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93
293화
특검 불발 (2)
남의 집 안방까지 쳐들어온 이유가 뭘까.
대세는 이미 넘어왔다는 자신감일까.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지병 때문에 사퇴를 하신다고요.”
“하하, 언론 발표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된 겁니까? 졸지에 환자가 됐군요.”
“그래도 적당한 때 백기 잘 들었습니다. 더 버텼으면 정말 환자가 됐을 겁니다.”
박병호는 소름 끼치는 협박을 농담처럼 던졌다. 은퇴하고 나서 얼씬도 하지 말라는 경고겠지.
만약 이 경고를 무시하면 재임 자료가 몽땅 털리고, 검찰 포토 라인도 서게 될 것이다. 고위 관료에게 누명 씌우는 건 국회의원에게 일도 아니다.
“농담이 좀 심하십니다? 내가 꼭 환자 되는 게 무서워서 물러나는 건 아닌데. 괜히 내 재임 자료 털면서 시선 분산 시킬까 봐 조용히 물러나는 겁니다.”
“하하. 국장을 고스톱 쳐서 따낸 건 아니구먼. 맞아, 우리는 이슈를 이슈로 덮는 사람들이지. 유 국장이 더 버텼으면 험한 꼴 많이 보셨을 거요.”
여야가 뒤에서 합의를 단단히 했나 보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람 협박하는 걸 보면.
“나 이렇게 험한 말 하려고 온 건 아닌데. 불필요한 기싸움 그만합시다.”
“여긴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내가 한명그룹과 붙어먹었단 유언비어가 계속 나오는데 오늘은 그 오해를 좀 풀려고 왔습니다.”
박병호는 슬쩍 준철에게 곁눈질했다.
적당히 장단 맞춰 주던 유 국장도 그 광경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이 과장! 너 박 대표님한테 소환장 보낸 거 있어?”
“……아니요.”
“그럼 면담 날짜 잡은 거 있어?”
“……없습니다.”
“들으셨습니까, 대표님? 없답니다. 이건 경우가 아니죠! 권력자가 왜 자기 담당 조사관을 직접 만나겠다는 겁니까.”
조사자와 피조사자는 절대로 사적인 만남을 가지지 않는다. 특히나 그 상대가 권력자라면 더욱 조심해야 할 문제다.
“용무가 있으면 정식 조사 절차를 거치십쇼. 대표님과 이 친구가 만나야 할 공간은 취조실이나 면담실. 딱 이 두 곳입니다.”
“쯧쯧- 하여간 좋게 말해 주면 못 알아먹어.”
“뭐요?”
“마지막까지 외압 막아 주는 직속상관? 눈물겹구먼. 근데 꼴값 떨지 마. 자넨 그냥 망아지 새끼 잘못 길들여서 매질 대신 당하는 어미 노새일 뿐이야.”
만약 국장이나 위원장 선에서 잘랐다면 이 사건은 이렇게 커지지도 않았을 거다.
“청와대에서 이미 사표 수리 다 했는데 언제까지 이 집무실에서 주인 행세 할 거야? 썩 안 비켜?”
또다시 발끈하려던 유 국장을 준철이 제지했다.
“국장님,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번 만나 봐야 했습니다.”
이에 유 국장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제 어차피 물러가는 몸. 남은 실무자들을 생각한다면 박병호를 자극해서 좋을 건 없다.
그는 분을 삭이며 짐 가방을 들었다.
“그럼 내가 자리 비켜 주지. 여기서 면담해라.”
“……예.”
“혹시 모르니까 핸드폰 녹음기 켜 둬. 부당한 외압이나 협박 들어오면 증거로 써야 할 거 아니야.”
이건 박병호에게 하는 소리다.
그는 나가기 전 박병호를 다시 노려보며 말했다.
“대표님, 이빨 빠진 호랑이한테도 발톱은 있습니다.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불청객은 어서 가시구려. 시끄럽구먼.”
성의 없는 대답에 울컥했지만, 또다시 화를 내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유 국장이 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준철은 더욱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곧 이 자리의 주인은 바뀔 것이다. 청와대에 더 충성하고, 정치권 눈치 보는 놈으로.
