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32
32화
불리한 대법 판례 (3)
“뭐? 금감원에 공정위까지 와?”
“예. 같은 날 두 번이나 쳤습니다.”
“아니 공정위는 왜?”
“보험약관에 문제가 있는지 검토하겠다 하는데…… 유권해석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한 사장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날 한시에 금융사 두 곳이 들이닥치다니.
게다가 공정위가 대놓고 유권해석을 언급했다. 이건 중징계가 떨어질 징조다.
“그걸 그냥 당하고만 있었어? 우리한테 대법 판례 있잖아.”
“얘기 꺼내 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학계에서도 암은 발병 부위마다 천차만별이라 말하고 있어서…… 솔직히 저희 쪽에 불리합니다.”
부사장은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가 금감원의 권고를 다섯 차례나 무시했다는 게…….”
“그건 무시가 아니라 엄연히 합의 아니야.”
“저희가 암환자들 상대로 시간 싸움했다는 걸 아는 모양이더군요. 당시 합의를 했던 유가족들이 엄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석호의 사장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 엄벌받을 짓을 지시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법원이 반인륜적인 내막을 알고도 ‘합의’라는 걸 믿어 줄 바보는 아니다.
“김재민 전 국장. 연락되지?”
“……예?”
“지금 공정위 유권해석만 막으면 숨통 좀 틀 수 있다는 거 아니야?”
“사장님. 김 국장 은퇴한 지 이미 10년이나 지났습니다. 아무리 김 국장이 보험약관 쓸 때 자문을 해 줬다 해도…….”
“지금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야?”
한 사장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사면초가를 타개할 유일한 방법은 전관 카드밖에 없다.
“김 국장뿐이 아니야. 우리한테 자문료 받아 간 놈들은 다 동원해! 취업제한 풀린 공정위 고위직들 있으면 지금이라도 섭외하고.”
정면 돌파가 무리면 외압으로 판을 흔들어야 한다.
한 사장의 확고한 뜻을 이해한 부사장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닿는 연줄은 다 동원해 보겠습니다.”
***
“아이고- 우리 한 사장은 아직도 사장이야? 그룹에서 안 불러?”
“유경 그룹에서 생명은 은퇴직 아닙니까. 전 사장직 달았으면 만족합니다.”
“아서. 경영은 자네처럼 피도 눈물도 없이 달려들어야 성과가 나는 거야. 내가 이 회장이었으면 애진즉 전략실로 불렀을 텐데.”
10년 전 은퇴한 김재민 전(前) 국장은 과한 덕담과 달리 이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기업에서 갑자기 연락을 해 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다.
특히나 자신처럼 끗발 다 떨어진 전관을 찾을 정도면, 이미 내부에서 수습하긴 글렀다는 뜻이다.
“저야 뭐 이 자리 1-2년 더 하다 후임한테 넘겨야지요. 국장님은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봄에는 벚꽃놀이 다니고, 가을엔 단풍놀이 다녀. 늙으니까 욕심도 없어지는구만.”
“아무렴요. 젊었을 때 열심히 사셨으니 복 받으시는 겁니다. 가끔은 그때가 그립습니다. 국장님께서 저희 부족한 부분도 참 많이 채워 주셨는데.”
뼈가 담긴 말에 찻잔이 흔들렸다.
그의 말대로 김 국장은 열성적으로 산 사람이었다. 공정위에서 은퇴하고, 취업제한 3년이 풀리자마자 바로 유경생명 상임고문으로 재취업했으니.
그는 현 YK암보험의 아버지 격으로 보험약관을 만들어 준 사람이었고, 그 대가로 수십억의 자문료를 받아 갔다.
“국장님. 제가 좀 많이 급한데, 본론부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바라던 바일세.”
“다름 아니라 현재 저희 유경이 분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암보험이요.”
“저번에 그건가?”
“예. 요양치료 건입니다.”
“좋게 다 해결한 거 아니었어? 당사자랑 다 합의를 했다며.”
“합의를 하긴 했는데, 금감원에서 재차 문제 제기를 해 왔습니다.”
“이런 얘기 뭣하지만 그럼 다른 전관을 좀 알아봐. 나도 금감원에는 힘 못 써.”
“아닙니다. 이번에는 공정위가 가세해 저희 회사 털어 갔습니다.”
친정집 얘기가 나오자 김 국장 얼굴이 복잡해졌다.
“금감원에서 지원 요청을 한 모양이더군요. 유권해석을 검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만약 유권해석 떨어지면 금감원이 이를 명분으로 바로 징계 심사 열겁니다. 근데 아시다시피 이 약관 다 자문을 구해서 정리한 건데 이제 와 이러면…….”
불편한 얘기가 또 시작되자 그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래서? 나한테 무마 좀 해 달라는 건가?”
“예. 공정위만 막으면 이 게임 끝납니다.”
“한 사장. 전관예우 끗발도 길어야 5년이야. 내가 언제 은퇴한지는 알지?”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립니다. 국장님이 안 되면 다른 후배라도요. 도와주시면 그분 또한 저희가 섭섭지 않게 모시겠습니다.”
“그럼 자네들이 직접 알아보지 굳이 옛날 얘기 꺼내면서 내 뒷다리 잡는 이유가 뭐야?”
“시간이 많이 불리합니다. 저희가 금감원 권고를 몇 번 어긴 적이 있어서…….”
탕-!
참다못한 김 국장이 찻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이래서 도와주기 싫다는 거야. 금감원 권고를 왜 어겨? 그거 다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했잖아.”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요양치료를 필수치료로 인정해 버리면 앞으로 나갈 돈이 200억입니다.”
“그래서 막았어? 아니, 막을 수는 있어?”
못 막는다.
오히려 언론에서 조리돌림까지 당할 거다.
