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37
37화
징계심사 (3)
[YK암보험, 금감원 징계에 승복]
[당초 예측과 달리 큰 반발 없어]
[추후 암 치료에도 요양치료비 지원할 것]
업계에 파란이 벌어질 거란 예상과 달리, 이번 싸움은 금감원의 손쉬운 승리로 끝났다.
사태가 조기에 진화되었기에 우려하던 주가 대폭락은 없었다.
유경생명은 주가 공시를 통해 공식적으로 패배를 선언했고, 자신들이 제출한 피해 구제안도 발표했다.
-기존 가입자들에게도 소급 적용해 요양치료비를 지급할 계획.
-신체 주요 장기 등에 한정, 앞으로 요양치료도 인정할 계획.
이 단순한 발표가 업계에 미친 파장은 대단했다.
선두 그룹에서 요양치료를 공식 인정하기로 했으니 후발 주자들도 뒤따를 수밖에 없다.
타 보험사들도 줄줄이 약관을 개정했고, 갱신을 앞둔 가입자들에게 개정 사항을 전달했다.
하지만 평범한 가입자들이 이를 한 번에 이해할 순 없는 노릇.
언론 발표가 나가자 공정위 약관심사과엔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보험 갱신을 앞두고 있는데 그럼 저는 보험료가 인상되는 겁니까?
-혹시 요양치료비를 받으려면 특약에 가입해야 하나요?
-저는 피해 신청을 하지 않은 가입자인데…… 요양치료를 받은 적이 있어요. 저도 소급 적용이 되나요?
“잘 들어. YK뿐 아니라 모든 보험사가 소급 적용해서 지급해야 돼. 그리고 이를 빌미로 보험료 올리면 약관 위반이다. 요양병원은 의료법상 병원이니, 당연히 특약 대상도 아니다.”
“네.”
“가입자들 불안해서 당분간 전화 더 올 거야. 곧 매뉴얼 정리해서 뿌릴 거니까 그때까지 이것만 확실히 설명해.”
“알겠습니다.”
최 과장은 그날 소비자국 전화기를 전부 동원해 민원 업무에 주력했다.
“후우…….”
과장인 자신도 민원 전화를 받아야 했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썩은 부위를 도려냈으니 진통이 따르는 건 당연지사.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는 중이다.
공정위 전 부서가 민원 업무에 주력할 때, 유경생명도 징계안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유경생명은 현 환자들에게 요양치료비를 전부 지급했고, 유가족들에게도 치료비를 전액 지급했다.
놈들의 빠른 구제 처리는 더 이상 당국과 싸우지 않겠다는 확실한 백기투항이었다.
***
“팀장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치료비 부담을 한층 덜어서일까.
다시 만난 피해자들은 그때보다 한결 밝아진 모습이었다.
“별말씀을요.”
“정말 선생님 덕분에 큰 시름 덜었습니다. 모두 이 팀장님 덕분입니다.”
“가당치도 않습니다. 당연히 받았어야 할 돈인데. 보험비 지급은 어떻게 됐습니까?”
“여기 계신 분 모두 지급받았습니다. 징계심사 끝나고 나니 바로 입금해 주더군요.”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였다.
몇 년을 끌어오던 돈이 단 며칠 새에 전액 입금되었다. 입원비가 아닌, 요양비로 계산해서.
지급액은 10원 한 장 새지 않았고 준철도 겨우 큰 시름을 덜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이게 모두 선생님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선생님들이 힘든 투쟁을 해 주셔서 미래의 피해자까지 막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야말로 감사드려요.”
이 승리는 아픈 몸 이끌고 홀로 싸웠던 이들의 공이다.
솔직히 아직은 이들에게 이런 말을 들을 자격도 없다 생각했다.
“박 선생님도 감사드려요. 저희 사건 처리하시느라 애 많이 쓰셨죠?”
“아닙니다.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인데요.”
“선생님 오기 전에 이 사건 관심 가진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맞아요. 박 선생님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이젠 정말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겠어요.”
늘 쾌활하고 밝은 박다영도 오늘만큼은 활짝 웃을 수 없었다.
돈 걱정은 덜었다 해도 아직 이들에겐 큰 싸움이 남았다.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단 환호가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들과 격려의 말을 나눈 후 준철이 유가족들에게 갔다.
