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300
300화
참회록 (4)
-그간 저희 연기금운용본부는 경영에 간섭하지 않는단 원칙에 따라, 기업의 자율성을 존중해 왔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 속에 대주주로서 엄중한 책임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영주 아파트 붕괴 사고는 두 번 다시는 재현되지 않아야 할 건설사 최대의 비극입니다.
……(중략)…….
긴급이사회 결과에 대해 발표드리겠습니다.
최영석 부회장의 해임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음을 알립니다.
아울러 저희 연기금은 비리와 졸속 시공을 적극적으로 지시한 최영석 부회장을 영구 제명토록 하겠습니다. 그를 포함한 임원 다수에게도 책임을 물어 주요 직책에서 모두 해임되었음을
알립니다.
연기금이 이사회를 소집하는 초유의 사태 속에 최영석의 해임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아울러 연기금은 그에 대한 영구 비토를 선언하며 최영석의 사후 복귀설도 단숨에 일축 시켜
버렸다.
한명그룹의 최대 주주인 연기금이 비토하면, 사실상 최영석은 경영권에서 영원히 멀어지는 셈이다.
1차 재판을 사흘 앞두고 발표된 파격 선언에 주가는 모처럼 반등했다. 이미 영업정지는 불가피하단 전망이 나왔지만, 최영석 리스크를 떨쳐 냈단 것만으로도 주주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해임 소식에 언론사들이 모든 카메라를 동원해 동부구치소와 최영석 측근들을 찾으러 다녔지만, 이에 대한 소감은 한마디도 들어 볼 수 없었다.
너무나 조용한 반응이었기에 세간에선 최영석과 연기금의 자작극이란 말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재판 당일.
언론에 처음 잡힌 최영석의 얼굴이 그 음모론을 단숨에 일축시켰다.
생기 하나 없는 얼굴에 수척해진 몰골. 연기금의 비토 선언이 충격이었음을 말해 준다. 수인복을 입고 수갑을 찬 그의 모습에선 묘한 연민까지 들 정도였다.
-한 말씀만 해 주십쇼! 연기금이 경영권에서 몰아냈는데 심정이 어떠십니까?
-영원히 비토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주식을 쥐고 있는 의미가 있을까요?
하지만 나는 놈을 믿지 않는다. 카메라 앞에서 주눅 든 척하며 동정표를 얻으려는 수작일 것이다.
뭐 기나긴 수형 생활을 생각하면 당장에 웃지는 못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재판장에서 만났을 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놈은 얼굴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만약 동정표를 얻을 속셈이었다면 카메라 앞에서 울었지, 절대로 뒤에서 울지 않았을 거다.
내가 너무 최영석의 악명을 의식하는 걸까? 드디어 놈도 이제는 재간이 없는 것일까?
“판사님 입장하십니다.”
초조한 심정으로 나는 자리에서 기립했다. 내 시선은 재판 내내 최영석을 떠나지 않았다.
***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은 최영석을 확인 사살하는 자리였다.
불법체류자를 고용하라는, 한명건설의 적극적인 지시가 밝혀졌고.
무리한 공사 기일을 강행한 정황도 밝혀졌으며.
이 모두 그 누구도 아닌 최영석의 지시였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
애석하게도 이젠 그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써 줄 임원도 없었다. 임원들은 오히려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의 주군을 고발했다.
덕분에 최영석이 숨겨 둔 차명 주식과 비자금 내역도 이 자리에서 모두 밝혀지게 되었다.
이 바닥은 떨어진 끈에 대해서는 매우 냉정하다. 이제 다신 한명그룹에 발도 못 붙일 테니, 잘 보일 필요도 없다.
문득 놈이 왜 안 보는 곳에서 왜 울었는지 이해가 됐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 인생의 정점에서 모든 걸 다 잃었을 때 느끼는 허탈함……. 놈도 그때의 나와 같은 심정이겠지?
“피고인, 직접 대답하세요. 이 모두 사실입니까?”
