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5
5화
이준철 (2)
준철의 물음에 다들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예?”
“50주짜리 진단서, 사비로 낸 병원비, 담당자랑 얘기 나눴던 모든 기록이 다 있는데. 이걸 왜 여기서 덮어요?”
“그야 당사자가 민원을 취하했으니…….”
“민원과 별개로 검찰은 수사 들어가야죠. 갑질 사건이 아니라 형사사건 아닙니까?”
갑질은 친고죄지만 산업재해 은폐는 엄연한 형사사건이다.
지금은 피해자가 제시한 완벽한 증거들까지 있다.
살인 사건이라 치면 시체 발견되고, 범행 도구 나왔고, 용의자까지 나온 시점이다. 근데 이걸 왜?
“아무리 형사사건이라 해도 피해자가 없어지면 사실상 수사 진행 어렵습니다. 그리고 제보자가 낸 진단서도 조작됐을 확률이 크고요.”
“허위 진단서는 사문서위조입니다. 제보자가 자충수를 두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진단서 자체가 사실이라 해도 거짓말할 건수는 많죠. 본인 부주의로 사고를 당했거나, 아니면 정말 산재 처리가 안 되는 방식으로 다쳤거나.”
“출근길에 당한 교통사고도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게 현 법원 판례예요. 현장직 노동자가 산재 처리 안 되는 방식으로 다치는 게 더 이상할 겁니다.”
준철이 뜻을 꺾지 않자 김기남 반장이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팀장님. 무슨 말씀이 하고 싶은 겁니까?”
“이 사건 더 파 보죠. 조사 시작하니까 원청에서 부랴부랴 입 막았겠네요. 제보자는 합의금 받고 취하했을 테고.”
“어찌 됐건 그럼 끝 아닙니까? 결국 양자가 합의했단 건데.”
“그러니 우린 다른 사건을 더 파야죠. 전치 50주짜리 사고를 덮을 정도면, 이놈들 5주짜리 진단서는 아예 취급도 안 했다는 겁니다.”
“설마 지금 여죄를 캐겠단 말씀이십니까?”
“네. 다른 하청 근로자 중에서도 분명 피해자가 더 있을 겁니다.”
준철의 돌발 발언에 사무실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두 달간 식물인간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이 무슨 말인가? 대성중공업이면 하청사만 수십 곳이다. 그걸 다 뒤엎겠다는 건가?
사뭇 달라진 준철의 분위기에도 적응할 수 없었다.
평소 이준철 팀장은 말수가 적고 어떤 면에 있어선 소극적이기까지 했다. 실무 경험이 얼마 되지 않아 늘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묻곤 했다.
하지만 죽다 살아온 지금.
말투엔 자신감이 넘치고 반대 의견에도 쉽사리 뜻을 꺾지 않는다. 단순한 패기가 아니라, 판례까지 인용하며 김 반장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하지만 팀장님……. 이미 과장님께서 종결하라 했고, 팀장님이 병원에 계시는 동안 시일도 많이 늦어졌습니다.”
“반장님께선 덮고 싶으세요?”
“제보자가 연락 두절된 지 오래입니다. 그런 마당에 판을 더 키우자 말씀하시니 우려스럽습니다.”
“맞습니다, 팀장님. 제보자도 중간에 민원 취하했는데, 다른 하청사라고 다르겠어요?”
“설사 진짜 산업재해 은폐가 있었다 해도 하청들은 절대 진술 안 할 겁니다.”
원청을 처벌해 주면 하청들이 환영할까?
애석하게도 현실은 정반대다.
조사가 시작되면 갑질당하던 하청들이 되레 원청을 변호해 준다. 부당한 대우보다 더 두려운 건 바로 일감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하청들이 부당한 대우와 갑질을 참았던 건 조사 당국에 대한 편견, 아니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대충 수사하다 끝날 거라 생각하니까 진술 못 하는 거죠. 만약 형사 입건하고 전면 조사까지 들어간다면 하청들 하고 싶은 말 엄청날 겁니다.”
