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30
30화
불리한 대법 판례 (1)
“유리…… 하다고요?”
절망적이던 눈빛들이 크게 흔들렸다.
“엄밀히 말해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미 한번 이 문제로 대법원까지 갔었는데, 약관 개정을 안 했잖아요. 저희 공정위는 그걸 지적할 겁니다.”
“그럼 저희한테도 여지가 있습니까?”
“조금은요. 그리고 암은 발병 부위마다 다르니, 이번 사안은 대법 판례에 해당하지 않을 겁니다.”
작은 가능성을 열어 줬을 뿐인데 그들의 얼굴엔 곧 생기가 돋았다.
“그 전에 먼저. 여러분들 사정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보험 계약 당시 했던 말, 보장받았던 내용, 가입 통화. 전부 다 말씀해 주세요.”
세 명의 환자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고 가장 어려 보이는 여성이 먼저 운을 뗐다.
“암보험에 가입했던 건 10년 전이에요.”
“혹시 미성년자 때……?”
“네. 엄마가 가입시켜 줬는데 절차적으로 문제없이 가입했어요. 가족력이 심했거든요. 외할아버지, 삼촌, 이모 모두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게 고등학생 땐데…….”
그녀는 말을 하다 잠시 목이 잠겼다.
꽃다운 나이에 위암 3기 진단을 받은 기분.
그 괴로움은 가히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처음 수술했을 땐 견딜 만했어요. 근데 2차 수술부터 합병증이 왔어요. 그때부터 입원 날이 많아졌고, 슬슬 눈치를 받았어요.”
“눈치라는 게 혹시 트집을 잡았다는 겁니까?”
“네. 위를 절제하고 나니까 만성 소화 장애, 역류성 식도염에 시달렸어요. 나중엔 음식 먹고 체하기만 해도 응급실에 갔어요. 근데 보험사에선 계속 암에 대한 직접 치료로 볼 수
없다, 합병증은 지원 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꼬투리를 잡더군요.”
준철은 숙연한 얼굴로 펜을 들었다.
“보험사가 본격적으로 거절한 건 언제입니까?”
“요양 시설에 입원하겠다 할 때요. 저희 엄마는 분명 ‘의료법상’ 지원하는 모든 치료를 보장해 주겠다 들었거든요. 그건 통화 녹취도 있어요.”
“네.”
“근데 갑자기 돌변하더니, 요양은 지원 못 한다고 하기 시작했어요. 필수치료가 아니라고.”
그녀는 2년 동안 모아 왔던 영수증을 꺼냈고, 참아 왔던 눈물을 흘렸다.
“근데 어떻게 요양치료가 필수가 아니에요. 걷지도 못할 만큼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데.”
“…….”
“저도 어떻게든 입원치료로 끝내려 했어요. 근데 가족들은 사회생활 안 하나요? 곧 죽을 사람 하나만 바라보나요?”
“성희 씨 일단 좀 진정을.”
“이미 제 치료비로만 쓰인 돈이 수천이에요. 요양 시설에 못 들어가면 가족들 다 나만 보고 병 수발해야 돼요. 제발…… 제 마지막 존엄성이라도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녀가 감정을 주체 못 하고 통곡할 때, 옆에 있던 남성이 말했다.
“선생님. 이건 암 환자 두 번 죽이는 겁니다.”
“…….”
“저도 성희 씨랑 비슷한 나이에 걸렸는데, 다행히 초기였어요. 근데 계속해서 재발하더군요. 그때부터 별 트집을 다 잡아 대더니 나중엔 요양치료 안 된다는 겁니다. 대체 그럼
언제까지 입원하라는 겁니까?”
“선생님, 저는 요양 입원하겠다니까 사치 부리지 말란 얘기 들었습니다! 근데 이게 사치라뇨?! 가족들 생각해서 저희도 요양병원 들어가는 겁니다. 병 수발드는 가족들 보고 있으면
그냥 차라리 뛰어내리고 싶습니다!”
