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38
38화
뒷광고 (1)
-과장들, 모두 1308호로.
국장님의 전체 문자에 종합국 과장들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늘은 공정위 본청(세종시)에서 차관님 주재 회의가 열린 날이다. 하늘 같은 국장님도 이 자리에선 말단이나 다름없는데, 이런 분위기를 풍길 땐 대개 이유가 하나였다.
‘뭐지? 또 머리 아픈 사건 받아 왔나?’
“오 과장, 오 과장!”
사람 생각 다 비슷한 모양이다.
엘리베이터 앞에 들어서니 종합국 과장들이 오경철 과장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오늘 국장님 본청 갔다 오는 날 아니야? 왜 갑자기 1308호로 모이라지?”
“난들 아나.”
“자기네 이번에 큰 사건 들어갔다며. 암보험약관인가? 오늘 그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맞아. 이거 오늘 YK암보험 때문이지?”
오 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마무리된 지 한참이다.”
“뭐? 그럼 다 끝났어, 그 사건?”
“그래, 오늘은 그거 아니야.”
“그럼 대체 뭔데?”
“난들 아나. 근데 뭘 또 이렇게 호들갑들이야? 원래 국장님 본청 다녀오면 한소리씩 하잖아? 그냥 정기적으로 하는 정신교육 같은 거겠지.”
-띵동.
애석하게도 오 과장의 예측은 바로 빗나갔다.
“어머, 여기 지금 자리가 다 찼는데…….”
“아, 예. 올라가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만원이었던 것이다.
“홍 과장, 저거 소비자정책국이지?!”
“이 엘리베이터 탈 일이 없는데? 어딜 갑자기 저렇게 가지?”
엘리베이터가 13층에서 멈추자 이들의 불안이 최고조에 달했다.
“뭐야, 소비자국도 집합당했어?! 13층에서 멈춘 거면 1308호로 간 거 아니야?”
타 부처 과장들까지 한자리에 집합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큰 사건이람.
***
혹시나가 역시나.
불안한 마음으로 도착한 회의실엔 방금 전 마주친 과장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소비자국 이지성 국장도 있었는데 공정위에서 국장님 두 분이 나란히 있는 광경은 그리 흔한 게 아니었다. 총 다섯 명밖에 없는 사람들 아닌가?
다들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살필 때 종합감시국 김태석 국장이 일어나 말했다.
“시간 바쁠 테니 긴말 안 하지. 뒷광고야. 본청에서 오더가 내려왔어.”
그는 쓰윽 둘러보다 부연했다.
“뭐 다들 알 거다. 본청에서 우리한테 사건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규모가 꽤 커, 사건도 매우 복잡하고.”
김 국장은 오늘 본청에서 받은 PT자료를 띄웠다.
“확인된 액수만 600억. 한유미 과장, 연루된 기업이 얼마라 했지?”
“대기업만 6곳이요. 중소기업은 20곳이 넘습니다.”
“그래. 뭐 이쯤 하면 대강 사이즈 나오지? 뒷광고 받아먹은 인플루언서들은 더 많아. 한 과장, 이건 몇 명이지?”
“1억 이상의 대가를 받은 사람만 10명이 넘습니다.”
그녀의 설명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작은 한숨이 들렸다.
이것도 본청에서 슬쩍 모니터링해서 나온 숫자다. 본조사가 시작되면 이게 두 배가 될지 뒤에 0이 하나 더 붙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부터 이걸 다 뒤져야 하고, 당분간 소비자정책국과 종합국이 한 팀으로 움직여야 한다.”
20명 남짓 모인 과장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과장들 밑에 있는 수사 인력만 400명이 넘는다. 설마 400명을 다 갈아 넣겠다는 건가?
“여기까지 질문 있나?”
“국장님. 지금 모인 인력을 전부 투입하실 겁니까? 그럼 업무 공백이 너무 클 텐데요?”
“물론 추리고 추려야지. 주력 수사는 안전정보과 한유미 과장이 이끌 거야. 그리고 우리 종합국에서 서포트를 한다. 최대 인원은 한 50명?”
