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46
46화
됐지? (1)
“진짜예요? 비밀자료를 가지고 왔어요?”
“그렇다니까요. 저희 예상대로 뒷광고 모임이 여기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 여자가 모든 자료를 다 들고 왔어요.”
준철은 점심도 먹다 말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핵심 연루자자 모든 증거를 가지고 갑자기 자백해 버릴 줄이야.
“저희가 먼저 계산해 봤는데 이러면 비는 액수가 좀 맞아떨어집니다.”
“혹시 5인방과 비슷하거나 더 큰 놈들도 있었습니까?”
“아니요. 그 5인방에 비하면 다 피라미들입니다. 근데 머릿수가 많아 범죄 수익금 합산하면 엇비슷합니다.”
그 명단을 확인한 준철은 미간을 짚었다.
이 여자와 연이 닿는 사람들은 모두 차명계좌로 뒷돈을 받았다.
하지만 스쳐 간 사람들만 30명을 넘었고 그 액수는 몇십부터 몇백까지 다양했다.
“이런 걸 당연히 공짜로 넘기진 않을 것 같고.”
“네. 정상참작 얘기를 꺼냈다는군요.”
“뭐랍니까?”
“그건 책임자랑 직접 만나서 얘기하겠답니다.”
이런 보물을 들고 왔으니, 당연히 시시한 조건을 걸진 않을 터.
준철은 넥타이를 매고 서류를 김 반장에게 넘겼다.
“반장님, 이 명단 정리해서 전 팀장님들한테 전달해 주세요. 저 검찰 갔다 오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
“어떤 사람입니까?”
“웃긴 여자예요 아주. 마침 오늘이 소환장 날리는 날인데 자진 출두해 버리더군요. 변호사 끼고 와서 이거부터 건넸습니다.”
검찰청에 도착하니, 담당 검사도 혀를 내둘렀다.
“저희도 처음엔 놀랐습니다. 이게 맞나 싶어서 몇 번이나 확인도 했고.”
“혹시 더 큰 범죄가 연루된 거 아닙니까? 그걸 숨기기 위해서 미리…….”
“저희도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봤는데 그건 아닌 듯 보입니다. 솔직히 이거보다 더 큰 범죄가 어디 있겠어요? 무슨 뒷광고 감추려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닐 테고.”
“그럼 순순히 다 자백한 건가요?”
“네. 딴 놈들 차명계좌까지 다 깠습니다. 근데 중요한 거 몇 개 물어보니 계속 엄한 대답을 해 대더군요.”
검사는 취조실 문 앞에서 귓속말을 했다.
“결국 정상참작 큰 거 원한다는 뜻일 겁니다. 만만한 여자 아니니 조심하세요.”
검사는 경고를 하고 취조실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도저히 자백범으로 보이지 않는, 짙은 화장에 우아한 치장을 한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공정위?”
말투도 전혀 자백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
“했던 얘기를 얼마나 또 시켜 대는지 원. 벌써 네 번째예요. 선생님은 검사님께 얘기 다 들었죠?”
“확인은 다 했습니다. 근데 자진 출두 하셨다고요?”
“네. 사실 되게 많이 고민했어요. 광고 표기 누락한 실수도 있었고, 더러는 나쁜 짓도 있었고…… 그래도 고심 끝에 정도로 가기로 했어요. 이게 제 진정성 어린 반성이라 생각해
주세요.”
뭘까? 저 언밸런스한 말과 태도는?
진부하지만 눈물 정도는 보일 줄 알았다.
마음에도 없지만 싹싹 비는 척은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검사의 소개대로 입으로만 반성하고 있었다.
“아마 나뿐 아니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이렇게 차명계좌로 빠져나갔을 거예요. 막히는 사람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아는 선에서 다 말씀드리죠.”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희 처벌은 체급이 가장 큰 주요 인물들에게 집중될 겁니다.”
한마디 툭 긁었더니, 그녀의 인상이 순식간에 변했다.
“주요…… 인물?”
“아시다시피 천억대 수사 아닙니까? 광고 규정이 애매했던 측면도 있으니, 적당한 건수는 훈방 조치될 겁니다.”
