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99
299화
참회록 (3)
“우리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소.”
“그러니까 이 피해를 다 주주들이 책임져야 한다, 이 말씀이시죠.”
유인수 이사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잘못 대답했다간 최영석과 나란히 구치소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사실 사망자 뉴스에 가려진 다른 피해자들도 많았다. 한명그룹을 믿고 투자해 준 개인 주주들.
사태 이후 한명그룹의 시총은 5천억이나 증발했으며, 연일 계속되는 악재에 주식은 관리 종목으로 지정되었다. 이는 곧 연기금과 개인 투자자들의 투자금이 반 토막 났단 소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사장님은 목소리 내셔야죠. 국민들의 노후 자금이 반 토막 났는데, 언제까지 그 답답한 원칙에 갇혀 있을 겁니까.”
그러지 않아도 유인수 이사장은 매일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거물급 정치인들이 줄줄이 연루되며, 연기금장도 한통속으로 의심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명그룹은 국내 시총 1위 기업이고, 당연히 연기금 투자금도 가장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객관적인 사실이 중요한 시국이 아니다.
몇몇 언론은 최근 연기금이 한명그룹의 지분을 꾸준하게 매입했단 사실을 지적했다. 증권 지라시엔 벌써 이사장의 이름도 살생부에 올랐다.
“이사장님, 혹시.”
“아닙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예요! 나는 최 부회장한테 차 한잔 얻어먹어 본 적도 없습니다. 최근 매입 지분? 그럼 한명그룹이 국내 1위 기업인데 저희가 매입 안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한명그룹에 호재가 얼마나 많았는지 아시잖아요.”
이런 걸 급발진이라고 하나?
“그걸 여쭤보려던 게 아닙니다. 혹시 국민연금에 다른 계획이 있는지 여쭤보려 했습니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없나 보다.
“그럼 세간에서 쏟아져 나오는 연기금의 책임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정말 주가가 떨어지든 말든, 주주들이 피해를 보든 말든 연기금은 경영에 참여하지 않겠단 원칙만 고수할 겁니까?”
투견처럼 달려들던 세 명의 이사들도 모두 고개를 숙였다.
막다른 골목이란 걸 깨달았을 것이다.
“이젠 연기금이 아닌 대주주로서 책임감을 보여 주십쇼. 연기금에게도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산적한 과제가 많다.
이젠 어떤 문제를 누가 어떻게 책임질 건지 교통 정리해야 한다. 이건 지분을 가장 많이 들고 있는 연기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사장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떤 문제를 말씀하시는지요?”
“첫 번째는 책임 보상 문제입니다. 이미 아파트 부실 시공 문제가 만천하에 알려졌고,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른 동에도 똑같은 부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전면 철거를 해야 한단 말씀이군요.”
“네. 철거 비용은 물론이거니와 시공 날짜를 지키지 못한 패널티도 감수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도 조합원이 한명건설과 계약을 유지하겠단 전제하에.”
조합원 얘기에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조합 측은 시공사를 바꾸는 걸 더 선호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도 있고 바꾸는 게 쉽지는 않죠.”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조합원을 달래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어야 된다는 걸.”
“그럼 지금부터 계산 확실히 합시다. 이 사태 수습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 이건 법인이 아니라 개인이 져야지 않겠습니까?”
한명그룹이 아닌 최영석이 책임 지라는 소리다.
“최 부회장이 자신 지분 10%를 매각하겠다고…….”
“택도 없는 액수입니다. 아파트 철거하랴, 조합원 달래랴, 아파트 다시 지으랴……. 지분을 전량 매각해도 될까 말까 한 액수죠.”
“…….”
“뿐이겠습니까. 이번 사태에 부과될 과징금과 간접 책임 피해액도 수천억 될 겁니다. 지분 전량 매각에 신용 대출까지 받아야 겨우 피해 복구하겠네요.”
“하면 저희가 어떻게…….”