두 시간 내리 확인 사살을 당하다 처음으로 발언권을 얻게 되었다. 놈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참고인석에 앉더니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네, 모두 인정합니다. 저의 적극적인 지시였습니다.”
놈은 계속 나와 눈을 맞춘 채 대답을 이어 나갔다.
“부끄럽습니다. 결국 사람을 믿은 내가 바보였지요. 한명그룹과 관련한 비리는 모두 다 내 잘못이었고, 나만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나 하나만 죽여 주십쇼. 제가 가진 한명건설의
지분을 팔고, 피해자들에게 사재로 배상하겠습니다. 조합원과 피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사재로 배상을 하겠습니다. 당국에 선처를 바랍니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이건 잘못을 사과하는 태도가 아니다. 적군에게 생포 당한 장수가 마지막 자존심을 부릴 때 나오는 분노다.
사실 놈은 이미 궁지에 처박혔다. 연기금이 직접 이사회를 열어 자신을 해임하고 영구 비토를 선언해 버렸으니……. 출소하고 나서도 돌아 갈 길이 없다. 이제 그는 한명그룹 주식을 좀
많이 들고 있는 슈퍼개미일 뿐이다.
어찌 됐건 피고가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구제 방안도 구체적으로 제시했으니 재판을 길게 끌 필요 없다.
재판장은 의사봉을 들었다.
“그럼 선고하겠습니다.”
***
“모두 수고했다. 두 사람 아니었으면 나 여기까지 못 끌고 왔을 거야.”
“에이- 아닙니다. 과장님은 무조건 끝장 보는 성격인데, 어떻게든 한명그룹 무너뜨렸겠죠.”
“비행기 태우지 마. 나도 운이 좋았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지 않습니까. 이것도 과장님 실력입니다.”
나는 서 팀장과 배 팀장을 따로 불러 치하해 주었다.
사실 이번 사건은 기적에 가까웠다. 조직 수뇌부가 다 물갈이 되고 나 또한 포기하려던 찰나에 그런 사고가 터져 버렸으니.
그 힘든 시간 묵묵히 내 곁을 지켜 준 두 사람에게 특별히 더 고마웠다. 사실 일이 잘 풀렸으니 이렇게 서로 웃지. 만약 안 풀렸으면 녀석들도 지독한 보복에 시달렸을 거다.
“앞으로 중간만 가. 특검에 캐스팅된 것 자체가 엄청난 커리어야. 사고 안 치고 중간만 가도 국장은 따 놓은 당상일 거다.”
“에이- 오늘같이 좋은 날 무슨 인사고과 얘길 하십니까. 그보다 오늘 쐬주 한잔 어떠세요?”
“맞아요. 저희 이렇게 고생했는데 그동안 과장님께 술 한잔 못 얻어먹어 봤습니다.”
긴장이 다 풀렸는지 나도 터럭 웃음이 났다.
“소주가 뭐냐? 세상에서 제일 비싼 안주에 제일 비싼 술로 먹자.”
“오- 과장님이 배포가 커지셨는데요!”
“당연히 운영지원과 회식 카드로.”
“그럼 그렇지…….”
나는 서 팀장의 어깨를 툭 쳤다.
“대신 날짜는 다음 주로 잡자.”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재판 끝나는 날 딱 뒤풀이를 해야지.”
“급하게 만나 볼 사람이 있어서 그래.”
“만날 사람? 혹시 애인입니까?”
혈기왕성한 나이들이라 그런지 관심사가 늘 그쪽이다.
나는 끄덕이며 웃었다.
“오- 과장님도 연애를 하세요?”
“이제 해야지.”
“과장님, 혹시 그분과 잘되시면 제 소개팅도 부탁드립니다! 전 여자한테 바라는 게 별로 없어요. 예쁘고 아침밥 잘 차려 주고 야근에 쩔어 살아도 잔소리 안 해 주면 됩니다.
“어째 나한테 불만 사항을 얘기하는 것 같다?”
“크흣.”