집에 암 환자가 생기면 가족들도 전부 투병 생활에 돌입해야 한다.
요양 입원은 그 미안함을 줄일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선택.
준철은 펜을 놓고 그들과 눈을 맞췄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건 법과 원칙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리라.
그렇게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준철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먼저 죄송합니다. 아픈 얘기를 두 번 꺼내게 해 드려서.”
“별말씀을요. 저희야말로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이제 저희도 사정 파악했으니, 이 내용 토대로 YK생명에 해명을 요구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준철이 시선을 뒤에 있던 무리들에게 돌렸다.
“유가족분들이시죠?”
“네.”
“선생님. 이젠 제가 저분들과 얘기를 나눠야 하는데 잠시 자리 좀…….”
그리 말하자 세 명의 환자가 자리를 비켜 줬고, 유가족들이 앉았다.
금감원에서 지급권고를 받았지만 YK생명이 시간을 끌어 합의를 했던 유가족들이다. 그 분노는 방금 전 사람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층 더 긴장한 얼굴로 펜을 들 때 한 노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희는 길게 말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방금 전 환우분들과 사정이 다 비슷해요.”
“맞아요. 바쁘실 텐데 두 번 들을 필요 없습니다.”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준철을 봤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저희는, 더 이상, YK생명과 그 어떠한 합의도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합의가 없다는 게 어떤 뜻인지…….”
“YK는 금감원의 권고를 어겼고, 그에 합당한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못 받았던 치료비를 원하는 게 아니다.
징계를 원하는 것이다.
“솔직히 전 이제 돈이라면 지긋지긋합니다. 2년 전에 떠난 집사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찢어집니다.”
“…….”
“그 사람은 입버릇처럼 나랑 자식들한테 미안하다 했어요. 병원비 때문에 미안하다, 병 수발들게 해서 미안하다. 그 말을 임종 직전까지 들었습니다.”
“…….”
“장례 치를 땐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YK가 금감원 권고 들어줬다면. 지급하라는 요양비만 지급해 줬더라면…… 그러면 집사람도 마음은 덜 아프지 않았을까?”
시종일관 냉랭하던 노인 목소리가 흔들렸다.
“근데 이제 와 그런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때 못 받은 2천만 원 필요 없습니다. 그 돈 10원 한 장 받을 생각 없으니 강력히 처벌해 주십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금감원 권고 이행 안 한 거 반드시 행정 책임 물어 주세요!”
“저 파렴치한 놈들 반드시 처벌해 주세요!”
얼마나 억울했으면 가족을 떠나보내고도 화가 식지 않았을까.
돈도 필요 없다는 이들의 말이 섬뜩하게 들렸다.
***
공정위로 복귀한 준철은 모든 내용을 최 과장에게 보고했다.
철혈 같은 최 과장도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을 땐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금감원 권고 어긴 거 모두 확인한 건가?”
“예. 유가족 다섯 명 모두 YK로부터 은근한 협박을 받았다 합니다.”
“정말 바라는 게 처벌 하나야?”
“예. 현재 투병 중인 환자들은 몰라도, 이 사람들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오로지 처벌만 원하고 있었습니다.”
합의를 하라고 금감원이 권고를 내렸는데, 유경생명이 그걸 걷어찼다.
하지만 여기엔 허점도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급했다 한들 형식적으로 양자가 합의한 사건이란 점이다.
“억울한 심정은 알겠지만 이건 우리도 냉정해야 돼. 법 앞에서 시간이 급했다, 어쩔 수 없었다 같은 논리는 통하지 않아. 결국 합의를 한 건 당사자들이잖아?”
“예. 현실적으로 소급적용시켜서 그때 못 받은 돈 다시 돌려주는 게 최선의 해결책 같습니다.”
돈 얘기가 다시 나오자 최 과장이 넌지시 물었다.
“그 돈은 계산해 봤나. 소급적용분?”
“대략 50억대였습니다.”
