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36
36화
징계심사 (2)
“뭐? 제재심 내내 말 한마디 없다 갑자기 승복을 해?”
“예.”
“대체 얼마나 뒤통수를 치려고! 이 자식들 꿍꿍이가 뭐야?”
“그게 저…… 꿍꿍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 피해자 구제 방안까지 가져왔더군요. 문제 됐던 요양치료비 지급하고, 약관도 고치겠다 약속했습니다.”
준철의 보고를 들은 최 과장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봐도 트로이 목마 같은데, 대체 이게 뭐람.
보통은 제재심의가 열리기 전에 기업과 금감원이 치열하게 징계수위를 협상한다. 제재심의는 여기서 합의된 내용을 확인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런데 승복을 해 버렸다.
대화에 응하지 않는 건 징계심사에 불복하겠단 의미인데, 갑자기 해 버렸다.
“이 구제 방안은 확실히 지킨다는 거야? 우리한테 눈속임하는 거 아니고?”
“유경생명에서 이미 예산 편성했다 합니다. 부당 미지급 사례도 최대한 지급하겠다고 하더군요.”
“앞으로는? 약관 개정도 하겠대?”
“당장의 행보로 봐선 이것도 이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경생명이 건넨 보고서에 특약 조항은 없었다.
서류대로라면 보험료 인상 없이 요양치료를 인정하겠단 뜻이지만…… 최 과장은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다.
세상에 말장난 잘하는 법조인들이 얼마나 차고 넘치는데?
기존 가입자들이 보험 갱신할 때 슬쩍 특약 넣었는지 아닌지도 감시해야 한다. 그게 공정위의 남은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럼 처벌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과징금 내역 다 빼고 기관경고만 하기로 했습니다.”
“막판에 금융위까지 과징금 때렸더만. 그건?”
“그것도 유예하기로 했습니다. 유경생명이 협조적으로 나오면 부과하지 않을 겁니다.”
이쯤 했으면 사실상 끝난 거다.
아무리 잘나가는 기업이라도 징계심사에서 한 말을 나중에 번복하긴 힘들다.
“과장님. 그냥 한번 믿어 보시죠. 유경생명이 이 말을 번복할 만큼 바보들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밀린 보험비 턱턱 내주는 자선사업가도 아니야.”
“그야 그렇지만.”
“이 팀장. 너 혹시 나 몰래 솜씨 좀 부렸냐?”
“예?”
“너 그 방면에선 선수잖아. 윗선에 보고 안 하고 사고치고 다니는 거. 금융위 끌고 온 거 너잖아?”
“……알고 계셨습니까?”
“네가 거기 다녀간 날 나한테 바로 연락이 왔다. 그게 나 몰래 될 것 같아?”
솔직히 윗선에 보고하고 절차를 기다렸어야 할 일인데 자의대로 했다. 복잡한 절차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그만큼이나 급했다.
“죄송합니다.”
“영악하게 일하는 놈 꾸짖으려고 한 말 아니다. 그보다 뭐야? 무슨 약점 쥐고 흔들었어?”
“그런 적 없습니다. 전 한 사장 만나 본 적도 없고요.”
그리 둘러대며 준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재민 전 국장을 찾아간 것까진 모르는구나.
하긴 자존심이 있다면 일개 팀장한테 망신당한 일을 하소연하러 오진 않았을 거다.
최 과장도 몇 번 더 추궁하다 무의미한 질문을 그만뒀다.
지금은 이 파장을 어떻게 수습할지가 더 중요하다.
“이 팀장. 너 그러지 말고 한 2년만 더 나랑 일하자. 쓰던 사무실 계속 빼 줄게.”
“……예?”
“이 바닥에 YK가 한둘이겠냐. 타 보험사 약관도 전부 다 개정시켜야지? 우리가 선례를 만들었으니 이젠 타 보험사도 다 요양치료비 지급해야 돼.”
암에 대한 ‘직접’ 치료 같은 추상적인 조항도 없애야 할 것이다.