“최 부회장 비토하십쇼. 그를 영원히 경영권에서 배제하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늘 그렇듯 잠잠해지면 슬그머니 얼굴 비추는 게 이 바닥이다.
이걸 막으려면 이번 사태가 수습되어도 영원히 최영석을 회장으로 선임하지 않겠단 국민적 약속이 필요하다.
“최 부회장은 단순한 사람이에요. 자기가 한명그룹을 장악할 수 있겠다 싶으면 절대 지분 내려놓지 않을 사람. 그러니 그 기대를 산산조각 내는 게 우선입니다.”
연기금이 최영석을 비토하면, 놈이 아무리 다른 곳에서 지분을 확보해 온다 한들 경영권은 절대 넘볼 수 없다.
“그럼 최 부회장도 마지못해 지분 팔 거고, 그 돈으로 이번 사태 수습하면 됩니다.”
“그럼 그 경영 공백은요?”
“당장의 공백은 삼남 최만석 씨가 맡으면 됩니다. 그리고 추후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전문 경영인 찾아 선임하십쇼.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리면 최영석계 사람을 CEO로 임명하는 건
절대 안 됩니다. 우리 특검은 최영석의 잔당이 누구인지 이미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사 명단을 내밀자 이사장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마 당황스러울 것이다. 출범 한 달도 되지 않은 특검이 어떻게 이리 그룹 내부 사정을 잘 알 수 있는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의 굳어진 얼굴과 달리 주변 이사들은 아직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 팀장님, 아무리 그래도 경영진 교체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얘깁니다.”
“맞아요. 최 부회장뿐 아니라 측근들을 다 날린다? 이건 그냥 한명그룹의 석가래, 대들보를 다 뽑으란 얘기 아닙니까.”
“일단은 최 부회장 체제로 이 사태를 수습하는 게 어떻습니까. 나중에 저희가 구상권을 청구해서라도 그룹에 끼친 피해는 반드시 받아 내겠습니다.”
허튼소리. 시간이 지나면 또 작은 경영 성과를 과장해 선전하고 유야무야 넘어갈 거면서.
“참…… 꼭 이 서류까지 꺼내야 하나.”
나는 두 번째 서류를 이사들에게 내밀었다.
“한명그룹 처벌안입니다. 현재 한명건설이 입찰 받은 공공기관 공사가 총 8건인데, 이거 전부 계약 해제할 겁니다. 위약금? 꿈도 꾸지 마십쇼. 오히려 우리가 위약금 청구하고 계약
취소할 겁니다.”
사실 위약금 얘긴 입 밖에도 못 낼 것이다. 한명건설은 이미 업계에서 퇴출되는 분위기로 가고 있으니.
“이, 이게 뭡니까? 진짜로 이대로 처벌하실 겁니까?”
성질 급한 이사 하나가 서류를 살펴보더니 사색이 됐다.
“네. 한명건설에 영업정지 6월, 그리고 서울시가 자체적으로 6월 더. 도합 1년간 한명건설에 영업정지 명령이 내려질 겁니다. 공공기관을 비롯한 모든 사업에 입찰을 할 수 없어요.
그리고.”
그다음이 더 중요하다.
“우리 특검은 국토부에 한명건설의 건설사 등록말소를 재청할 겁니다. 한마디로 폐업 명령이란 뜻이죠.”
“재고해 주십쇼. 그건 너무 과한 처벌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주주들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비웃음이 나왔다.
이것들이 언제부터 주주들의 피해와 국민들의 노후 자금에 관심이 많았다고.
“폐업 명령이 뭐가 과합니까. 최영석을 단두대로 올리라는 여론이 빗발치는데.”
“하지만…….”
“공사 중이던 아파트가 도중에 무너져 내리는 참상은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선 안 됩니다. 국토부와 이미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사들은 사색이 됐다.
