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45
45화
해명 영상 (2)
검은 정장에 크로마키 화면.
사과 방송의 정석이다.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한 김미영은 허리를 숙였다. 뒷광고 안 받았다고 해명했던 엊그제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김미영입니다. 먼저 제가 말주변이 없어 영상을 녹화본으로 찍는다는 거 양해해 주십쇼. 최근 불거지는 논란에 해명하기 위해 이 영상을 올립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준비된 원고를 들었다.
“최근 뒷광고 논란이 불거지며 많은 스트리머들에게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중 저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영상을 게재하였기에 이렇게 알려 드립니다.”
“저는 지난 2월부터 지금까지 약 스무 차례에 걸쳐 광고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중엔 현재 뒷광고가 명백해진 여러 기업들도 있습니다. 광고 규정을 준수해 여러분들께 오해가 없는
정보를 전달했어야 하지만 영상을 올리는 과정에서 다수의 실수와 떳떳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광고 표기 누락 등의 송출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하지만 의도를 했건 하지 않았건 송출 과정에서의 실수는 오롯이 저의 잘못입니다.”
“현재 저와 편집팀은 검찰에 소환되었고, 모든 내용을 소명할 계획입니다. 수사에 앞서 이 사실을 팬 여러분께 알려야 한다 생각했기에 이 영상을 올립니다.”
그녀는 준비된 원고 막바지에 이르자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옳고 그름을 떠나 물의를 일으킨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를…… 저를…… 사랑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드렸습니다. 모든
영상을 내리고 긴 시간 자숙에 들어가겠습니다.”
***
“뭐죠 이 여자?”
“이게 사과 영상입니까?”
반원들의 반응이 곧 준철의 반응이었다.
대체 이 난해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해명은 뭘까?
“뒷광고를 받아서 죄송합니다. 제일 중요한 건 이 말 한마디인데, 무슨 표기 누락을 들먹인데요.”
“……그러게요.”
“진짜 팬들한테 미안하면 무슨 제품이 뒷광고였는지 해명해야 되는 거 아녜요?”
이하동문이다.
재벌 총수들도 이 상황에선 저렇게 해명 안 한다.
김미영은 이미 뒷광고를 30여 차례에서 받은 사실이 드러났고, 이 중엔 내돈내산 후기로 쓴 다이어트 식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부분은 쏙 빼놓고 마치 모든 사실이 다 표기 누락인 것처럼 호도하다니!
“심지어 우리가 잡은 건 벌써 30개가 넘습니다.”
“그것도 20개로 내려쳤네? 팀장님. 이 여자 진짜 자백한 거 맞습니까?”
“네…… 자백은 다 했어요. 근데 팬들 앞에서 인정할 용기까진 아직 없나 보네요.”
준철은 김 반장에게 서류를 건넸다.
“이게 그 5인방 단톡 내용입니다.”
애매한 사과 영상과 달리 그녀의 자백은 무척 상세했다.
해당 모임이 언제부터 이뤄졌으며, 누가 어떤 차명계좌를 썼는지까지 세세히 나와 있었다.
“이제 영업사원들 계좌 뒤져서 이름 맞추기만 하면 될 겁니다.”
“이렇게 보니 더 괘씸하네요. 그냥 언론에 이거 뿌릴까요? 우리가 뒷광고 계모임도 잡아냈다고?”
“맞아요, 팀장님! 해명 영상을 저따위로 올렸는데 정상참작은 과분한 것 같네요.”
“……그래도 도와준 게 어디예요. 나머지는 시청자와 팬들 판단에 맡기죠.”
그렇게 반원들을 달래고 검찰로 보내자, 무서운 무리들이 등장했다.
안전정보과 팀장들이 또다시 떼거지로 몰려온 것이다.
“오해 마세요. 식약처가 긴급 공지 보내서 전달하러 왔습니다.”
“긴급공지요?”
“네. 그때 그 안정성 검사 탈락한 5곳, 아예 판매 정지 처분 내린답니다. 이 중 세 곳은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 못 한 정도가 아니라, 유해 성분까지 검출됐답니다.”