유 국장이 자리를 벗어나자 박병호는 마치 제집 안방인 마냥 상석에 앉았다.
“내 참, 누가 누구더러 호랑이래. 내 눈엔 고양이 새끼구먼. 앉아요, 이 선생.”
“말씀하십쇼. 서서 듣겠습니다.”
“쯧쯧- 이쪽도 여전히 상황 파악 못 하는구먼. 보다시피 자네 상사가 자네 때문에 날아가 버렸어. 나한테 언제까지 뻗댈 거야.”
이전보다 훨씬 더 고압적인 말투다. 공정위 고위직들을 다 옷 벗겼으니 과장쯤은 우습게 보이겠지.
“이래 봬도 나 이 선생한테 예우 많이 해 줬네. 자네는 쉽게 받아 냈지만 비례대표 1번은 그리 쉽게 주는 자리가 아니야.”
“그건 예우가 아니라 청탁입니다. 그런다고 이 사건 덮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내 등에다 칼을 꽂아? 그러면 내가 자네한테 엎드려 절이라도 할 줄 알았나?”
그걸 기대하진 않았지만, 바로 고위직들을 잘라 내며 수사팀을 압박할 줄도 몰랐다.
새삼 권력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 난다.
“과거 얘기는 됐고 오늘은 미래지향적인 대화 좀 함세. 내가 그때 한 제안은 아직 이 선생한테 유효해.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그 성질머리 죽이고 내가 주는 동아줄 잡아.”
“……비례대표가 그런 용도였습니까. 걸리적거리는 놈들한테 한 자리씩 내주는.”
“이제야 정치를 좀 아네.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말 들어 봤지? 자네가 나를 적으로 생각한다면 더 가까이 두게.”
놈의 목소리가 더욱 득의양양해졌다.
“자넨 더 이상 이번 수사 진행할 수 없어. 고위직들이 다 잘려 나가는데, 밑에 팀장들이 자네 말을 계속 따르겠나?”
어쩐지 정의로운 검사가 왜 입당하고 더러운 정치에 뛰어드나 했더니.
인맥을 동원해 팔다리 다 잘라 버리고 당근을 내밀면 아무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여당과도 이미 협의가 다 끝난 문제네. 자네 비례대표 문제엔 아무도 시비 걸지 않기로 했어.”
“그럴 필요 없을 겁니다. 주식은 할 줄도 몰라서 건들지도 않았고, 가진 건 전세 보증금이 전부라서요.”
“사생활도 깨끗하시다? 흐하핫. 그럼 내 수고가 하나 줄었군. 볼수록 마음에 들어.”
살짝 호의를 보여 주니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해한다.
그 표정을 보는데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스쳤다.
눈 한번 딱 감고 저 손을 잡으면 모두 없던 일이 된다. 유 국장과 공정위원장은 다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으며, 박병호의 비호 아래 탄탄대로 출세 코스를 밟을 수 있다.
게다가 이는 자연스레 한명그룹과 다리가 생긴다는 얘기.
주기적으로 용돈을 챙겨 받으며 평생을 호의호식할 수 있다.
그깟 양심 한 번만 저버리면.
“대표님, 저도 부탁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한명그룹이 공사비를 엄한 곳에 쓴 바람에 제대로 된 공사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삭감된 공사비는 하청들을 후려치며 손해를 보존했고, 그 과정에서 부실 공사로 인명 피해가 일어난
사건도 많았습니다.”
이 모두 언론에 기사도 한 줄 나가지 않았던 사건들이다.
“이런 대기업들의 갑질과 횡포를 방지하라고 있는 게 국회 아닙니까? 정치권 피해 최소화하겠습니다. 덮을 수 있는 비자금은 덮고 기업인들 위주로 처벌하겠습니다. 대표님이야말로 제가
드리는 동아줄 받아 주십쇼.”