“그건 제가 납득이 안 되는데요. 아니, 수사에 이렇게 형평성이 없어도 되는 거예요? 100만 원 훔치나 200만 원 훔치나 결국은 같은 도둑 아닌가요?”
준철은 씩 웃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지 말고, 가격 먼저 불러 보세요.”
“예?”
“자백하러 온 게 아니라 거래하러 오셨잖아요. 이 명단 대가로 저희가 뭘 봐드렸으면 좋겠어요?”
당황하기도 잠시.
어차피 밑장 다 본 거, 이렇게 나와 준다면 오히려 환영이다.
눈알을 굴리던 그녀는 고개를 더욱 꼿꼿이 들었다.
“선처해 주세요. 방금 말씀하셨듯 광고 규정이 애매한 부분도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선처요?”
“……저도 봐주세요. 훈방이나 벌금으로 끝내 주시면 저도 사과 영상 올리겠습니다.”
준철은 기가 찼다.
살인 사건 자백해 놓고 집행유예로 끝내 달란 격이다.
“지속성, 고의성, 수익 규모. 우린 이 세 가지 기준으로 처벌 수위 결정할 겁니다. 근데 박혜선 씨를 어떻게 벌금으로 끝내요?”
“그러니까 제가 어려운 자료 들고 온 거 아니겠어요? 이거 다 파 보세요. 우리 업계에선 이거 비일비재했던 일이에요.”
“그중에서도 규모가 유난히 크시던데.”
“남들 다 하고 사니까 나도 해도 되는 건 줄 알았죠.”
준철이 서류를 쓱 내밀었다.
“차명계좌는요? 이것도 남들이 다 해서 한 겁니까?”
“이것도 제가 뭐 알아서 했겠어요? 방송 선배들이 알려 주니까 나도 어깨너머로 배웠지. 난 솔직히 주변에서 하도 해 대니 해도 되는 건 줄 알았어요.”
“말씀하신 것과 달리 차명계좌까지 쓴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있어요. 찾아보면 많아요. 공정위가 못 찾는 거지.”
“그럼 박혜선 씨한테 이 방법을 알려 준 사람은 누굽니까?”
“그건…… 기억이 잘 안 나요.”
“그게 말이 됩니까? 이 명단을 다 들고 온 게 누구신데?”
“…….”
“흥정 길게 할 생각 없습니다. 이거 가져오신 이유 그냥 말씀하세요.”
남에게 배운 여자가 아니다. 남에게 알려 줬던 여자다.
준철이 틈을 주지 않자 그녀의 얼굴도 달라졌다.
“좋아요. 저도 변호사님께 자문 들었어요. 제 혐의가 표시광고법 위반이라 했나? 5억 이하의 과징금이라더군요. 근데 저 과징금 이렇게 크게 못 내요.”
준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반만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5억 이하의 과징금 혹은 2년 이하의 징역입니다.”
“시간 없다고 할 땐 언제고 말씀 길게 끄시네? 선생님, 나도 알 건 다 알아요. 뒷광고 몇 개 받았다고 기소 처리까지 할 건 아니잖아요?”
“……못 할 것도 없는데요.”
“아니 그럼 날 형사고발 하겠다고? 도대체 걸린 놈이 몇 명인데?”
“그래서 지속성, 고의성, 수익 규모 세 가지로 판단한다는 겁니다. 박혜선 씨는 각 항목에서 만점을 받은 사람이에요. 이번 처벌의 기준점이 될 겁니다.”
대화가 또 길어질 것 같자 준철이 바로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우리가 파장을 고려해서 아직 언론에 공개 안 했는데, 이게 식약처 소견입니다. 한번 직접 읽어 보세요.”
박혜선은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식약처 빨간 도장이 다섯 개.
내돈내산 후기로 방송했던 상품들이 모두 식약처 검사에서 탈락해 있었다. 그것도 높은 기준치를 통과 못해서가 아니라 유해성 검출 사유로.
정신없이 서류만 뒤적거리는 그녀를 보고 준철은 마음이 놓였다.
그래, 사람이면 이걸 보고도 저리 당당할 수 없지.
“……유감이네요.”
하지만 뒤이어 나온 그녀의 말은 걸작이었다.
“이 부분은 나도 속았네요. 세상에 이런 제품을 어떻게 광고 요청했을까.”