행정명령은 굳이 재판을 기다리지 않고 당국이 바로 부과해 버릴 수 있다. 물론 이 행정명령에 불복을 할 수 있지만 이건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소송이다. 사실상 유죄추정(?)의
원칙이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공사 입찰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하는 시점.
건설사 등록 말소라는 초유의 처벌이 이뤄져도 오히려 납득하는 국민들이 더 많다.
“이건 아니야…….”
“이건 진짜 너무하잖소.”
“그만!”
유인수 이사장이 다시 분위기를 정리했다.
그는 내 얼굴을 노려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가 노력을 보인다면…… 이 처벌 수위는 좀 줄여 줄 수 있습니까.”
“영업정지는 무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건설사 등록 말소는 여러 여건을 감안해 참작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등록 말소까지 욕심낼 순 없다. 이는 시총 1위 기업을 상장 폐지시켜 버리는 조치인데 그에 딸린 하청과 주주들한테까지 사형선고를 내려 버리는 격이다.
한명건설은 어차피 업계에서 자연스레 도태될 터. 부작용을 최소화시키려면 연착륙을 유도해야 한다.
내 말뜻을 다 이해했는지 시끄럽던 회의실이 이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유인수 이사장은 미간을 짚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특검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이른 시간 내에 이사회를 열어 최 부회장을 해임하고, 비토 선언도 하겠습니다. 대신 특검도 약속 하나만 해 주십쇼. 건설사 등록말소는 무고한
피해자가 더 많은, 너무나 과한 처사입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저희도 성의를 보일 테니, 특검도 이 문제를 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영석 부회장만 정리하면 됩니다. 거국적인 결단 감사합니다.”
이번 사건에 기록이 하나 또 생겼다. 연기금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한 최초의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
비밀리에 접촉했다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연기금 본사에서 막 나오니 이미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하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나 국민연금도 연루되어 있는 겁니까?
-대가를 받고 투자를 했던가요?
기자들의 질문이 연기금의 현 위치를 말해 준다. 역시나 공범으로 의심 받고 있구나.
사실 최영석이 워낙 트러블 메이커인지라 지금은 아주 작은 인연만 밝혀져도 함께 생매장을 당한다.
“아닙니다.”
나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면 왜 왔습니까? 세산에선 연기금 고위직들도 연루됐단 의혹이 나옵니다.
“저희가 확인한 바, 연기금의 지분 매입은 아주 정당한 절차였습니다. 다만 대주주로서 좀 더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해 달라 부탁하려 왔습니다.”
-적극적인 주주권? 그럼 연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하겠단 뜻인가요?
“제가 직접 말씀드리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연기금이 곧 발표를 하는 건가요?!
아무래도 자리를 얼른 피하는 게 좋지 싶다. 한마디 대답을 하면 열 마디 질문이 빗발치니.
마침 대기하고 있던 연기금 보안요원들의 도움으로 나는 차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중에는 내가 피할 수 없는 질문도 있었다.
-한명건설에서 그제 입장문을 냈습니다. 자신들의 책임도 인정하지만, 실무자들인 하청들의 업무상 과실도 있었다고.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 재판에 소환 될 하청사는 얼마나 되나요?
나는 차에 타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건설업계에 그런 말이 있죠.”
많은 이름들이 스쳐 간다.
“노가다 인건비 올랐으면 외노자 쓰고, 외노자로 안 되겠으면 불체자 쓰고. 그러다가 적발되면 하청이 뒤집어쓴다.”
과거 김성균이 입버릇처럼 내뱉었던 말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일어난 산재, 사망 사고는 모조리 다 하청들이 뒤집어써 줬다.
“그러한 악습이 오늘에 이르러 이런 사고를 냈습니다. 적어도 이번 특검은 이 썩은 관행을 바꿀 겁니다. 설사 하청의 잘못이 있다 해도 이는 결국 공사의 총책인 원청에 있습니다.
철저히 한명건설, 아니 최영석 부회장에게 책임을 묻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