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33
33화
전관예우? (1)
급한 부름에 과장실로 달려가니 탁자엔 아직 치우지 않은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최 과장의 얼굴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누가 깽판이라도 치고 간 겔까?
“부르셨습니까, 과장님.”
“현재 조사 어디까지 됐지?”
“금감원에서 유경생명 자료 다 넘어 왔습니다. 보험 약관 때문에 생긴 분쟁이 생각보다 더 많더군요. 500여 건의 부당지급이 추가 발견되었습니다.”
“500건? 그게 다 요양치료 분쟁이야?”
“아닙니다. 비급여 항암치료부터 관련 분쟁이 많았습니다.”
최 과장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자료를 훑었다.
요양치료비는 빙산의 일각이다.
지금까지 YK가 부당하게 보험료를 지급하지 않은 사례는 500여 건을 넘었다.
“이거 다 문제 삼을 거냐?”
“아닙니다. 다 문제 삼을 수도 있다는 것만 보여 줄 겁니다.”
최 과장은 피식 웃었다.
약점 잡아 놓고 협상 카드로 쓰겠다는 것이다.
“오늘 아주 귀한 손님이 다녀갔다.”
“……혹시 유경 그룹 인사입니까?”
“아니, 우리 식구야.”
“예?”
“김재민 국장이라고 10년 전에 은퇴한 양반이야. 근데 오늘은 유경생명 대변인으로 오셨더구먼.”
“무슨 말씀을…….”
“별 얘기 다 했어. 이 사건이 왜 안 되는지, 법대로 가면 우리한테 어떤 게 불리한지…… 자기 경험 살려서 노련한 얘기 많이 해 주더구먼. 물론 우리한테 불리한 내용만 골라서.”
준철은 표정관리가 안 됐다.
보험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보험약관은 보통 금감원, 공정위 등에서 은퇴한 고위직들을 모아 놓고 자문을 받는다.
그들의 역할은 약관을 어떻게 써 놔야 합법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지 알려 주는 일이며, 대부분 다 현직에 있을 때 당해 봤던 경험을 토대로 하는지라 정교하다.
“그만큼 예민하다는 거지. 이젠 피차 다 알잖아? 우리가 유권해석 내리면 금감원이 바로 중징계 때린다는 거.”
“네. 저희만 막으면 이번에도 금감원은 지급권고로 끝낼 겁니다.”
다행스러운 건 최 과장 얼굴이 전혀 개의치 않아 보인다는 거다.
“어떻게 했음 좋겠어, 이 팀장은?”
“…….”
“허심탄회하게 말해.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놈이 이제 와 무슨.”
“유권해석이 필요하다 판단 내렸습니다. 의료법상 요양병원도 의료 시설인데 그들이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최 과장은 대답 없이 준철의 말만 들었다.
“그리고 금감원에서 권고를 내렸을 땐 분명 종합적인 사정을 다 고려했을 겁니다. 근데 이걸 어기고 피해자들과 치료비 협상한 건, 사실상 권고를 무시했다는 겁니다.”
“좋아. 그럼 유권해석 내리자.”
준철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기대하던 일이긴 한데, 이걸 이 자리에서 바로?
“과장님. 정말이십니까?”
“그래. 보면 볼수록 가관이야. 금감원 권고도 무시하고, 이젠 우리한테 전관까지 보내고. 물론 나 혼자 단독으로 결정할 순 없고, 국장님께 보고드릴 거야. 근데 걱정하지 마라.
변수가 없는 한 꼭 받아 낸다.”
최 과장의 단호한 목소리는 준철의 보고를 듣기 전부터 판단이 섰음을 의미했다.
사실 김재민 국장의 방문이 최 과장의 결단에 불을 지폈다.
시간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확신이 든다.
***
소비자정책국 이지성 국장.
공정위에서 ‘약관 통’으로 꼽히는 사람으로 그 또한 보험사 약관을 종류별로 외는 인물이었다.
그는 최 과장을 통해 모든 사실을 보고 받았지만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었다.
