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92
292화
특검 불발
“이제 와 진위 여부 따져서 뭐 합니까. 내가 한명건설한테 돈 받았으면 우리 합의 내용은 없던 게 되는 겁니까? 진짜로 끝장 볼까요.”
박병호는 짜증스런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그거 아니면 우 대표님도 그만하십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고삐 풀린 망아지 새끼를 어떻게 다루느냡니다. 난 솔직히 좀 두렵습니다. 제1야당의 대표 뒤도 터는 놈들이 여당
고위직들 뒤는 안 털까.”
“놈들이 원하는 건 우리 흔들어서 특검 받아 내는 겁니다. 초당적으로 대처하잔 합의 잊지 마십쇼.”
통화가 끝나자 박병호의 핸드폰은 박살이 나 버렸다.
어제 새벽에 터진 속보, 박병호와 한명건설의 유착 관계는 단숨에 실검을 장악하고, 민국당을 화살받이로 만들어 버렸다. 한명건설의 숨겨 둔 해외 계열사와 이를 통해 받은 비자금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다.
이는 최영석이 특별히 신경 써 흔적을 지웠던 내용들이다. 그게 터졌다는 건 핵심 내부자를 회유했단 것이다.
“겁 없는 새끼!”
예상치 못했다. 설마 제1야당 대표의 비리까지 캘 줄이야.
여론이 돌아서자 당 내부에선 벌써 지휘부 해체론이 떠올랐고, 비상대책위 인사들이 물망에 올랐다. 그것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 이 문제는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매듭지어야 한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여야 모두 나란히 공멸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
박병호는 박살 난 핸드폰을 보며 한숨 쉬곤 앞에 있는 유선 전화를 들었다.
“우 대표님, 나 박병호입니다. 이 문제 시간 끌어서 좋을 거 없을 것 같은데…… 청와대랑 날짜 한번 잡아 주십쇼.”
***
“사람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여야 간담회도 거부하신 박 대표님이 우릴 먼저 보자 하시고.”
“싸울 땐 싸우더라도 합의할 땐 합의해야죠. 대통령께서 직접 오실 줄 알았습니다만 왜 민정수석님이…….”
“요즘 시국에 청와대와 야당 대표가 만나서 좋을 게 뭐 있습니까. 보는 눈이 많아 부득이 제가 나온 점 이해하십쇼.”
대통령을 대신해 나온 민정수석은 한껏 고압적인 자세였다.
큰소리 떵떵 치던 민국당 대표가 겸손한 태도로 자리를 청했다. 하루 만에 전화가 온 걸 보니 뉴스에 터진 내용 모두 사실인가 보다.
“차 식겠습니다.”
“그럼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죠. 국회에서 특검 들어가면 청와대는 어쩌실 겁니까?”
“국회에서 통과된 특검을 청와대가 뭔 수로 막겠습니까. 여당도 죽고, 야당도 죽고, 한명그룹도 함께 죽어야죠.”
“방법이 없단 뜻이군요.”
“아, 하나 남은 칼은 있습니다. 국회에서 추천한 3명의 특검 후보 중에 가장 유리한 인사로 특검장을 선임할 겁니다.”
“결국 특검 통과시키지 말란 협박이시군요.”
박병호가 껄껄 웃었지만 민정수석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반대로 우리도 물어봅시다. 진짜로 특검 통과되면 야당은 어쩌실 작정입니까?”
“민국당이야 집권당도 아니고, 걸린 인사도 더 적으니 피해는 더 적지 않겠어요?”
“당의 입장을 묻는 게 아닙니다. 박 대표님의 거취에 대해 묻는 겁니다.”
박병호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졌습니다. 대책이 없다. 이 말씀을 듣고 싶으신 게로군요.”
“솔직하니 좋네요.”
“민정수석님, 사과를 할 게 있다면 반드시 사과하고, 오해를 풀 게 있다면 반드시 오해를 풀겠습니다. 근데 지금은 급한 불부터 꺼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감합니다만 현 상황에서 대책이 있습니까? 건수 잡은 공정위의 횡포가 더 심해질 텐데.”
“그럼 더는 나대지 못하게 팔다리 잘라 냅시다.”