호미로 막을 거 가래로 막게 생겼다.
“이건 어차피 못 막아. 상황이 이 지경이면 나도 손 못 대.”
“공정위 유권해석만 막아 주십쇼. 나머진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김 국장이 길길이 날뛰어도 한 사장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만큼이나 절실하다. 공정위의 유권해석만 막으면 이번에도 금감원은 지급권고로 끝낼 것이다.
그럼 이번 사안만 요양치료비를 지급해 주면 된다.
하지만 만약 약관에 문제가 있단 해석이 떨어지면, 쌩돈 200억이 나가야 한다.
“도와주시면 이번엔 금감원 권고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공정위에 작은 언질만 주십쇼.”
“친정집 가서 난리법석을 떨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작나?”
“저희가 드린 자문료에 비하면 충분히 작지 않습니까?”
“한 사장! 너 이 자식 자꾸!”
“그니까 계속 돈 얘기 꺼내게 하지 마십쇼. 우리도 사정 많이 급합니다.”
한 사장이 협박조로 말하자 김 국장도 더 이상은 날뛸 수 없었다.
그때 유경생명에서 받은 자문료로 지금 노후를 보내는 중이었다.
보험약관을 어떻게 써야 잘 피해 갈 수 있는지를 알려 준 것도 김 국장 본인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말씀하십쇼.”
“만약 내가 유권해석 막아 주면, 기존에 자네들이 지급 거절했던 거 이제라도 지급해.”
“국장님 그건 이미 다 끝난 문제라서 저희도 상의를…….”
“아니! 푼돈 아끼지 말고 줄 돈 주란 말이야. 그 문제들이 쭉 누적되어 오다 오늘 이 사달이 터진 거야.”
“…….”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당장에 급한 불 끄는 거지,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야. 과거 문제 모두 정리하고, 금감원 권고에 무조건 승복하겠다 말해.”
두 사람 사이엔 긴 침묵이 흘렀고, 이내 한 사장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이번 일만 좀 잘 부탁드립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생각은 달랐다.
이번만 잘 넘어가면 다음에도 또 넘어갈 수 있다.
***
“김 국장님. 갑자기 어인 일로…….”
“어인 일은 무슨. 그냥 여의도 지나다가 옛 생각 나서 왔지. 잘 있었나?”
최 과장은 예고도 없이 방문한 김재민 국장이 불편하기만 했다.
은퇴한 상관이 갑자기 찾아올 땐, 대부분 업무 관련 청탁을 해 올 때이기 때문이다.
“일단 앉으시죠.”
“많이 바쁜가? 오랜만에 사무실 오니까 답답하기도 한데, 나가서 저녁이나 하지?”
“죄송합니다. 요즘 저희가 민감한 건을 맡고 있는지라…… 보는 눈도 많고요.”
“그렇구먼.”
“어인 일이신지요.”
“숨넘어가겠다. 그냥 이 나이되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추억팔이나 하고 그래, 이 사람아.”
계속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럴수록 경계심만 더욱 커졌다.
“그러고 보니 자넨 벌써 과장 됐구먼? 나 때는 팀장이었던 것 같은데.”
“예. 4년 차입니다. 국장님 계셨을 때가 제가 팀장 막 진급했을 때고요.”
“기억나는군. 그땐 자네 막 진급해서 업무도 헤맸는데.”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최 팀장한테 참 신경 많이 못 써 줬어. 큰 사건 밀어주고 끌어 줬으면 비고시라도 충분히 국장까지 달았을 재목인데.”
최 과장은 기가 찼지만 웃지는 않았다.
현역으로 있을 때 고시 출신, 동문을 가장 팍팍 밀어줬던 게 김재민이었다. 그런 양반이 10년 지나 갑자기 고해성사를 한다?
예상대로 추억팔이는 오래 지나지 않았고 곧 그가 말을 꺼냈다.
“다름 아니라 최 과장. 최근에 맡고 있는 건 하나 있지?”
“어떤 사건 말씀인지.”
“YK암보험, 유경생명 말이야.”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건너건너 들었어. 사안이 많이 복잡한데, 선배들 의견이 필요하단 얘기가 돌더군.”
어디까지 하나 싶어 잠자코 있자 혼자서 10분을 떠들었다.
“국장님. 그렇게 뜸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기왕지사 다 아는 거 나도 편하게 말하지. 공정위에서 이번 사건 유보시키는 게 어때?”
“유권해석 말씀이십니까?”
“그래. 유권해석은 너무 위험한 칼이야. 약관 애매하다고 판단내리면 전 보험사가 다 달려들어.”
“아무리 그래도 잘못된 게 있으면 바꿔야지요.”
“그러니 누가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나 객관적으로 판단하란 말일세. 요양치료비는 대법원 판례에도 있어. 보험사들이 지급 거절하는 거 다 판례에 근거해서 하는 일이야. 그걸 대체
우리더러 어쩌란 건지 참.”
딱 봐도 유경생명 대변인인데 ‘우리’는 무슨.
얼마 받고 이 짓 합니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라는 말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최 과장이었다.
“이거 사실 나 재임할 때도 몇 번 올라왔던 문제야. 근데 어떻게 대법 판례를 어기겠나? 우리가 나설 순 없어.”
“국장님. 판례가 헌법도 아니고 시대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뭐?”
“조언 감사합니다만 현 상황에서 제가 무어라 답변드리긴 힘듭니다. 그래도 좋은 말씀 많이 참고하겠습니다.”
더 심한 말로 자존심을 콱 짓밟아 주고 싶었지만 그쯤에서 그만뒀다.
과거 상관이었고 인간적으로도 얽힌 감정이 많다.
끗발 다 떨어진 영감을 보낼 정도면 유경생명이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