준철이 헐레벌떡 서류를 뒤지자 구 팀장이 슬쩍 말했다.
“하마터면 제2의 가습기 사태가 될 뻔했습니다.”
“그럼 시중에 유통된 이 상품들은…….”
“전량 회수해야죠. 반품 조치도 하고. 혹시 몰라 여기 사장-임원들은 출국금지 신청해 놨습니다.”
“아이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무슨요.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돈 흐름은 잡았습니까?”
“네. 연루자 한 명이 자백해서 단톡방 잡아냈습니다. 곧 다 드러날 거예요.”
“막힌다 싶으면 이 자료 들고 겁 좀 주세요. 얼마 못 버틸 겁니다.”
그렇게 진척 상황에 대해 나눌 때 송 팀장이 슬며시 말했다.
“이 팀장님. 이제 뭐 거의 다 드러난 마당에 묵은 감정은 풉시다. 우리가 오해한 부분도 많고 영 마음이 좋진 않았어요.”
“별말씀을요. 덕분에 자백 더 빨리 받을 수 있겠습니다. 수사 끝나면 언제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허허. 우린 또 이런 거 잘 안 빼는데.”
“그럼 술은 우리가 사겠습니다. 서로 마무리 잘해 봅시다.”
수사가 막바지에 달하긴 한 모양.
처음으로 그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눈 것 같다.
하지만 판매 정지된 상품을 다시 봤을 때, 준철은 다시 그 고통에 휩싸였다.
‘마이셀 선크림…… 올리버 마스크팩!’
***
?와…… 진짜 얼굴에 철판 깔았구나.
?뒷광고 안 받았다고 해명한 게 엊그제인데.
?그 와중에 뻔뻔한 거 보소. 저게 사과 영상이냐? ㅡㅡ 뒷광고를 받았다는 거야, 아님 광고 표기만 누락했다는 거야?!
비문학 지문 같은 김미영의 사과문은 커뮤니티 사이에서도 단연 화제였다.
흡사 4점짜리 킬러 조항 같았다.
사과도 아니고, 해명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제품이 뒷광고였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
도무지 출제자의 의도를 알아낼 수가 없다.
?최소한 무슨 제품이 뒷광고였는지 해명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업계에 첫 등장한 해명 영상인 만큼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그녀의 영상을 기점으로 스트리머들이 한둘 사과 영상을 게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뭐야?! 무조건 잡아떼라며! 이러다 다 죽게 생겼어!”
“나 지금까지 구독자 20만 떨어졌어. 나 어떻게? 이러다 곧 100만도 무너져!”
5인방들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려도 늘 충심을 보여 주던 팬들이 이젠 싫어요 테러를 가한다. 어찌나 신고를 해 대는지 최근 영상 족족 노란 딱지까지 붙어 버렸다.
“언니. 우리가 해명 영상 올린 게 더 역효과 나는 거 같은데?”
“사람들 아무도 안 믿어. 우리 진짜 어떡해?”
“김미영이 걔 대체 왜 그랬대? 진짜 연락 안 돼?”
5인방은 초조했다. 한 사람이라도 배신하면 이 모임의 실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언니!”
“왜 이렇게 징징거려. 애새끼야?”
“……뭐?”
“그 돈 안 받으면 누가 너 죽인다고 했니? 아님 너 그 돈 받을 때 나한테 상납한 거 있니?”
“그게 아니라 지금 대책을…….”
“이게 어딜 봐서 대책 논의야!”
박혜선이 이리 나오자 나머지 네 명의 여자들은 얼어붙었다.
“네들 말 똑바로 해. 내가 협박했어? 아님 나한테 커미션 줬어? 좋다고 받을 땐 언제고 이제 와 앓는 소리야!”
직설적이지만 늘 듬직했던 맏언니.
그 모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감정 상했다면 미안. 근데 사정 알잖아. 우리 중에 언니가 제일 이런 쪽에 빠삭한 거. 우리도 서로 말조심하자 이게 꼭 누구 탓도 아닌데.”
중간에 있던 여자가 중재하자 박혜선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 가지만 확실해 말해 줄게. 우리가 쓴 방법은 공정위가 아니라 국정원도 못 찾아내. 다들 상관없는 사람들 계좌 쓴 거잖아?”
