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97
297화
참회록
동부구치소 변호사 접견실.
수인복을 입은 최영석과 초호화 변호인단은 한마디도 입을 열지 못했다.
현직 의원 30여 명에게 영장이 발부된 초유의 사태다. 양당 지도부는 연루된 자들에게 탈당을 종용했고, 그래도 버티는 놈들은 제명시켜 버렸다.
사력을 다해 한명그룹과의 연결 고리를 끊는 모양새.
정치권에서 손절에 들어갔으니 재판 결과는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다행히 구조 작업은 거의 막바지에 이른 것 같습니다.”
김 비서실장이 눈치를 살피다 말문을 열었다.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는 최영석을 대신해 수석변호사가 물었다.
“피해 규모가 얼마나 됩니까?”
“한국인 8명에 신원 불명 사망자 15명 정도……. 다행히 총 사망자가 서른은 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 실장님, 혹시 유가족들은 만나 보셨습니까?”
“사과하려 몇 번 시도해 봤습니다만 만나 주질 않더군요. 보상 얘긴 아직 꺼내 보지도 못했습니다.”
사람이 죽은 건 딱히 이들에게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 죽음에 얼마의 대가를 치를지가 관건이다.
수석변호사는 눈치를 살피다 말문을 열었다.
“보상은 넉넉잡고 10억 정도로 계산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 정도면 산재 사망사고 최대 보상금액이니 그쪽도 별 불만 없을 겁니다.”
“물론 이는 한국인 인부 기준입니다. 신원 불명의 사망자들에겐 다른 기준이 적용될 겁니다.”
신원 불명자는 불법체류자를 뜻한다.
이들은 산재 보험 가입자도 아니며, 국민들의 동정심도 덜 받는다. 이는 곧 더 싼 보상금을 줘도 된다는 얘기.
“사실 그들은 보상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10억의 반만 줘도 본국에선 어마어마한 돈이니.”
“중요한 건 불체자와 한명건설의 연결 고리를 끊는 겁니다.”
“불체자 고용은 원청이 몰랐던 얘기가 돼야 합니다. 사실 이건 다른 문제로 불거질 수 있어요.”
“결국 하청사장들이 당국에 잘 말해 주는 게 관건인데…….”
“그만들 해.”
긴 침묵 끝에 최영석이 입을 열었다.
“불체자든 한국인이든 보상은 다 10억으로 정리해. 그쪽 문제는 뒷말 나와서 좋을 게 없으니.”
변호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사망자들에게 10억씩 지급해도 겨우 230억이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골치 아프고 막대한 보상 문제가 남았다.
“김 실장, 조합원들 반응은 어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건 겨우 수백억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천억대의 문제다.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시공사를 바꾸겠단 기류가 강하다고.”
“만약 바꾸면 어떻게 되지?”
“35개동 아파트를 모두 철거하고 저희가 위약금까지 내야 합니다. 조합원들이 따로 제기하는 민사소송에서도 저희가 불리하고요.”
막연한 숫자에 맥이 탁 풀려 버린다.
서른다섯 채 의 아파트를 짓는 데만 해도 수천억 원의 돈이 들었다. 만약 조합원이 계약을 취소하면 이걸 다 허물어야 하고, 공사 기일을 맞추지 못한 위약금까지 따로 내야 한다.
건설업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손실액이다.
“막을 수…… 없겠나?”
최영석이 손을 달달 떨며 물었다.
“많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건물 다른 동에서도 비슷한 하자가 계속 발견되고 있어서…….”
“만약 그거 다 보상한다고 하면?”
“이런 말 뭣하지만……. 이미 한명건설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어지간해선 마음을 돌리지 못할 겁니다.”
영주 아파트는 전국에 보도되며 이미 국민들에게 나쁜 이미지가 각인이 되었다. 완공하고 난 이후에도 붕괴 아파트란 꼬리표가 따라다닐 것이다.
단순히 이미지만 나쁜 게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붕괴된 101동의 하자가 다른 동에서도 발견되었으며, 나아가 영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1군 중의 1군이라
불리던 한명건설의 입지는 끝을 모르고 추락 중이었다.
그 끝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떠들기 좋아하던 변호사들도 이 문제 앞에선 입을 다물고 있는 수밖에 없다. 사망자들이야 돈 몇 푼 주면 입막음할 수 있지만, 조합원은 다르다. 어쩌면 이번 붕괴 사고로 수조 원의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지금 우리 자금 여력은 어떻게 되지?”
“사실 사내 유보금은 한 푼도 없습니다. 한솔테크 인수합병 때 대출까지 받아 주식을 인수했으니까요.”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웃돈까지 내가며 인수했던 주식. 이제는 그게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기나긴 회의 끝에 결국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막대한 소송은 예정되어 있으며, 이를 감당할 돈은 없다.
최영석은 담배를 지져 끄더니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럼 결국 그 방법밖엔 없군.”
이제는 죽는 것보다 더 싫은 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바로 자신의 지분을 정리하는 것.
“김 변호사……. 혹시 이거 담보로 대출 좀 받아 볼 수 없나?”
“어려울 것 같습니다. 향후 주가 전망이 불투명한지라……. 설사 담보로 설정한다 해도 주가의 50%도 안 될 겁니다.”
한명건설의 주가는 이미 유례없는 하락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걸 담보로 받아 줄 은행은 없다.
“그럼 PF대출 만기 좀 늘려 볼 수 없나. 만기만 늘려 주면 자금 좀 융통할 수 있는데.”
“국민들 눈치 때문에 그것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실 만기 연장은 청와대에 너무 큰 부담입니다.”