“그뿐이겠냐? 이놈들 지금은 꼬리 내려도 잠잠하다 싶으면 또 기어올라. 지금 보고 된 비급여 분쟁만 500여 건인데 사후 처리 누가 할 거야?”
“…….”
“우리는 종합국과 달리 지방 출장 없고 야근도 별로 없다. 같은 월급에 이 정도 조건이면 근사하지? 참고로 나는 일 잘하는 놈들한테 고과도 팍팍 잘 밀어줘.”
-똑똑.
최 과장의 집요한 스카웃 제의가 이어질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 한 명이 들어오더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과장님. 저…… 유경생명 한석호 사장이 찾아왔는데요.”
***
제재심의 때 독기 가득했던 얼굴이 불과 몇 시간 새 팍 삭아 버렸다. 심적으로 고단했던 하루였겠지.
한석호 사장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찻잔을 내려놨다.
“먼저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김재민 전 국장님이 여길 다녀간 것으로 아는데, 저희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큰일을 처리하다 보면 서로 오해도 생기기 마련이지요. 괜찮습니다.”
“……이해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최 과장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용건만 말하라는 뜻이다.
“앞으로의 일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공정위의 이해를 좀 구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요양병원비를 한 번에 다 지급하면 저희 재정에도 타격이 큽니다. 물론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을 다 처분하고 있지만 시일이 좀 걸리겠습니다.”
“장황한 설명은 됐습니다. 요지가 뭔지요?”
“현실적으로 요양비를 전액 지원하긴 힘듭니다. 이를 입원비로 계산해서 지급하라 하면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최 과장이 맥이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비장한 얼굴로 와서 겨우 한다는 얘기가 결국 지급비 깎아 달란 거 아닌가?
“요양비도 전액지급이 아니라 환자 부담이 30% 아닙니까?”
“예. 입원비로 처리해도 그리 큰 차이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별 차이 없으면 약속한 대로 ‘요양비’ 지급하세요. 입원비 말고 요양비.”
“……이런 말씀 뭣하지만 저희도 많이 양보해서 승복한 거 아닙니까. 구체적인 액수 정도는 양해해 주십쇼.”
협상이 뜻대로 안 풀리자 한 사장이 곧 본색을 드러냈다.
최 과장은 그 모습에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그럼 그렇지. 푸닥거리를 한 번도 안 하고 순순히 들을 놈들이 아닌데. 지급비 깎아 달라는 추태가 눈물겹도록 반가웠다.
“이 팀장. 이번 사건 실무자로서 이 제안 어떻게 생각해?”
고개를 돌리자 이미 싸늘하게 굳은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 안 됩니다. 법적으로 요양시설도 병원이라 당연히 다른 질병이랑 동일하게 70% 지급해야 합니다.”
“그러니 저희가 당국에 양해를 구하는 거 아닙니까? 이 돈 한 번에 다 마련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이참에 이사 한 번 가시죠. 서초동 사옥 매각하면 그 돈 충당하고도 남을 겁니다.”
“뭐, 뭐요?”
“아니면 대대적인 구조조정? 유경생명 재무 상태 괜찮던데 사채(社債) 발행은요? 유상증자도 있습니다. 재원 마련할 방법 더 알려 드릴까요?”
보험사의 돈 없다는 말은 전혀 믿을 게 못 된다.
보험은 사실상 금융업 아닌가? 가입자들에게 돈을 받아서 그 돈을 굴리는 게 보험사의 일이다.
증권시장에서 부도·파산율이 가장 적은 곳이 보험업이며, 이들이 뜯어 가는 보험료는 평균 지급비보다 한참 많다.
이런 업계 생리를 가장 잘 아는 것이 김성균이었다.
그리고 김성균은 왜 이놈들이 이제 와 이런 말을 하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솔직히 이 제안 어차피 안 될 거 알잖아요. 제가 보기엔 다른 목적이 있는 거 같은데?”
“…….”
“뭡니까? 이번 이슈 이용해서 보험료 인상할 겁니까? 갑자기 없던 특약이 생기고, 갱신 가입자들 보험료 올라가는 거 아니죠?”