“그, 그렇지. 나도 언니 말 듣고 아빠 말고 일부러 친구한테 부탁했어.”
“근데 문제는 지금 미영이가…….”
“그 얘긴 꺼내지 마. 어차피 서로 앞가림하기 바쁠 테니까.”
“안 꺼낼 수 없잖아. 만약 그 애가 우리 얘기 실토했으면…….”
“영선아. 너 같으면 꺼냈겠니? 자기가 받은 의혹 해명하기도 바쁜데, 남 이름을 팔겠어?”
그녀가 목소리에 힘을 줬다.
“설사 자수한다 해도 걔가 아는 건 새 발의 피야. 그냥 떨거지 하나 나가떨어진 거 가지고 왜 호들갑을 떨어?”
“……그래도 업계 돌아가는 꼴을 봐. 지금 다들 해명하고, 영상 내리고 난리잖아.”
“차라리 이게 다행인 거야. 중구난방 털어 대야 시선 분산되지. 만약 우리만 걸렸으면 진짜로 죽었다, 우리.”
그녀의 말에 설득됐는지 어느새 무리들은 고분고분해졌다.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 아직 해명할 때 아니야. 딴 놈들 더 나와서 무뎌지면 그때 슬며시 숟가락 얹으면 돼.”
“……진짜 그래도 될까?”
“정 불안하면 일단 댓글 막아 놓고 공지로 글 올려. 김미영 봤지? 해명은 딱 그 수준의 원론적인 얘기여야 돼.”
뒷광고를 받았다, 라고 시인하면 게임은 끝이다.
몇몇 영상들에 광고 표기 누락이 있었다. 이번 기회에 영상을 다시 검토하겠다. 해명은 딱 이 수준에 그쳐야 한다.
“그리고 검찰도 꼬리 하나 잡았으니까 이제 곧 우리한테도 소환장 날아올 거야.”
“소, 소환장? 그럼 우리 깜빵가는 거야?”
“그건 구속이고 우린 그냥 참고인 소환! 검찰에 가서 몇 시간 조사받고 나오면 돼.”
“아…….”
“근데 소환될 때 절대로 혼자 가지 마. 반드시 변호사랑 동석해. 우리도 우리한텐 불리한 진술 안 할 권리 있거든? 그냥 변호사 혼자 대답하게 시키고, 네들은 입도 뻥끗 마.”
취조실 얘기가 나오자 벌써부터 떠는 여자도 있었다.
한심스러웠지만 박혜선은 고개를 저었다. 변호사 동석시켜서 취조하면 적어도 말실수는 안 하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게 가장 중요해. 지금부턴 각자도생이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무서우면 그냥 혼자 죽으라고. 어차피 공정위에 들킨다 해도 얘네들 이거 다 못 알아내. 상식적으로 이 돈을 다 어떻게 알겠어? 한두 놈 걸린 것도 아닌데. 근데 우리끼리 이름
팔면 결국 다 드러난다.”
“…….”
“한 놈 배신하면 정말 다 죽는 거야. 그러니까 죽을 거면 혼자 죽어.”
***
그렇게 자리를 파하고 나온 뒤.
“네, 변호사님. 저 박혜선이에요. 다름 아니라 그때 드린 말씀 때문에 연락했는데.”
박혜선은 은단을 씹으며 차에 올랐다.
“그러니까 꼭 검찰이 소환 안 해도 갈 수 있다는 거죠? 네, 그 자진출두. 아니 제가 아는 얘기가 좀 있는데 수사 협조하면 정상참작 되는 걸로 알고 있어서요. 해서 말인데
혹시…… 변호사님이 검찰과 의견 조율 좀 해 주실 수 있어요?”
만족스런 대답을 들었는지 그녀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아무렴요. 제가 이 마당에 거짓말하겠어요? 나 아는 얘기 정말 많아요. 그러니까 처벌 수위만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아, 그럼 그럴까요? 제가 아는 자료 변호사님께 먼저
보낼게요.”
전화를 끊은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살아남으려면, 각자도생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