대는 춤을 출 겁니다.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이니까요.”
“특검 통과시킨다 해도 우리한테 남는 건 없어.”
“어차피 쌍방이 잘못한 거면 집권 여당에 책임이 더 실리지 않습니까.”
돌연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군. 우리 이 선생은 관료가 아니라 정치를 해야 할 사람이야. 그렇게 우리 부추겨서 결국 특검 통과시킬 작정이지?”
6선 의원이 고스톱으로 딴 게 아니구나. 속내를 들키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럼 여당과 야합하실 겁니까? 이 정도 이슈가 터졌는데요.”
“그런 건 야합이라 부르는 게 아니네. 협치라고 하는 게지.”
이 사람의 저의가 뭘까. 밀고 당기며 자기 쪽에 유리한 수사 결과를 바라는 걸까.
“그럼 여론이 계속 요구하는데 끝까지 침묵을 지키실 겁니까. 지금 기사 보면 한명그룹의 비리보다 비겁한 야당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더 큽니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할 말이 없나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죠. 특검 통과 안 되면 국회 책임론이 더 커질 겁니다. 그 국회는 결국 특검에 합의 안 한 야당입니다.”
“이 선생, 자네는 정치를 너무 모르는구먼.”
“무슨 말씀이죠?”
“상대 물어뜯을 수 있는 이슈 잡았다고 이판사판 나가는 게 정치가 아니야. 그랬더라면 대한당이나 민국당이나 남아나지 않았을걸.”
준철은 입술이 타들어 갔다. 아무리 날고 기는 조사관이라 해도 의원들의 카르텔을 넘어설 순 없는 걸까.
“뭐 지금은 우리가 조금 밑져도 나중엔 우리가 신세를 지겠지. 과거에 서로 신세 진 것도 있고. 그게 정치네.”
“특검…… 안 여실 겁니까.”
“안 한다는 대답은 안 했어. 대신 내 제안도 들어 보겠나.”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목을 축였다.
“언플 그만하고 이 사건 적당히 덮음세. 만약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1번을 약속해 주지.”
1번?
“다음 비례 대표 말이네. 뭐 꼭 1번이 아니더라도 안정적으로 당선될 수 있는 순번을 자네한테 줄 거야.”
“그건 청탁…….”
“국회의원은 생각보다 권한도 많고 힘도 많은 자리야. 자네가 원하는 게 한명그룹의 비리 척결인가? 그러면 금배지 달고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혼내 주라고. 우리 당 이미지도
좋아지겠구먼. 허허.”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설 때 그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정치인은 절대로 대답을 함부로 해선 안 돼. 나도 이 선생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테니, 이 선생도 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