그렇게 두 사람을 보내고 나는 다시 법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젠 악연을 정리해야 한다.
접견 신청을 한 후 그를 기다렸다.
“의외군. 나를 다 찾아올 줄이야.”
최영석은 독기 가득한 얼굴로 접견실 문을 열었다.
“패배자 얼굴을 확인하는 악취미가 있나?”
“그것도 있지만 칭찬을 좀 해 드리려고요. 지분 정리 잘했습니다. 만약 피해 보상에 대한 책임 안 보였으면 형량은 따블이 됐을 겁니다.”
“10년이나 20년이나.”
“그리고 기왕 지분 정리했으니 다시는 한명그룹에 얼씬도 마세요. 이제 각자 갈 길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럼 이만.”
딱 그 한마디 하고 싶었다. 다시는 한명그룹에 얼씬도 말라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날 때, 갑자기 놈이 내 손목을 잡았다.
“나도 한 가지만 물읍시다. 10년 전 아파트 미분양은 정말 아는 사람이 없는 문제야. 그건…….”
“그건 죽은 김성균 본부장 말곤 아무도 모르지. 그 사람이 단독으로 주도했잖아.”
놈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제보.”
“그러니까 누구의 제보…….”
나는 놈을 물끄러미 봤다. 이렇게 보니 아직도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성균아, 나 경영권 물려받으면 이 자리 너한테 토스할 거야. 그간 나 대신 악역 도맡아 줘서 고맙다.”
“……!”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너, 너, 너 뭐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놈이 구석으로 기어갔다.
의자로 제 몸을 감싸더니,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고! 너 대체 누구야!”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없구나.
사람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오늘 확인했다.
나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질긴 악연은 여기서 끝내자.
***
“여기가 아버지 묘소입니다. 올라오는 데 고생 많으셨죠?”
“아닙니다. 너무 늦게 찾아뵈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별말씀을요. 한데 저희 아버님과 어떤 사이셨기에…….”
“과거에 제가 신세를 진 게 좀 있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죽은 심 사장의 묘소.
이준철로 눈을 뜬 순간부터 꼭 이곳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염치가 없어서 못 왔을 뿐.
“근데 신세는 저희 아버지가 진 거 아닙니까. 갑질 문제로 공정위를 굉장히 많이 찾아 갔다고 들었거든요.”
“아닙니다. 제가 더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뭐 뒷얘기는 제가 잘 모르지만 아버님께서 선생님을 참 반가워하실 것 같습니다. 저도 뉴스 보면서 선생님의 활약 잘 지켜봤습니다. 한명그룹은 진작 저렇게 처벌됐어야 할 기업이에요.
제가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나도 죄책감을 조금 덜 수 있었다. 부끄럽지만 이 정도면 결자해지라 말해도 되는 걸가.
“어, 선생님. 잠시만요. 차 빼 달라는 전화가 왔네요.”
“그럼 먼저 내려가 계십쇼. 저는 따로 인사드리고 내려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거.”
“아니요, 따로 할 말이 있었는데 잘됐습니다.”
얼떨결에 독대하게 된 나는 심 사장에게 소주 한 잔 따랐다.
“죄송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저도 많은 걸 잃었고, 사장님도 많은 걸 잃으셨네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래도 참회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오늘은
제가 술 한잔 올려도 되겠죠?”
나는 그의 분봉에 소주를 휘뿌렸다.
그렇게 두 번 절을 올릴 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가족들의 얼굴이 사무치게 그립다.
《공정거래위원회》 마칩니다
작가의 말
부족한 게 참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독자님들의 성원이 없었더라면 이 자리까지 오기 힘들었을 겁니다.
글을 쓰면서 가장 아쉬웠던 건, 극적인 전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고증을 어겨야 할 때였습니다.
그때마다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에 더 유연하고 풍부하게 에피소드를 쓸 수 있었습니다.
제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차기작은 여러 가지 감동과 낭만 그리고 빅재미가 있는 그런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2023년 2월 6일. 이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