보험사는 패소도 호재로 이용하는 놈들이다. 앓는 소리 팍팍 해 대며 은근슬쩍 보험료를 인상하겠지.
저의를 간파당하자 한석호는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최 과장은 이 광경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봤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탐나는 놈이다. 아예 집무실을 따로 빼주고 싶을 지경이다.
“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런 거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무의미한 논쟁 그만둡시다. ‘요양치료비’로 전액 지원하세요.”
“……좋습니다. 그럼 현 환자들에겐 다 지급할 터이니.”
“거기엔 당연히 금감원에서 지급권고 내렸던 사건들도 포함이죠. 왜요? 이번엔 또 소급 적용 빠져나가시려고요?”
“그거는 그래도 서로 합의를 한 내용 아닙니까?”
“합의가 아니라 협박. 금감원에서 주라고 권고 내렸는데, 그 돈을 왜 깎고 있어요. 꼭 언론에 몇 줄 나가 봐야 정신 차립니까. YK암보험은 시한부 환자랑 시간 싸움하는 데라고?”
한 사장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괜히 지급비를 깎아 보려고 덤볐다가 본전도 못 찾게 생겼다.
대화가 끝날 조짐을 보이자 마지막에 최 과장이 말했다.
“우리 쪽 얘긴 다 끝난 것 같은데, 더 할 말 있습니까?”
“…….”
“참고로 갑자기 보험료를 인상하거나, 갑자기 없던 특약이 생기면 우리 약관심사과가 다 잡아낼 거요. 좋게 얘기할 때 끝냅시다.”
한석호는 망연자실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돈은 10원 한 장 깎을 수 없다. 이번 이슈를 빌미로 보험료를 슬며시 인상할 계획도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
한바탕의 푸닥거리가 끝난 후.
준철은 최 과장의 더욱 집요해진 스카웃 제의를 뿌리치고 겨우 과장실에서 나왔다.
고단한 하루다. 오늘 하루에 벌어진 일이 몇 갠가.
그렇게 1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한석호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팀장님이 적을 만드는 타입인가 보군.”
“뭐예요. 1층에서 여태까지 나 기다린 겁니까?”
“건방진 놈. 김재민 국장 협박했던 것도 너지?”
“아이고- 얘기가 거기서 정리된 모양이네.”
“착각하지 마. 우리가 물러선 건 어차피 1년 동안 신사업 안 해도 된다는 계산 때문이지 너희들한테 굴복한 게 아니야.”
이젠 정말 볼 장 다 봤다 생각한 모양이다.
준철은 한석호의 막말에 화가 나기보다 동정심이 더 크게 들었다. 지금 이놈 속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바로 자신 아닌가?
괘씸하긴커녕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솔직히 한참 선배인 사람을 찾아가는 게 쉽진 않았는데. 역시나 막판에 한 일이 신의 한 수였다.
준철은 그의 분풀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타이르듯 말했다.
“한석호 씨. 그냥 줄 돈은 줘. 보험사가 보험 사기꾼을 잡아야지 왜 엄한 환자를 잡고 있어.”
“뭐, 뭐야? 한석호 씨?”
“가족이 암 걸리면 그 집 기둥 뽑힙니다. 치료비 대고, 가족들 간병 시작하면 아파트 평수부터 작아진다고. 이 불행을 막으려고 있는 게 보험 아니요.”
“젊은 놈이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네가 보험을 알아? 기업을 알아?”
“그걸 왜 몰라. 그 짓거리 하다 지옥에도 못 가고 있는 게 나인데.”
“뭐?”
“살아 보니 인생사 응과응보입디다. 절실한 사람들 생명 가지고 시간 싸움 말아요.”
살아 보니? 인생사? 인과응보?
젊은 놈이 기가 차는 소리만 해 댄다.
“이 미X놈이 어디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지만 한 사장을 기다리는 건 더 큰 치욕이었다.
준철은 이미 손을 흔들며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