신중해야 한다.
보험사의 파렴치한 만행과 별개로, 공정위의 유권해석은 업계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것이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중립적으로 판단하려는 그였지만 평정심이 한 번에 무너지는 대목도 있었다.
“그래서 김재민 국장님까지 다녀갔다 이거야?”
“예. 옛날 생각나서 왔다는데 얘기가 계속 그쪽으로 흐르더군요.”
“뭐라 그러던?”
“대법 판례까지 있는 사건인데 싸워서 뭣하겠냐. 금감원한테 넘기고 공정위는 손 떼라. 대강 이런 말이었습니다.”
이지성 국장은 실소가 나왔다.
저 정도 발언이면 노골적으로 수사 손 떼라고 압박한 거다.
“그래서?”
“별다른 대꾸 안 했습니다. 언쟁 붙어 봤자 저희만 손해니.”
“이거 참 내가 다 쪽팔리는구먼. 사람이 나이 먹으면 추해지나 봐. 빤히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찾아왔을꼬.”
명예롭게 은퇴했으면 국민들이 주는 연금에 감사하며 살지.
자기 이름에 먹칠하는 짓을 왜 했을까? 이 따위 부탁을 뿌리칠 수 없을 만큼 큰돈이라도 받았을까?
솔직히 말하면 괘씸했다.
같은 급인 자신에게 찾아오면 안 될 걸 아니, 일부러 과장급을 찾아온 것이다.
“좋게 생각하자. 은퇴하고 나서도 공정위가 많이 걱정된 모양이야. 유권해석 내리면 파장이 큰 건 사실이잖아.”
“예.”
“실무진 의견은 어때? 확실히 대법 판례가 있으면 불리한 것 같긴 한데.”
“판례가 이번 사건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게 실무진 결론입니다. 당시 판례는 사망률이 가장 낮은 유방암이었고, 현재는 신체 주요 장기입니다.”
최 과장은 준철이 넘긴 종합보고서 한 대목을 가리켰다.
“그리고 ‘암에 대한 필수치료’ 현재 이 조항 때문에 요양치료부터 비급여 항암치료까지 파생되는 분쟁이 500여 건을 넘습니다.”
“근데 이 조항이 YK암보험에만 있는 건 아니잖아? 우리의 유권해석이 보험사 전체를 적으로 만들 수도 있어.”
최 과장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언제는 저희가 보험사랑 편이었나요. 잘못된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죠.”
“자네는 이미 결심이 선 모양이야?”
“긴가민가했는데, 김재민 전 국장 찾아왔을 때 확신하게 됐습니다. 이거 지금 뜯어고치지 않으면 두고두고 분쟁이 일어날 겁니다.”
유경생명이 금감원의 권고만 들었더라면.
치졸하게 전임자 보내서 외압을 넣지 않았더라면.
적당히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경생명은 그 두 가지 금기를 모두 어겼고 새로운 불안감도 주었다.
10년 전에 은퇴한 사람도 관짝에서 소환할 정도면 다음엔 더 막강한 놈을 보내지 않겠나?
“솔직히 이건 보험업계 전체가 덤벼도 질 수가 없습니다. 요양시설도 의료법상 엄연히 병원인데 이를 거절하다니요. 법대로 가도 유리합니다.”
“그럼 이거 어떻게 개정시킬 건데?”
“일단 돈이 우선입니다. 요양병원비 청구한 사람들은 100% 지급해야죠.”
“그다음은 약관개정?”
“네. 특약으로 빼서 요양치료 가입자를 따로 받든가, 아니면 보장범위를 넓히든가 선택해야 할 겁니다.”
특약은 기존 가입자들에겐 해당 안 되는 얘기다.
어떤 경우에 이르든 보험사의 보장 범위가 넓어질 수밖에 없다.
“좋아. 그럼 유권해석 내려. 단 어디까지나 우리 역할은 유권해석까지야. 징계 논의는 금감원에서 정리한다.”
최 과장의 긴장이 살짝 풀렸다.
드디어 유권해석을 얻어 냈다.
