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9
29화
YK암보험 (3)
“박다영이 들어오라 그래. 지금 당장.”
금융감독원 이석춘 과장은 아침부터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당국에서 약관을 검토 중 – 공정위 약관심사과]
지급권고로 끝내려 했던 문제를, 갑자기 공정위가 도와주겠다고(?) 알려 왔기 때문이다.
행정 당국이 가세할수록 사건은 더 커진다.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쥐새끼는 하나밖에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과장님.”
“박 팀장. 요새 나 몰래 뒤에서 재밌는 일 해?”
“무슨 말씀이신지.”
“기회 줄 때 솔직하게 말해. 왜 갑자기 공정위한테 이 공문이 와? 우리가 조사하던 문제를 마침 공정위가 직권조사해?”
과장님이 면전에 대고 공문을 던졌지만 박다영은 쾌재를 부를 뻔했다.
준철의 대답이 모호해 사실상 포기하지 않았나?
그런데 갑자기 공문이 도착했다. 공정위가 지원사격을 예고한 것이다.
“과장님. 그게 아니라요.”
“묻는 말에만 대답해! 너 인맥 동원했냐?”
“부탁한 건 맞습니다.”
“얼씨구? 그 소리가 왜 이렇게 당당하게 나와? 너 이거 엄밀히 말하면 업무 청탁이야. 네가 지금 뭔 일 터트린 줄 알아?”
“이 경우엔 청탁이 아니라 유관 기관 협조죠. 제 자료가 터무니없었으면 그쪽에서 묵살했을 겁니다. 공정위가 보기에도 문제가 있는 겁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답하자 혈압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천방지축 신입 팀장을 타일러야 할 때다.
“박 팀장. 내가 지금 청탁이냐 아니냐 가지고 너랑 싸우는 거 아니잖아? 공직 사회에도 엄연히 매너란 게 있어. 내가 적당히 끝내자 한 사건을, 옆집 가서 지원 요청해 버리는 게
말이 돼?”
“그 부분은 정말 죄송합니다.”
이 과장은 일단 기를 죽이고 본론을 꺼냈다.
“비단 절차뿐만이 아니야. 박 팀장은 이게 부당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 이 바닥에서 20년 넘게 일했다. 연륜 있는 사람이 안 된다 하면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그 이유가 혹시 대법 판례 때문입니까?”
“그래, 그 판례! 대법원에서 요양치료는 필수치료로 볼 수 없다 못 박아 놨어. 유경생명도 이걸 근거로 보험비 지급 거절했는데, 우리가 뭔 수로 징계를 때려?”
짐짓 목소리를 높였지만 박다영의 태도는 기대하던 것과 달랐다.
“과장님. 판례를 어기겠다는 게 아니라, 그 판례가 이 사례엔 적용 안 된다는 겁니다.”
“뭐?”
“암은 발병 부위마다 치료법이 다 달라요. 그럼 케이스마다 된다, 안 된다를 약관에서 다 정해 놨어야죠.”
“아니 지금…….”
“그리고 10년 전에 대법까지 갔는데 유경생명 약관 하나도 안 고쳤어요. 왜 문제 있는 조항인 걸 알면서도 방치했겠습니까?”
공문 왔을 때부터 직감하긴 했다.
역시 좋게 말해서 들어 먹을 놈이 아니다.
“그래서 지급권고로 못 끝내겠다?”
“이미 다섯 차례나 내려 본 거 아닙니까. 근데 그때마다 유경생명은 시간 끌기 바빴습니다.”
“…….”
“공정위가 유권해석 내려 주면, 저희도 징계 명분 댈 수 있어요.”
완강하던 이 과장도 이 대목에선 할 말이 없었다.
다섯 차례나 지급권고를 무시한 유경생명. 이건 금감원의 위신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행정명령은 사실상 1심 판결인데 어떻게 감히 기업이?
그것도 보험사가 시한부 환자와 시간 싸움을 벌여 쟁취해 낸 승리다.
과장님의 반응이 사뭇 달라지자 박다영도 말을 아꼈다.