“겨우?”
“기존 가입자 대부분은 요양치료 안 받았더군요. 받은 사람 중에서도 보험사에 청구한 신청이 몇 안 됩니다. 대부분 이의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법은 잠자는 권리를 보호하지 않는다.
소급적용 판정이 나도, 따로 청구하지 않는 한 이 돈을 받아 갈 순 없다.
“금감원에선 징계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어?”
“기관경고로 마무리 지을 생각 같습니다.”
기관경고.
중징계에 해당하며 유경생명은 1년간 신사업을 벌일 수 없다.
정확히 말해 금감원에서 YK의 신사업에 모두 인·허가를 내주지 않는 것인데, 이 돈은 어림잡아도 수십억대다.
뿐이랴.
징계 기간 동안 YK는 상품 판매에도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
이걸 아는 놈들이 절대 순순히 징계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유권해석이 끝이 아니구먼.”
“네. 금감원이 징계 내리면 반드시 행정소송을 걸어올 겁니다.”
“이 팀장은 이거 어떻게 했음 좋겠어?”
“먼저 권고부터 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권고가 안 먹혀서 이 지경까지 왔는데?”
“금감원이 아닌 저희 공정위에서요. 물론 기존 안과도 달라야 할 겁니다. 과거에 권고했는데 부분지급했던 거, 그리고 지금 사안. 모두 100% 지원하라고 권고하는 겁니다.”
최 과장은 피식 웃었다.
젊은 놈이 말장난 잘한다. 과거 얘기 꺼내는 것부터가 권고가 아닌 도발인데.
이놈의 의도가 뭔지 금방 눈에 보였다.
“유권해석 피하고 싶은 거지? 보험 업계 전체가 달려들까 봐?”
“……솔직히 우려됩니다. 유권해석은 타 보험사 약관에도 구속력을 지녀서.”
“이 팀장. 나이답지 않게 신중한 건 고마운데, 그냥 정석대로 해. 이놈들은 지금 청와대에서 지급권고해도 안 따를 놈들이야. 공정위가 말한다고 다를까?”
“…….”
“업계 전체가 달려들면 더 좋네. 공론화시켜서 국민 의견 들어 봐. 누구 편 드나 보자.”
최 과장의 결단은 정말 의외였다.
사건을 축소하고 싶은 게 공무원들 특성인데 공론화도 마다하지 않겠다니?
아무래도 강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왜 대답이 없어. 일당백으로 싸우는 거 이 팀장이 잘하는 거 아니야?”
“아, 예. 그렇습니다.”
최 과장은 준철의 반응을 즐기듯 웃었다.
“YK생명엔 언제 다녀올 거야?”
“전후사정 다 들었으니, 이제 확인할까 합니다. 저희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럼 이번 주 안으로 해결할까?”
“네.”
“좋아. 매뉴얼 정리해서 줄 테니까 거기 써 있는 자료는 다 빼 와.”
준철은 꾸벅 인사를 하고 뒤로 돌았다.
솔직히 기분이 이상했다. 과거 자신의 친정이었던 곳을 쳐야 하다니.
환자들을 상대했던 것보다 죄책감이 더 클 것 같았다. 유경생명에서 지껄일 말이 과거 내가 한 말일 테니까.
준철이 축 늘어진 어깨로 나가자 최 과장이 호통을 쳤다.
“야, 세상 짐 다 짊어졌냐?”
“예?”
“아픈 사람들 만나는 게 쉽진 않지만 뭐 그렇다고 침울해하고 있어?”
“아, 아닙니다.”
“사람이 돈에 눈멀면 더한 짓거리도 할 수 있어. 네가 할 일은 평정심 갖고 끝까지 이 문제 해결하는 거야. 마음 단단히 먹어.”
“……네, 알겠습니다.”
위로차 한 말이겠지만, 준철에겐 확인사살이었다.
사람이 돈에 눈멀면 더한 짓거리도 할 수 있다.
그게 전생의 김성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