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31
31화
불리한 대법 판례 (2)
준철은 곧 유경생명에 압수수색을 알렸다.
이 방문엔 공무집행 차 두 대와 버스까지 동원되었다.
“팀장님. 어차피 컴퓨터만 빼 오면 되는 건데 이렇게 요란하게 가도 될까요.”
“어쩌겠어요. 이렇게라도 위압감을 줘야지. 과장님이 주신 자료는요?”
“박 조사관이 분류 다 해 놨습니다. 근데 하나같이 다 예민한 자료들이라 순순히 내줄진 모르겠습니다.”
“고의적으로 자료 누락 시키면 바로 형사사건으로 전환 시킬 겁니다.”
서초 사옥에 도착해 반원들을 집결시키자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아니 이 팀장님-!”
박다영이 평소답지 않게 헝클어진 머리로 멀리서 인사를 해 온 것이다.
머리뿐 아니라 옷은 뜯어져 있었는데, 행색이 꼭 어디서 패싸움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다영…… 아니 박 팀장님?”
“일찍 오셨네요? 호호.”
“왜 여기 계세요?”
“저희는 오늘 오전에 조사했거든요.”
참 재수도 없는 기업이다. 같은 날에 공정위, 금감원 동시 조사라니.
“여긴 금감원 박다영 팀장님이라 합니다. 저희 협력 부처.”
“처음 뵙네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 예. 예. 안녕하세요.”
반원들 모두 얼굴이 붉어졌다.
초라한 행색으로도 그녀의 미모는 감춰지지 않았다.
그녀는 방긋방긋 웃으며 반원들에게 서류를 건넸다.
“아마 압수 서류는 저희랑 중복될 거예요. 이 목록은 저희가 오늘 가지고 왔으니, 다 안 가져오셔도 돼요.”
서류를 본 반원들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암보험 분쟁 자료 다 압수하셨어요?”
“비급여 항암치료 분쟁…… 이건 대외비라 절대 순순히 안 내줬을 텐데.”
“순순히는요. 깨고 부수고 멱살까지 잡아 가며 겨우 받아 냈어요.”
수고를 덜었다는 기쁨도 잠시.
가녀린 얼굴로 이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하는 그녀가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와 뜯어진 옷은 분명 전장에서 얻은 영광의 상처일 것이다.
“아무튼 저희랑 1차전 했으니, 2차전은 좀 수월하실 겁니다.”
“그럼 이 자료는 나중에 금감원에서 넘겨받는 걸로 하고. 저희는 대면조사 위주로 가겠습니다. 유경생명 간부진 전부 모아 주세요.”
준철은 반원들을 떠나보내고 그녀에게 조심히 말했다.
“진짜 패싸움이라도 한 거야? 행색이…….”
“네. 그냥 한판 붙었어요. 그쪽도 눈치챘겠죠. 여기서 밀리면 끝난다는 거.”
아무리 그래도 금감원 직원을 이렇게 대해도 되나.
정말로 법이 무섭지 않은 놈들인가 보다.
“아주 막무가내예요. 책임 있는 사람 나오라니까 한 놈도 안 나오더군요.”
“그럼 서류만 뺏어 온 거야?”
“네. 고작 부장급들이 나와 가지고 자료 인계했다니까요.”
억울하고 분했다.
자료는 다 압수했지만 책임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만나 볼 수 없었다.
“나머지는 부탁드려도 되죠?”
“금감원에서 힘 다 빼 놨는데, 우리가 그 정도는 해야지. 걱정 마. 책임자 안 나오면 그냥 저기서 드러누워 버릴게.”
준철이 어깨를 치며 위로하자 그냥 엄지를 치켜세우며 조용히 외쳤다.
“고마워요. 선배, 화이팅!”
***
“공정위 이준철 팀장이라 합니다.”
그녀의 설명대로 유경생명은 이미 풍비박산 난 상태였다.
컴퓨터 본체는 뿌리째 뽑혔고, 사무실 곳곳에는 이면지가 굴러다녔다. 직원 중엔 와이셔츠가 안 뜯어진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뭡니까? 방금 다녀간 거 아닙니까?”