이윽고 침묵이 끝났을 때, 이 과장이 고개를 치켜들고 물었다.
“박 팀장.”
“예.”
“만약 공정위에서 유권해석 안 내려 주면?”
“의료법상 요양병원도 의료 시설이니 공정위가 절대…….”
“아니. 묻는 말에만 대답해. 만약 공정위에서 유권해석 안 내려 주면?”
박다영은 과장님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지 곧 눈치챘다.
“그럼 저도 더는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나 그렇게 돌려 말하는 거 싫어해.”
“포기하겠습니다.”
확실한 대답이 나오자 그가 펜을 집어 들었다.
“불가근, 불가원. 행정 당국은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아야 돼. 노골적으로 한쪽 편들지 마. 안타까워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이윽고 그는 서류에 사인을 하며 그녀에게 건넸다.
박다영은 감격하여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그래서 많이 깨졌어?”
“어휴- 그게 어떻게 깨진 거예요. 그 정도면 과장님도 좋게 넘어가 주신 거지. 엄밀히 말해 상사 밟은 거잖아요.”
“얘기가 그렇게 되나.”
“호호. 신경 쓰지 마요. 처음부터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두 번째로 만난 박다영은 첫 만남보다 훨씬 더 낯선 느낌을 주었다.
뭐랄까. 김성균과 정반대의 사람이랄까?
사실 이 문제는 금감원에서 내부고발자로 찍힐 수 있는 문제다. 일이 틀어지면 내부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물론, 징계까지 열릴 수 있었다.
근데 저렇게 태연히 웃어넘기다니.
과거 김성균은 있던 문제도 덮는 사람이었지, 그녀처럼 조용한 문제를 크게 키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솔직히 세상 사람들은 다 김성균처럼 산다.
그래서 그녀가 더 신기하고 낯설었다.
“아무튼 선배. 정말, 너무 고마워요. 난 솔직히 선배 반응이 미지근해서 완전히 다 포기하고 있었어요.”
“참 안 믿기는 말이네. 다른 사람 알아보고 있었을 것 같은데?”
“켁켁. 아이고 차라리 귀신을 속이지. 우리 과장님보다 더 무섭네.”
그녀의 반응이 재밌어 준철도 웃음이 났다.
그렇게 자연스레 손수건을 건네자 또다시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엥?”
“……왜?”
“선배, 이런 것도 가지고 다녀요?”
“……나 원래 촌스러운 거 알잖아. 뭘 자꾸 새삼스럽게 놀라.”
“이상하다. 이런 종류의 촌스러움이 아니었는데.”
그녀의 질문이 집요해지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일정부터 논의하자. 우리도 이제 전후사정 다 파악했으니 유경생명 만나 봐야 돼.”
“에휴…… 그러네요. 큰 산 하나 넘은 줄 알았더니 아직 문턱이네.”
“근데 공정위까지 가세한 걸 알면 그쪽도 분위기 짐작할걸.”
“반발이 많이 심하겠죠?”
“중징계 떨어지기 직전인데 모든 연줄 다 동원하겠지. 솔직히 유경생명만 반발하면 다행이게. 유권해석은 타 보험사 약관에도 똑같이 적용돼. 아마 전 보험사 다 달려들 거야.”
공정위가 문제 있는 조항이라 해석하면 전 보험사가 요양치료 지원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약관에 명시해야 한다.
한 번 잡은 가입자는 무덤까지 쫓아간단, 보험사 철칙에 따라 안 된다고 하진 않겠지.
은근슬쩍 특약으로 빼놓거나, 갱신할 때 갑자기 개정 약관으로 바꿔 버리는 꼼수도 막아야 한다.
“비단 그뿐이 아니야. 문제가 있는 조항이라면 소급적용 어떻게 할 건지 전부 다 맞춰야 해.”
“선배. 제가 그냥 직설적으로 하나 물어봐도 돼요?”
“말해.”
“공정위 내부에선 유권해석 어떻게 생각해요. 안 하려는 분위기예요?”