특검 통과시킬 수 있다면, 그깟 당 대표가 받은 뇌물쯤이야 얼마든 덮어 줄 수 있다. 한명그룹과의 연결 고리만 끊는다면 뭐든 다 선처해 줄 수 있다.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군.”
하지만 이런 진심이 닿지 않았나 보다.
박병호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자넨 권력을 너무 물로 봤어. 뼈저리게 후회할 거야.”
***
이변은 없었다.
공정위 수뇌부의 사임은 기정사실화되었고 즉각 전파를 탔다.
이를 두고 외압 논란이 튀어나왔지만 겨우 볼멘소리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가진 모든 의원이 나란히 침묵해 버렸으니.
조직의 수장들이 날아가자 수사팀의 사기도 땅을 기었다. 이는 수사를 중단하라는 정치권의 명백한 협박이었으며, 현실적으로 수사를 더 진행시킬 방법도 없었다. 수사팀뿐 아니라 공정위
전체가 다 초상집 분위기였다.
“옌장할……. 그 과장 놈은 너무 설치는 거 아니야?”
“왜 아니겠어. 전임 국장님도 불명예 퇴진시키더니 현임자도 잡아먹는구먼.”
“염치가 있으면 지가 옷 벗고 나가야지.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이게 뭐야?”
옳고 그름을 떠나 이 책임은 결국 준철이 떠안게 되었다. 공직 사회에선 무능한 놈보다 시끄러운 놈을 더 싫어하는 법이니.
전 직원들이 준철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고 수사팀도 왕따 되기 시작했다.
땅에 떨어진 수사팀의 사기는 아침 회의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과장님, 검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만 3차 영장 신청은 하지 않겠다는군요.”
“현실적으로 이젠 접는 게 맞습니다. 더 이상은 무리예요.”
서 팀장과 배 팀장을 제외한 나머지 팀장들 전체가 다 반기를 들었다. 그들의 얼굴엔 이미 불만이 가득했다.
마음 같아선 그들을 질책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번 수사를 맡게 됐단 이유 하나만으로 이미 왕따를 당하고 있는 그들 아닌가. 이번 이력 때문에 앞으로 인사 불이익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이 선에서 마무리합시다.”
준철도 전의를 상실했다.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모든 자료 검찰에 넘겨 주세요. 수사팀은 여기서 해체하겠습니다.”
***
한명건설이 맡은 아파트는 부실투성이었다.
공사 대금 상당수가 로비 자금으로 쓰였으니 제대로 된 공사가 이뤄질 수 없었다.
문제는 이 피해 대부분 하청에게 전가됐다는 것.
하청사는 삭감된 공사비를 맞추느라 졸속으로 공사했고, 이 과정에서 수십 건의 산재사고와 사망사고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생을 마감한 억울한 죽음들이 얼마나 많을까?
“…….”
알고 있었다.
그런 부작용을 다 알면서도 하청을 쥐어짜고 공사비를 삭감한 게 김성균이었으니까. 한명건설 본부장으로 지내며 직접 덮은 산재사고만 수십 건이다.
유가족들에겐 안전수칙 위반 등의 핑계를 대며 희생자를 두 번 죽였다.
“…….”
바로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전생의 죄를 이번 생에 속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언론에 한명건설의 민낯을 폭로하면 모두가 동조해 줄 거라 생각했고, 국회도 더 이상 비호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권력과 결탁한 재벌의 힘은 막강했다.
나는 여전히 무기력한 존재다.
“…….”
하늘은 내게 왜 이런 시련을 내렸을까.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잔인한 현실을 한 번 더 확인하라는 계시였을까.
“…….”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인정해야겠다. 전생이든 이생이든 최영석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것.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가 보다.
“…….”
그렇게 씁쓸한 얼굴로 담뱃재를 털어 낼 때, 별안간 우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옥상 문이 벌컥 열렸다.
“과장님…….”
서 팀장이었다. 사색이 된 얼굴의.
착잡한 얼굴로 녀석을 보기도 잠시.
“영주에서…… 아파트가 무너졌답니다.”
“뭐?”
“한명건설이 공사 중이던 아파트가 갑자기 무너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