“거긴 금감원이고, 저흰 공정위입니다. 공문 받으셨을 텐데.”
“올 거면 한꺼번에 오지 이게 뭔 경우요? 보다시피 그쪽에 내줄 거 다 내줬습니다. 더 이상 업무방해 말고 나가요.”
부장 하나가 언성을 높였지만 준철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료 압수하러 온 거 아닙니다. 책임자를 만나려고 왔는데, 지금 계시죠?”
“아니 이 꼴 안 보여요? 우리 이미 조사 받았다니까!”
“그중 제일 중요한 거 빼놓으셨잖아요, 면담. 최종 책임자 어디 있습니까?”
“몰라요! 지금 안 계십니다.”
기 싸움만 계속될 때 김 반장이 능청스럽게 다가왔다.
“팀장님. 여기가 아니라 한 층 더 올라가야할 것 같습니다. 임원 집무실은 위층이네요.”
“그럼 위에 있겠군요.”
“이 사람들이 진짜! 우리 조사 다 받았다고. 지금 이사님들 전부 해외 출장 중이야.”
어떤 미친 보험사가 금감원이랑 패싸움을 했나 했더니, 역시나 예상을 뛰어넘는 놈들이다.
준철도 인내심이 끊어지고 말았다.
“뭐 이리 얼빠진 회사가 다 있지? 금융당국 두 곳이 공문을 보냈는데, 당일 날 자리도 안 지키고 해외 출장을 가?”
“조, 조사받으면 우린 일도 못합니까? 중요한 바이어라 미팅 못 미뤘습니다.”
“보험사에서 가입자보다 더 중요한 바이어가 있어요?”
“그야…….”
“다 필요 없고 이 문제 최종 책임자 나오쇼. 사장이든, 회장이든 아무나 나와!”
“무슨 일이야.”
그리 언쟁을 벌이고 있을 때 뒤쪽 집무실에서 여러 명의 중년 사내들이 등장했다.
한눈에 봐도 유경생명의 중책을 맡고 있는 임원들이었다.
“부, 부사장님.”
“이 사람아. 당국에서 오셨으면 정중하게 모셔야지. 마음만 먹으면 유경생명 무너뜨릴 수도 있는 분들한테 그러면 쓰나.”
상황 돌아가는 걸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가시 돋친 말을 팍팍 내뱉으며 준철에게 악수를 건넸다.
“내가 보험심사과 최종 책임자입니다.”
준철은 그가 악수하려고 내민 손에 서류를 쥐여 주었다.
“긴말 안 하겠습니다. 왜 요양치료 거부 했습니까?”
“다 끝난 얘기를 왜 또 꺼내시는지. 요양치료는 필수치료가 아니다. 이게 대법원 판례입니다.”
“제가 드린 서류 지금 읽어 보세요. 그 대법 판례는 여기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부사장은 휘둥그레 눈이 커져 서류를 봤다.
암은 발병 부위마다 치료법이 다르고, 위증도도 달라 전혀 다른 질병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의학계 소견이 담겨 있었다.
“주장하신 그 대법 판례는, 생존율이 가장 높은 유방암이었더군요.”
“…….”
“레퍼런스 더 필요하면 말해 주세요. 서울대 의대 교수부터 건보공단까지 종류별로 다 있습니다.”
부사장은 준철이 준 서류를 꽉 쥐더니 눈썹을 치켜떴다.
“아주 드럽고 치사한 짓거리를 하셨구만. 우리도 우리한테 유리하게 말해 주는 전문가 섭외할 수 있습니다. 요양이 아니라 입원치료로도 충분하다는 전문가!”
“그러니까 약관이 문제라는 겁니다.”
“뭐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잖아요. 분쟁의 여지가 있었으면 애초에 약관에 밝혔어야지요.”
“요양치료가 과잉치료란 생각은 안 해봤소?”
“보험사에서 지원해도 환자 부담이 30%입니다. 누군 돈이 남아돌아 요양병원에 가는 줄 알아요?”