준철은 잠시 고민하다 솔직하게 털어놨다.
“솔직히 신중하자는 분위기야. 잘못 내렸다간 전 보험사가 다 반기를 들 테니까.”
“……그렇군요.”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 우리도 중간에 합류한 후발 주자잖아? 되도록 보험사, 가입자 양측 의견 다 들어 보고 싶어. 물론 금감원 권고를 다섯 번이나 어겼던 건 핵심 고려
대상이야.”
“그럼 나 좀 안심해도 돼요? 호호.”
그녀가 애교 섞인 말투로 말하자, 근엄한 얼굴을 유지하던 준철도 웃음이 나왔다.
“뒷일 무서워서 쫄지는 않아.”
“오케이- 그럼 이렇게 해요. 공정위는 가입자 만나 보고, 보험사도 만나 보고. 우리 금감원은 소급적용분 및 요양지원금 다 계산해 보고.”
“좋아.”
“선배 가입자들부터 먼저 만나 주세요. 알다시피 다들 투병 중이라 하루가 급해요.”
“그럼 오늘 날짜 잡을까?”
“다음 주 월요일 어때요. 제가 최소 여덟 분은 모을 수 있는데.”
약속 장소와 날짜를 잡고 준철이 일어날 때, 그녀가 조심히 옷자락을 잡고 말했다.
“선배. 다시 한번 고마워요. 이분들 정말 이 순간만 기다렸어요.”
***
“반장님. 얼마나 걸립니까?”
“한 시간이면 갑니다.”
“얼마나 모이셨대요?”
“총 여덟 분요. 그중 세 사람은 현재 투병 중인 환자고, 나머지는…… 유가족이랍니다.”
만남 장소는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요양치료센터로 정해졌다.
김 반장은 접견인 신상에 대해 건넸지만, 솔직히 준철의 눈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유가족 분이면 그…….”
“네. 금감원에서 지급권고했는데, 유경생명에서 거절한 사람들이에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가족이 죽고 나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을까?
김 반장의 설명을 함께 듣는 반원들도 씁쓸했다.
만약 보험사 주장이 맞는다면 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소식을 전해야 할 거다. 아무리 엄정하게 판단해야 해도 인지상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때문인지 한 시간가량의 여정에는 불편한 침묵만 감돌았다.
그렇게 겨우 도착했을 땐, 머리를 삭발한 세 명의 환자가 정문에 나와 있었다.
반원들은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연로한 노인을 예상했는데, 세 사람 모두 또래로 보이는 3-40대 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정위…….”
“와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많이 기다렸어요.”
인사를 채 마치기도 전에 그들이 눈물을 훔치며 손을 덥석 잡았다.
당혹스럽기보단 덩달아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병보다 더 아픈 건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준철은 고개를 저었다.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먼저 말씀드릴게요. 저희는 오늘 전후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온 겁니다.”
“네.”
“보험사에도 갈 거예요. 최종 판단은 종합적인 요소를 고려한 후 내릴 겁니다.”
그 누구 편도 아니란 뜻으로 말을 했는데, 이미 감격해하는 이들에겐 소용없었다.
이윽고 자리를 옮기자 수척해 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저…… 선생님.”
“말씀하세요.”
“보통 보험약관이 애매하면 가입자 편이라 들었습니다만.”
“네. 근데 이 경우엔 치료법이 애매한 경우라서요. 법으로 따지면 좀 복잡해집니다.”
그리 대답하자 중간에 있던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저는 보험심사과에서 이미 재판 결과도 나왔다고 들었어요. 이건 뭔가요?”
“판례요. 조사해 보니 이미 비슷한 분쟁으로 대법까지 간 전례가 있더군요.”
“유, 유경생명이 이겼습니까?”
“네. 요양치료는 필수치료로 볼 수 없다. 이게 10년 전 대법 판례였습니다.”
“……그럼. 저희한텐 희망이 정말 없는 겁니까?”
젊은 여성이 불안에 떠는 눈빛으로 묻자 준철이 답했다.
“확답드릴 수 없지만 지금은 그게 더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