“하면 나머지 과장들은……?”
“잡무, 라고 말하면 기분들이 그렇겠지? 업무 대기라고 하자. 알다시피 뒷광고는 우리가 꾸준히 지적해 온 문제다. 이번 수사에서 업계 실태를 파악하고 나아가 나중엔 ‘그놈’들하고
싸울 수도 있다.”
회의실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국장님이 말한 ‘그놈’들은 바로 웹튜브 한국 지사다.
국내 스트리밍 서비스를 독과점하고 있는 놈들. 미국계 기업이라 국정감사에도 소환하기 힘든…… 무소불위의 기업을 상대할 수도 있단 뜻이다.
“무조건 전면전을 하겠다는 건 아니니 미리 겁먹지 말고. 여러 여건 고려해서 우리도 신중히 결정할 거다. 한 과장?”
“예. 그럼 본청에서 받은 문제 자료 공개하겠습니다.”
소비자안전정보과 한유미 과장은 연단에 올랐다.
나긋나긋한 미소와 달리 그녀는 방송국에서 미친개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다.
홈쇼핑 업체의 허위 광고를 적발해 과징금 30억을 때렸고, 인기 드라마의 지나친 PPL을 적발해 방통위 경고를 받아 낸 전력도 있었다.
이제 곧 쉰을 바라보는 그녀는, 탄탄한 자기 관리로 골드미스가 아닌 다이아미스로 불리는 여자였다.
“이 영상부터 보시죠.”
단상에 오른 그녀가 동영상 하나를 틀었다.
하지만 너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걸까?
웹튜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뷰티 채널이었고, 이상한 점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눈살 찌푸려지는 홍보가 몇 개 있는 정도다.
“이게 최소 6천만 원짜리 광고였습니다.”
“예? 아니 몇 개 눈에 걸리긴 했는데, 그게 6천이라고요?”
“우리 계산이 너무 과장된 거 아니에요?”
“다시 보실게요.”
그녀는 화면을 돌려 첫 장면에 고정시켰다.
“여기서부터 뒷광고가 시작이에요.”
“여긴 첫 장면 아닙니까?”
“네. 근데 이 여자가 들고 있는 주스 보이시죠? 이게 오르비 주스라고 지금 다이어트 음료로 가장 핫한 상품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보면 갑자기 야외 방송 켠다고 선크림을 바르죠?
마찬가지로 뒷광고입니다.”
한 과장이 뒤이어 튼 영상에선 그 실체가 더 선명해졌다.
그녀는 매 방송마다 오르비 주스를 마셨고, 이유 없이 선크림을 발랐으며, 뜬금없는 이유를 들어 자기 틴트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영상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영상이 돌아갈 땐 과장들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언니만 믿어! 박혜선이에요. 오늘 소개할 스물여덟 번째 내돈내산 후기는요. 바로바로~ 이 마스크팩!]
“이 제품은 뒷광고가 다 확인된 제품입니다.”
[중소기업 화장품 무서워서 못 쓴다고? 언니! 그거 언제 적 얘기니. 호호. 대기업 제품은 다 간판비니까 가성비만 따져요. 제발 가.성.비.만!]
논현동 최고의 헤어 디자이너로 알려진 그녀는 유난히 중소기업 제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유명 패션쇼의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사람이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인지도 효과는 바로 조회수와 구독자수로 이어져, 채널 개설 2주 만에 골드버튼까지 받았다.
“보면 아시겠지만 꾸준히 자기 인맥 활용을 하죠? 비단 화장품, 의류뿐 아니라 다이어트 식품까지 다 홍보를 하고 있죠?”
한 과장은 그 실체를 낱낱이 까발린 뒤 종이를 들었다.
“근데 이 사람이 홍보한 제품 상당수가 다 허위 광고였습니다. 없는 기능 있다고 한 건 예사고. 현재 식약처에 안정성 검사를 의뢰해야 할 제품도 다수입니다.”
이게 바로 뒷광고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허위과장 광고를 잡을 방법이 없다. ‘나는 그 제품이 너무 좋아서 그런 기능이 있는 줄로 알았다.’라고 잡아떼면 감기약도 암 치료제로 팔아먹을 수 있다.