병 수발 드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인간으로서 지키고 싶은 마지막 존엄.
그것이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싶은 이유의 전부다.
“그리고 금감원에서 다섯 차례나 요양비 지급하라고 권고한 적 있었죠?”
“그건 당사자랑 저희가 합의한 겁니다.”
“시간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한테 재판 갈 거라고 협박한 게 합의?”
부사장의 말문이 막혔다.
금융당국의 권고를 어긴 건 무조건 재판에서 불리하다.
재판부가 내막에 대해 전부 알게 되면 불리한 판결을 내릴 때 근거로 쓸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저희가 미숙했던 점 인정합니다. 지금이라도 파악해서 그때 못 드린 돈 지급하겠습니다.”
“늦었어요. 유가족들은 그깟 돈 필요 없으니, 강력하게 처벌해 달라 하더군요.”
준철은 서류를 건넸다.
사실 지금은 양쪽 다 감정이 최악인 상황 아닌가. 그들도 납득하고 이들도 납득할 수 있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이 얘기 오래 끌지 맙시다. 유가족들에겐 미지급분 지급하고, 현 환자들에겐 요양치료비 지원하세요. 그럼 저희도 손 뗄 겁니다.”
“……암환자 입원치료까진 지원합니다. 하지만 요양치료는 과잉이에요.”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것 같다.
“꼭 그렇게 끝을 봐야겠습니까?”
“우리의 원칙은 바꿀 수 없습니다.”
“대체 이게 얼마나 한다고.”
“당장의 돈보다 앞으로 환자들의 태도가 중요한 겁니다. 그렇게 인정해 버리면 입원으로도 충분한 병을 전부 요양으로 가요. 저희가 예상한 이 지출이 200억입니다.”
급한 마음에 본심이 나와 버렸다.
판돈 200억.
이번 싸움에서 요양치료를 필수치료로 인정하면, 앞으로 YK암보험이 감당해야 할 돈이다.
“그 200억도 우리가 싸게 잡은 겁니다. 이거 인정하면 입원치료로 충분히 끝낼 수 있는 환자도 다 요양병원 갈 겁니다. 그럼 그 돈 누가 댑니까?”
준철은 마음이 너무 아렸다.
지금 이 남자가 하는 말이 과거 자신이 입버릇처럼 지껄이던 말이다.
“결국 이 돈 모두 장기적으로 보험사가 낼 비용인데, 이러면…….”
“이러면 그 피해가 가입자 전체에게 전가된다. 소수를 위해 전체를 희생하는 게 맞느냐?”
“…….”
“결국 우리가 하는 일은 보험사의 이익이 아니라, 오로지 전체 가입자들을 위함이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대충 이런 말 하실 거 같은데요.”
부사장은 당혹스런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자기가 할 말을 다 지껄여 버렸다.
자꾸만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노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나는 이럴 때마다 늘 보험사가 신기해요. 꽁돈 받아 갈 땐 언제고, 이제 와 그 피해를 가입자에게 전가시킵니까?”
“전가가 아니라 그게 사실 아니요! 우린 가입자에게 퍼 주기만 합니까?!”
“뭘 퍼 줘요. 이거 지원해도 남겨 먹는 돈이 더 많을 텐데.”
젊은 x끼가 뭘 안다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내뱉을 순 없었다.
젊은 x끼 말이 구구절절 다 맞았다.
“200억의 재정이 더 필요하면, 회사 이익을 줄이든가 보험료를 인상하든가 하세요. 하지만 약관 가지고 말장난 치는 건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지금 문제 되는 사람들한테 돈을 주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요양치료를 필수치료로 하면 앞으로 보험사가 부담해야 될 돈이 늘어난다.
“…….”
상황이 얼마나 불리한지는 알고 있었다.
유경생명은 금감원의 권고도 무시했고, 대법까지 갔으면서도 약관에 따로 명시하지 않았다.
암은 발병 부위마다 치료법이 달라야 한다는 의학계의 소견까지 있었다.
“……못합니다. 우린 끝까지 싸울 겁니다.”
하지만 200억은 너무나 큰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