민정수석이 차를 쏟았다.
“뭐요?”
“내가 그 젊은 놈을 만나 봤습니다만 도무지 말이 통하는 놈이 아닙니다. 이런 말 부끄럽지만 제가 비례대표 제안도 해 봤습니다.”
“아니, 그럼 그걸 거절했단 말이오?”
“네.”
“대체 이유가 뭡니까. 한명그룹 친다고 자기에게 돌아가는 이익 하나 없을 텐데 대체 왜…….”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단순한 정의감, 의협심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이다.
출세욕이 강한 놈들은 비례대표를 거절할 리 없다. 금배지에 뜻이 없더라도 대개는 자리 하나는 약속 받는다.
돈이 목적인 놈들은 더 단순하다. 은퇴 후 재취업 자리, 혹은 흔적이 남지 않는 거래 내역을 통해 침묵의 대가를 보상 받는다.
하지만 놈은 이 모두에 해당하지 않았다.
“정말 예측이 불가한 놈이란 말이오?”
“상황을 보십쇼. 여야가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 희생양 정해 줬는데, 당대표인 내 비리까지 털며 여론에 불을 지피고 있어요.”
“하아…….”
“이건 진짜로 그 목적이 특검 그리고 수사란 뜻이지요. 솔직한 제 심정으론 한명그룹의 파멸을 바라는 게 그 젊은 놈의 목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정수석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그 비정상적인 일들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으니.
“이런 부류는 절대 좋은 말로 나가선 안 된다는 걸 아시지요?”
“기고만장해질 타입이지.”
“그러니 팔다리부터 잘라서 기 좀 죽여 놓읍시다.”
박병호가 내민 서류엔 공정위 인사명단이 나와 있었다. 준철의 위에 있는 국장, 국장 위에 있는 처장, 그렇게 위원장까지. 총 다섯 명의 직속상관 이름이 살생부에 적혀 있었다.
“사실 이놈들은 진작 정리했어야 맞습니다. 그 젊은 놈이 위에랑 상의도 없이 이 사건에 불을 지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VIP께서도 의심하고 있는 바요.”
“그 위에 놈들 모가지 날려 버리십쇼.”
“그래도 임기가 보장된 직책들이라 함부로 할 순 없는데…….”
“버티면 재임 자료 싹 털릴 각오해야 할 겁니다. 권력자가 마음만 먹으면 없는 죄도 만들 수 있다는 걸, 모르진 않을 겁니다.”
사임 요구를 버텨 낼 수 있는 공무원이 얼마나 될까.
지난번 공정위 법톡 사건 때 전임자가 얼마나 큰 치욕을 받으며 물러났는지 모두가 알고 있다.
그 사건도 결국 무혐의로 끝났지만, 국민들은 아직까지도 그 사건을 공정위 고위직들의 비리 사건으로 기억한다.
“뭐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박 대표님의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VIP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군요.”
“네. 아마 이렇게까지 압박하면 그놈도 더 이상 버텨 낼 재간이 없을 겁니다.”
“아무렴. 조직 수장 다섯 명이 날아가는데 당해 낼 재간 없지. 그 밑에 있는 팀장들도 더 이상 그놈을 따르지 않을 테고.”
민정수석은 흡족한 얼굴로 덧붙였다.
“기대 없이 나온 자린데 좋은 소식을 들고 가는군. 이 얘긴 대통령님께 전달하겠습니다. 대답도 곧 나올 겁니다.”
***
“뭐? 그게 진짜야?”
“그렇습니다……. 갑작스럽게 내려진 인사 발령이라고.”
“민감한 시국에 왜 인사 결정이 갑자기 이뤄져?! 이거 대체 어디서 나온 결정이야? 위원장님이야?”
“아닙니다. 위원장님이야말로 이번 물갈이 대상 1호입니다.”
준철은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속 보이는 보복 인사가 있을까?
공정위 고위직 다섯 명을 물갈이시켜 버릴 수 있는 건 청와대밖에 없으며, 야당의 열렬할 협조가 가미되었단 것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저희가 박병호 비리를 터트린 게 기폭제가 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팀장들은 모두 낯빛이 어두워졌다.