“이보세요…… 무슨 남일 얘기하듯 하는데, 이거 본인이 광고했습니다.”
“그래서 유감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나도 이런 제품일 줄 몰랐어요.”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김미영은 최소한 눈물이라도 보였는데.
“그 제품 본인이 팔아 줬습니다. 본인 팬들이 이거 보고 샀다고요.”
“핸드폰 광고했는데, 핸드폰이 터지면. 모델 잘못인가요?”
“…….”
“도의적으로 정말 유감이에요. 근데…… 엄밀히 말해 여기까진 내 책임 아니죠. 솔직히 내가 팬들한테 사라고 등 떠민 건 아니잖아요.”
그녀는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좋아요, 그럼 기소하세요. 대신 저도 수사에 협조한 게 있으니 과징금이라도 협상하시죠.”
“협상?”
“1억. 1억은 제가 기꺼이 낼게요. 사과 영상 게시하고, 관련 영상 모두 다 내리겠습니다.”
“본인이 챙긴 대가는 10억이 넘지 않나요?”
“그걸 다 고려해서 낼 수 있는 게 1억이에요. 과징금은 이쯤에서 마무리해 주세요. 아니면 저도 형평성 문제 계속 제기할 겁니다.”
그제야 준철은 그녀가 이해되었다.
이 여자는 자백을 하러 온 게 아니다. 물귀신 작전을 쓰러 온 것이다.
연루된 놈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스포트라이트가 분산되겠지. 팬들의 관심을 돌리는 것은 물론, 처벌 협상도 할 수 있는 일타쌍피다.
거기까지 깨달으니 왜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어차피 밑천 다 드러났겠다, 이젠 방송 복귀도 요원하겠다. 그래서 이걸 퇴직금으로 챙겨 달라?”
“……그래요 그냥 퇴직금이라고 합시다. 나도 비빌 언덕은 있어야죠.”
“그럼 과징금 더 내야겠는데요. 횡령·배임으로 쫓겨나는 놈치곤 너무 두둑합니다.”
“제가 드린 자료가 그 값어치는 할 겁니다.”
준철은 이 무의미한 대화를 그만하기로 했다.
잃을 게 없는 놈 상대해 봤자 더 추한 꼴만 볼 것이다.
“그럴 거면 이 명단 그냥 가져가세요. 못 본 셈치고 우리가 밝혀내겠습니다.”
“아니 지금…….”
“단가가 맞아야 서로 거래를 하죠. 우리가 확인한 뒷돈만 10억인데, 어떻게 과징금 1억에 끝냅니까.”
“그럼 뭐 전액 몰수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최소 절반은 부과해야죠. 적당히 넘어갈 요량이었으면 이렇게 시끄럽게 수사도 안 했습니다.”
그리 말하며 일어나자 갑자기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엄살 부려 주니까 진짠 줄 아나 보네. 퇴직금이라.”
준철이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선생님. 나랑 내기할래요?”
“더 할 말이 남았습니까?”
“세 달 아니 한 두 달? 나 자숙 겸 휴가 즐기다 돌아오면 금세 또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그때 되면? 이 사람들 아무도 이거 기억 못 해. 왜 자꾸 엄한 데 힘을 쓰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왔다.
“괜히 국민들 관심 쏠리니까 뭐라도 해야 될 것 같고…… 근데 다 처벌하자니 감당은 안 되고…… 용쓰지 마. 막말로 이 바닥 키운 건 당신들이야. 본보기로 몇 명 처벌한다고 욕 안
먹겠어?”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란 말도, 시장이 너무 커져서 다 처벌할 수 없을 거란 말도.
“과징금 협상은 나중에 더 해 봅시다. 자료는 놓고 가 드릴게요. 제발 나한테만 이러지 말고 다른 사람도 똑같이 다뤄 주세요. 난 구독자가 많아서 남들보다 광고 제의가 더 많았을
뿐이에요.”
그리 말하며 그녀가 취조실을 먼저 떠났다.
대화 첫 마디부터 느꼈지만 이 여자는 공정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검찰 취조실을 동네 카페로 생각하는 여자다.
‘기분 더럽네. 처벌 수위 약할 거라는 거 이미 알고 있나.’
딱 하나 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웹튜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