“유경생명이 소급 적용도 하기로 했는데 어찌 되셨는지…….”
“네. 저희한테도 연락이 왔습니다. 합의금 제외하고 나머지 치료비를 지급하겠다 하더군요.”
“혹시 거절하신 건…….”
“아닙니다. 저희도 그냥 승낙했습니다.”
“어려운 결단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징계 수위가 성에 안 차시겠지만…….”
“아이고- 아닙니다. 얼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유례가 없는 처벌이었다는 거.”
정말 다행인 일이다. 유경생명의 강력 처벌을 요구했던 이들도 이쯤에서 만족해 주었다.
“뭐 금감원한테 징계받은 보험사 하면, 이미 망신 다 산 거 아니겠습니까? 신규 가입자도 많이 놓칠 테고. 저희는 그 정도 징계에 만족합니다.”
노인은 준철의 손을 덥석 잡았다.
“덕분에 죄책감 많이 덜었습니다. 집사람이 치료비 걱정만 하다 갔는데…… 남은 돈 들어왔으니 이건 집사람 선물이라 생각하겠습니다.”
“네. 좋은 곳에서 함께 기뻐해 주실 겁니다.”
“이젠 털어 내고 우리도 열심히 살아야죠. 하하.”
노인의 웃음에선 일말의 미련 없는 후련함만 느껴졌다.
죽은 사람을 이젠 떠나보내 줄 수 있다는 후련함. 앞으론 생업에만 종사할 수 있단 해방감만이 있었다.
***
“진짜야? 피해자들한테 치료비를 벌써 다 지급해 버렸어?”
“네. 우리 쪽에 통보도 않고 그냥 며칠 뒤에 입금시켜 버렸대요.”
“……이상하네. 지급 날짜 가지고 한번 또 속 썩일 줄 알았는데.”
“완전히 고분고분해졌어요. 이제 저쪽도 다른 뜻 없나 봐요.”
돌아오는 차 안.
박다영과 단둘이 남게 된 준철은 궁금한 것들을 빠짐없이 물었다.
그런데 나오는 대답마다 의외다. 최후의 발악까지 한 놈들이라 걱정 많이 하고 있었는데.
“징계는 언제부터 들어갈 거야?”
“다음 달부터요. 지금 YK암보험에서 신청한 신사업이 한 건 있는데, 이거 일단 보류시켰어요.”
“별다른 반발은 없고?”
“네. 없어요.”
이상한 질문이 계속되자 그녀가 조심히 물었다.
“왜요? 유경생명이 공정위한텐 뭔 짓 했어요?”
“한석호 사장이 직접 찾아왔었거든. 막판에 이상한 견적서 가져오더라. 요양비를 입원치료비로 계산하자고.”
그녀는 차체가 흔들릴 만큼 펄쩍 뛰었다.
“아니 이 자식들 정신 못 차렸네? 어디서 지급비 협상을?!”
“문제는 그게 본 목적이 아니었다는 거야. 우리한테 앓는 소리 하면서 슬쩍 보험료 인상하거나, 특약으로 빼거나 했을 거야.”
“어머, 그럼 안 되잖아요. 기존 가입자들한테 책임 전가시키는 거잖아요.”
세상에 보험약관 다 읽어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특히나 보험 갱신하는 사람들은 아예 설명도 잘 듣지 않는다.
보험료 슬쩍 인상시켜 버렸으면 너무나 간편하게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됐을 것이다.
“걱정 마. 우리 쪽에서 딱 잘라 말했으니까.”
“안 된다고 한 거죠?”
“응. 보험료 인상 없이 요양치료비 인정할 것 같아. 약관도 그렇게 바꾸겠다 했어.”
“어쩜 그리 끝까지 구질구질해요? 그사이 보험료 인상이라니.”
그녀의 거친 말이 준철의 아픈 기억을 건드렸다.
한 사장의 본 목적을 제일 먼저 알아챈 건 자신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늘 김성균이 쓰던 방법이었으니까.
과거의 김성균은 저들의 눈물을 뺏던 사람이었고, 저들이 늘 보험사기꾼으로 보였던 사람이었다.