끝까지 지분을 방어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요원했다.
결국 최영석은 백기를 들었다.
“김 실장, 주가 공시 띄워. 내가 사재 출현한다고……. 내 지분 일단 10%만 정리해.”
10%면 택도 없을 텐데……. 전량 매도해도 부족할 텐데.
“그리고 이제부턴 선택과 집중을 하자. 죽은 사람 보상 문제는 그냥 뒷말 나오지 않게 끝내. 가장 중요한 건 조합원들 마음 돌리는 거야. 조합원들 최대한 달래서 영주 아파트
완공한다.”
“……예?”
“공사비를 감축해 주든, 아파트 다시 지어 주든 뭘 하든 간에 무조건 영주 아파트 사수하란 말이야. 적자를 보더라도 이 아파트는 무조건 우리가 지어야 돼. 여기서 물러나면
끝이다.”
결자해지.
최소한 책임지는 모습이라도 보여 줘야 한다. 이것마저 놓치면 앞으로 한명건설의 미래는 없다.
***
구조대책본부 허명훈 팀장은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 나왔다.
기름진 머리와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은 구조 작업이 얼마나 고단한지 말해 주었다.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제가 너무 시간을 뺐네요.”
“별말씀을요. 그래도 특검 통과되고 나니 외압이 많이 줄었습니다. 과장님 덕분에 마음은 편하네요.”
“사망자 집계는 거의 다 끝난 겁니까?”
“네. 마지막 시신 수습했습니다. 총 사망자는 23명으로 마무리될 겁니다.”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구조 작업은 절망의 연속이었다.
“아, 근데 한명건설에서 유가족들과 접촉한단 얘기가 있던데. 들으셨습니까?”
“유가족을요?”
“모르셨구나. 아무래도 보상안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희생자들에게 10억씩 지급한다더군요.”
젠장 한발 늦었다. 돈 얘기 벌써 시작했구나.
“사실 산재 사망사고에 10억은 꽤 많은 돈입니다. 일단 이쪽과는 확실히 합의를 하려는 모양이에요.”
“글쎄요. 그 10억은 한국인 기준 아닙니까? 불체자 인부들한텐 다른 기준이 적용될 것 같은데.”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니더군요. 희생자 모두에게 10억씩 지급하겠다고 합니다.”
상당히 의외였다. 최영석은 안 줄 수 있는 돈이면 10원도 깎아 버리는 놈인데.
“진짜 문제는 이제 이 아파트를 어떻게 할지인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한명건설이 조합원 설득에 총력을 다 하고 있어요. 공사비를 대폭 삭감하고, 인테리어 옵션을 무상으로 지원하겠다 하면서.”
당연한 얘기다. 이 계약이 파투나면 한명건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브랜드 인지도는 추락할 것이며, 철거비에 위약금까지 지불해야 한다.
“그걸 조합원이 들어주겠습니까?”
“네.”
“예?”
“놀랍게도 조합원들이 서서히 설득 당하고 있습니다. 어제 조합원 회의 잠깐 참석했는데, 의견이 반반으로 갈리더군요.”
야속하지만 돈 앞에 장사 없었다.
최영석이 사재까지 풀며 보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자 조합원들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문제가 없는 겁니까?”
“왜 없겠습니까. 무너진 101동의 하자가 다른 동에도 똑같이 발견되고 있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건 절대 한명건설과 합의해선 안 되는 문젭니다.”
드러난 암세포가 이 정도면 속은 얼마나 썩었겠는가. 서른다섯 채의 아파트를 다 까 보면 문제의 심각성이 더 드러날 것이다.
“그럼 당연히 말려야죠.”
“해서 제가 어제 구조대책본부장 자격으로 전 아파트 하자 실태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한데 요지부동이에요. 눈에 띄게 심각한 동 몇 개만 철거하고 그대로 공사 진행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사실 최 부회장이 승부수를 잘 띄웠죠. 자기 주식 처분하고 수습에 최선을 다하겠다 하니 사람들이 한둘 속아 넘어갑니다.”
“조합원은 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모르겠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몰라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당장 눈앞의 이익을 포기 못 하는 건지.”
큰일이다.
만약 최영석이 사망자 유가족과 조합원이랑 합의를 해 버리면 처벌 수위는 극도로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럼 확실히 이해시켜야겠네요. 저 아파트는 절대 지어선 안 된다는 걸.”
“네……. 근데 방법이 있습니까?”
“현장 사람들의 증언을 확보해야겠습니다.”
허 팀장의 눈이 커졌다.
“현장사람들? 누구요?”
“하청사요. 그 사람들은 공사 시작부터 지금까지 직접 일한 사람들 아닙니까. 문제의 심각성 알리고 계약 파기 되게끔 해야겠네요.”
“뭐 맞는 말씀입니다만……. 하청사들은 모두 한명건설에 목줄 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원청에 불리한 진술을 할까요?”
“이번 사고 피해자 대부분이 하청근로자였습니다. 양심이 있다면 정직하게 고백할 겁니다.”
자신 있게 말했지만, 사실 자신은 없었다.
하청은 원청의 살인죄도 뒤집어써 줄 사람들. 사실 그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튼 그건 제가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허 팀장님,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말씀하세요.”
“추후 수습과 관련해 아마 기자들이 허 팀장님을 많이 찾을 겁니다.”
“네.”
“절대 흔들리지 마시고 방금처럼 있는 사실 그대로 말씀해 주세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 정도야 뭐 어렵지 않죠. 그건 제 양심껏 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