그녀의 발표가 끝났을 때, 과장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국장님의 시선을 피했다.
숱한 업무 경험으로 단련된 아주 강한 직감이 들었다.
이번 수사에 차출되면 정말 지옥일 거라는.
***
박다영과의 만남은 예상대로 뒤풀이를 가장한 데이트였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했고 고급 와인까지 곁들였다.
하지만 그 황홀한 데이트가 끝났을 때, 준철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몸의 진짜 주인에 대한 죄책감…… 그러면서도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는 자책…….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식당이 별로였다.
“미안해요, 선배. 여기가 신촌에서 가장 유명한 스테이크집이라는데, 양이 좀 부실했죠?”
“괜찮아. 그래도 밥은 많이 주더라.”
“나도 이런 맛집 같은 건 약해서. 흐흐. 대신 우리 2차 해요. 안주 먹으면 배부르겠죠.”
10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스프만 먹다 나온 기분은 왜일까?
신기하게도 여긴 신촌에서 손에 꼽히는 맛집이었다. 몸은 바뀌어도 젊은 사람들 입맛은 따라갈 수 없는 모양이다.
이런 찝찝함과 달리 식사 자리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우려했던 과거 얘기는 일절 나오지 않았고, 취미나 업무 고충 같은 건설적인(?)인 얘기들만 오갔으니 말이다.
“잠깐만요, 선배. 어머! 마이셀 선크림이 드디어 나왔네.”
그렇게 신촌 로터리를 걷던 중 갑자기 박다영이 펄쩍 뛰었다.
“세상에 재고가 이렇게나 많아? 선배, 선배도 일로 와 봐요. 이거 디피된 거 한번 발라 봐요.”
“선크림? 난 이런 거 안 바르는데. 끈적해서…….”
“촌스럽기는! 그냥 선크림이 아니라 요즘에 없어서 못 바르는 기능성 선크림이에요. 이거 티그리가 쓰는 거잖아요. 몰라요?”
“뭔 그리?”
“연예인 스타일리스트, 티그리. 몰라요? 이 사람 방송에도 자주 나왔는데.”
알 턱이 있나.
연예인 얼굴도 구별 못 하는데 어떻게 스타일리스트까지.
“아…… 그 사람? 근데 난 이거 처음 들어 보는 브랜드인데.”
“중소기업 제품인데 이게 요즘 가성비 갑이라고 인터넷에서 난리예요.”
마이셀은 일반 선크림이 아니었다. 자외선은 물론 방사능(?)까지 막아 주는 기능성 화장품이었다.
햇빛에는 자외선뿐 아니라 인체 유해한 것들이 많은데, 제품 설명서에 따르면 나쁜 건 다 차단해 준다 한다.
뿐이랴? 특허받은 알로에 배합 기술로 피부 트러블이 심한 고객들도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상품이었다.
‘……안티 에이징까지? 이건 선크림이 아니라 만병통치약인데?’
그리 생각하다 준철은 눈이 커졌다.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무슨 선크림 하나에 5만 원이야?”
“어휴- 이런 거 X콤이랑 X라랑스에서 팔면 10만 원도 넘어요. 반값이면 거저지.”
“……그래?”
“잔말 말고 내가 살 테니까 받아요. 이거랑 또 이 마스크팩. 이것도 요즘 상품 후기 좋거든요? 잠잘 때 10분만 하고 자면 내일 하루가 달라져요.”
참 의외였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여자가 이런 거 고를 땐 눈이 뒤집힌다.
어쩌면 이 모습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저 미모를 유지하려면 안 보이는 곳에서 부단히 노력해야겠지.
“됐다. 이 정도만 꾸준히 발라도 노화가 팍 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고마워. 이제 노래랑 춤만 잘하면 연예인 할 수 있겠다.”
“푸흡. 왜요? 저 푼수 같아 보여요?”
“비꼰 거 아니고 진짜 고맙다는 뜻이야. 2차도 내가 살게. 대신 이번엔 내가 아는 데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