“진짜 우리라도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진짜 선배처럼 성질 드센 사람 있어서 다행이지.”
과거 만행을 다 지울 순 없지만, 그래도 현 피해자들을 구했다.
이번 유권해석으로 앞으로 피해를 보지 않게 될 가입자도 많다.
이 정도면 그 죄책감을 조금은 덜어낼 자격이…… 있을까?
“근데 선배. 사건 다 끝냈는데 왜 이렇게 우중충해요?”
“……피곤해서지 뭐.”
“우리 나이에 피곤은 무슨, 흐흐. 수고했어요, 선배. 당연히 남은 일도 마무리해 주실 거죠?”
준철의 대답은 단호했다.
“남은 일은 프로페셔널한 분들이 해 주실 거야.”
“엥?”
“나 종합감시국 소속이잖아. 이제 원대 복귀해야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지금이 시작인데! 요양치료비 지급시켰으니, 이젠 비급여항목 분쟁 다 털어야죠.”
“그건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한다니까.”
“결자해지 몰라요? 시작한 사람이 끝내야지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그녀가 애원하듯 말했지만 준철의 결심을 바꿀 순 없었다.
과거의 죄를 다 속죄하려면 어느 한곳에 엉덩이 붙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애초에 보험업이 준철의 전문 영역도 아니었고.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지-인짜 매정하시네.”
“잘 부탁해.”
“근데 선배. 이제 다 끝났으니 하는 말인데 왜 이렇게 말투가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엔 안 그랬잖아요.”
얘기가 엉뚱한 데로 새자 핸들이 흔들렸다.
큰일이다. 난데없이 과거 얘기라니.
“……뭐?”
“아니 무슨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 않나, 외모가 멀끔해지지 않나. 사람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잖아요. 적응 안 되게스리.”
“내, 내가 어땠는데…….”
“지금과는 정반대였지 아마? 아니 근데 진짜 크게 다친 거예요?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준철은 땀이 삐질 흘렀다.
박다영은 그 모습이 재밌는지 계속 변죽을 울렸다.
“아- 알겠다. 선배가 갑자기 왜 다른 사람이 됐는지.”
“그게 무슨 소리야!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돼.”
“여자친구 생겼죠?”
“……응?”
“맞네. 선배 애인 생겼구나? 외모도 깔끔해지고, 뭔가 여자 대하는 무드도 달라지고, 딱 보니까 답 나오네.”
고맙게도 너무 엉뚱한 예측을 해 주어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요.”
“말했잖아. 큰 사고 당해서 과거 기억이 많이 없어. 가벼운 뇌진탕 증상이라는데 아직 후유증도 있고.”
“진짜예요? 뭐 여자친구 이런 게 아니라?”
“핸드폰 봐. 있나 없나.”
핸드폰은 정말 자신 있었다. 주소록이 채 20명도 안 되지 않나?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정말 핸드폰을 다 뒤졌고, 그 조촐한 명단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여자친구는커녕 아예 친구가 없는 수준이다.
“맞구나…… 준철 선배가 맞아. 아직도 친구가 없네.”
“사람을 뭐로 보고. 줘.”
“그럼 선배. 주말에 시간 한번 냅시다.”
“……또 무슨 수작이야. 아까 말했듯 나 더 이상 못 도와줘.”
“누가 일 도와달래? 뒤풀이하자고요. 선배가 도와준 것도 많은데 내가 찐하게 한턱 쏠게요.”
준철은 아차 싶었다.
차라리 여자친구라고 할걸!
화제를 전환한 건 좋은데 저건 더 최악이다. 사적인 관계로 엉키면 어떤 과거 얘기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이상하다. 내가 아는 이준철은 술자리 무척 좋아하는데?”
“알겠어. 하자! 나도 못 마신 지 오래라 몸이 근질근질하다. 근데 이번 주는 바쁘니까 다음에 연락 줄게.”
“주소록에 친구 한 명 없던데 뭐가 바빠?”
“…….”
“약속 어기지 마요. 우리 주말에 뒤풀이하는 겁니다.”
“알겠어. 그래 하자.”
엉겁결에 대답했지만 준철의 마음속은 어지러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 몸의 진짜 주인한테 더는 몹쓸 짓 하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도 내심 기대가 되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