권력의 무서움을 이제야 실감한 듯하다. 눈치 빠른 몇몇은 이 칼바람에 자신까지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원칙대로 한다, 그냥 진행해.
라는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이제는 내뱉지도 못했다. 실무자들의 사기가 땅끝까지 처박혔으니 눈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당분간은…… 기다립시다. 일단 정지.”
“…….”
“서 팀장, 나 국장님 뵙고 올 테니 일단 대기하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서 팀장과 배 팀장은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던 과장 아닌가. 다른 팀장들도 모두 갈피를 잃은 눈동자였다.
***
상사 잡아먹는 부하 직원.
전임 국장이 쫓겨났을 때 껌 딱지처럼 들러붙은 멸칭이다. 외압을 막아 준 대가로 그는 멀쩡한 재임 자료를 다 털려 비리 공무원이 됐고, 쫓기다시피 사직서를 제출했다. 명백한
권력자들의 보복이었지만, 이제는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이도 없다. 애꿎은 전임 국장만 비리 공무원으로 기억될 뿐.
전임자 다섯 명이 깔끔하게 옷을 벗는 이유는 바로 이 권력의 비정함을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올 시간 있나? 지금 한창 바쁠 때 아니야?”
국장실에 들어서자 이미 집무실이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대답도 없구먼. 이제 나갈 사람이다 이거냐?”
“죄송합니다, 국장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뭐가 죄송해. 내가 이 과장한테 미안해해야지.”
무슨 말이지?
“민정실에서 갑자기 연락 오더니 우리 다섯 명을 부르는 거야. 난 또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엄정한 수사를 부탁한다고 할 줄 알았다. 근데 갑자기 사건을 덮으라지 않겠어?”
“…….”
“해서 나는 못 하겠으니, 말 잘 듣는 사람 알아보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내가 일어나니 위원장님까지 줄줄이 일어나더구먼.”
유 국장은 껄껄 웃었다.
“뭐 대통령한테 개긴 공무원이 얼마나 갈 수 있겠냐. 일어난 순간 각오했어. 나가야 한다고.”
“그래서 사표를 직접 쓰신 겁니까.”
“내가 계속 버티면 전임자랑 똑같은 꼴 당하지 않겠냐. 내 재임 자료 털면서 꼬투리 잡으려 하겠지. 아, 오해는 마라. 깨끗하게 살았다. 단지 놈들이 이슈 물타기 하는 꼴 안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정말 미련이 없는 걸까.
유 국장은 덤덤한 얼굴로 집무실을 정리했다.
“한데 위원장님은…….”
“위원장님도 성격은 나랑 같아. 그때 함께 개겼네. 사표 처리는 같이하게 됐어.”
이번 조사의 최종 재가는 위원장에게 받은 거다. 당연히 책임을 피할 수 없었고, 물러나려면 함께 물러나야 한다.
짐 가지를 다 챙긴 유 국장이 말했다.
“그나저나 자네도 참 팔자가 사납구먼. 어째 두 명의 국장이 줄줄이 날아갔으니, 아, 위원장님까지 합하면 3명인가.”
미안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런 준철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더 질기게 못 버텨 줘서 미안하다. 실무자들 보호하려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외풍을 막아 줘야지. 근데 역부족이야. 인사권은 거기에 있으니. 해고당하듯 쫓겨나니 후임자도 금방 올
거다. 아마 수사를 더 어렵게 할 거야.”
무슨 마음인지 안다. 이젠 외풍이 아니라 내풍을 더 신경 써야 한다. 새로 온 인사는 분명 코드를 맞춘 사람일 테니 말이다.
“근데 박병호 의혹은 다 사실이냐?”
“예. 몇 번이나 교차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수상한 자산 내역 해명할 기회를 여러 차례 줬는데, 아직도 해명을 못 합니다.”
“그럼 됐네. 소신 죽이지 마. 특검까진 아니어도 더 핵심적인 세력 끌어내서 조사해. 우리가 외압을 견뎌 주진 못하지만 여론은 아직 이 과장에게 우호적이야. 반드시 소임
다하라고.”
그때 별안간 바깥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이사 가느라 분주하군요. 늙은 사람이 괜히 찾아온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는 바로 민국당 대표 박병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