***
공정위의 빠른 행보에 금감원은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았다.
빨라도 내년이라 생각했던 유권해석이 이번 주에 도착할 줄이야! 기업 징계는 금감원장에게 보고, 제재위원 구성 등 수많은 산을 넘어야 하는데 아직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과장님.”
박다영 팀장이 들어오자 이 과장이 바로 공문을 들이밀었다.
“어떻게 한 거냐?”
“어머, 유권해석 나온 겁니까?”
“아직 정식 발표는 아니야. 근데 공문 보낸 거 보니 곧 발표할 거다.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이런 속도가 나와?”
“과장님께서 잘 도와주신 덕분 아닌지…….”
“누구 맥여?”
박다영이 대답 대신 생긋 웃자, 이 과장도 무의미한 질문을 멈췄다.
향후 대책을 논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됐고. 이제 징계절차 준비해야지?”
“예.”
“자네가 고발한 사건이니까, 검사국 대표로 자네 임명할 거야.”
제재심의가 구성되면 일반 법정처럼 검사국과 진술인(기업)이 공방을 펼친다.
박다영에게 검사국 대표를 맡겼다는 건, 처벌 권한을 전적으로 위임하겠단 소리다.
“처벌 수위는 어느 정도로 생각해?”
“기관경고요.”
“주의로 끝낼 생각은 없나?”
“신사업 1년 중단, 이 정도는 해야 유의미한 처벌이 될 겁니다. 타 보험사에 좋은 교훈도 될 거고요.”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반발을 크게 산다는 거야.”
“그래도 해야 합니다.”
박다영은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이 과장도 딱히 그 소신을 꺾고 싶지 않았다.
공정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지원사격, 유권해석을 얻어 오지 않았나?
“좋아, 처벌 수위는 검사국 고유권한이니까 자네한테 맡기지. 근데 한 가지만 알아 둬. 이 공문 우리한테만 온 게 아니라 유경생명한테도 갔다. 근데 아직까지 반응이 없거든?”
백기투항을 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유경생명에선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건 우리 징계에 무조건 불복하겠다는 거야. 재판까지 가겠지. 그 꼴 안 보려면 제재심의에서 기를 콱 죽여 놔야 돼.”
금감원 징계의 유일한 약점은 바로 강제성이 없다는 것이다.
기업은 징계결정에 불복할 수 있고, 그리되면 또 3심까지 지루한 싸움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 분란의 불씨를 잠재우느냐 마느냐는 이제 박다영에게 달렸다.
유경생명에 ‘법대로 가도 네들에게 유리할 게 없다.’는 걸 정확히 이해시켜야 한다.
“부담되면 그냥 나한테 맡기든가. 박 팀장 추진력과 집요함은 확실히 나 이상이야. 근데 가서 말싸움하는 건 짬밥과 업력에서 나온다.”
“처음 수사한 게 저였으니, 마무리도 제가 하고 싶습니다.”
그래, 어련하겠지.
과장인 자신이 적당히 끝내자 한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온 게 이놈이니까.
이 과장은 신입팀장이란 우려를 말끔히 지우곤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내가 생각해 둔 멤버야. 대법원 판례가 이 사건과 무관하다 말해줄 의학 전문가, 의료법상 요양시설도 병원이다 말해 줄 법률 전문가. 제재심의 전까지 이 사람들 다
섭외해라.”
“알겠습니다. 근데 과장님. 제재심의 정확한 날짜가…….”
“공정위에서 유권해석 공식 발표하면 바로 열릴 거야. 그에 필요한 절차는 내가 다 할 테니 걱정 말고.”
“아, 네. 감사합니다.”
“가 봐. 제재심의 준비하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다. 당분간 나보다 일찍 퇴근하면 바로 집합시킬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여부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온 박다영은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신입 팀장으로 기업들 징계심사에 참석하는 건 처음 아닌가?
그것도 금감원을 대표하는 검사국을 맡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제재심의에서 이놈들을 찍소리 못 하게 만들 수 있을까, 박다영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