관건은 분위기 조성이다.
지금은 대성중공업이라는 엄석대가 있지만, 이보다 더 큰 존재가 등장하면 밑에 있던 하청들이 모두 엄석대를 고발할 것이다.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준철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한명 그룹에 있을 때도 종종 하청들의 반란이 있곤 했다.
노동자도 한 사람이면 만만하지만, 그들이 노조가 되면 무섭듯. 하청사가 단체 행동을 시작하면 여간 까다로웠던 게 아니었다.
“신뢰만 확보하면 됩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지. 고용부와 근로복지공단에까지 고발하면 우리 의지는 확인할 겁니다.”
노동고용부와 근로복지공단에 고발? 설마 행정명령까지?
당황하던 반원들 얼굴엔 이젠 핏기마저 가셨다.
“팀장님. 굳이 이렇게 할 이유가…….”
“우리가 여기서 덮으면, 전치 50주까진 덮을 수 있겠구나 싶을 겁니다. 그럼 다른 하청사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
“어지간히 다쳐선 아예 산재 청구도 안 할 겁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전치 50주가 기준점이 되는 거예요.”
이상 증상에서 본 놈들의 대화가 확신을 주었다.
이들은 사람을 불구로 만들어 놓고도 책임을 끝까지 피했다. 3천이란 돈이 아까워 이마저도 근로자의 과실을 철두철미하게 따졌다.
이건 그깟 3천만 원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선례를 남겨 두면 다른 하청사가 다 보상을 요구하기에 미리 진압을 해 버린 것이다.
쥐 죽은 듯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 준철이 서류를 들고 말했다.
“과장님께 보고드리는 건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
“……해서 검찰에 고발은 취하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장황한 설명은 됐고. 그러니까 지금 이 수사 계속하겠다는 거지?”
해당 내용을 과장님께 보고하자 날카로운 반응이 돌아왔다.
“아니지 이거. 고용노동부랑 근로공단에까지 고발을 넣었네?”
고용노동부는 ‘작업 중지 명령’까지 내릴 수 있는 곳.
사건을 덮으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젊은 놈이 갑자기 판을 키워서 돌아왔다.
머리를 크게 다친 게 아니라, 아예 정신이 돌아 버린 것 같다.
“이유가 뭐야?”
“이 정도 액션은 취해야 대성중공업이 더 이상 은폐를 시도하지 않을 겁니다.”
“은폐?”
“예. 여러 정황을 살펴봤는데, 산재 사고 은폐한 건 사실 같습니다. 전치 50주짜리 사고를 덮을 정도면 그간 덮어 왔던 사건은 더 많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오 과장이 긴 한숨을 쉰다.
“단순한 추측 가지고 이거 너무 과잉 대응 아니야?”
“제보자가 민원 취하한 걸 봐선 외압이 상당하단 겁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다른 하청 직원들이 수사에 협조해 줄 겁니다.”
“협조? 우리가 소극적으로 나가면 다들 입 다문다 이건가?”
“예. 이번 민원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어차피 고발해 봤자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된다. 돈 몇 푼이라도 줄 때 합의하자. 이런 게 복합적으로 작용해 저희가 수사 실패한 것
같습니다.”
물러섬 없는 모습에 오 과장도 예의 진중한 표정이 되었다.
감정에 치우친 과잉 수사가 아니라, 근거가 확실한 정석 수사다. 1차 수사가 왜 실패했는지까지 점검해 그에 대한 대안책을 가져왔다.
“이 팀장…… 너 진짜 자신 있냐? 행정명령 떨어졌다가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나면 이거 시말서론 안 돼. 과잉 수사로 우리가 대성한테 당할 수도 있어.”
“과장님. 그냥 사건 자체만 봐 주십쇼. 진단서, 병원비 내역, 대화 기록까지 있습니다. 산재 은폐가 이거 하나였다는 게 더 이상한 걸 겁니다.”
오 과장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준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럼 이거 수사 어떻게 진행하게?”
“일단은 제보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어렵다는 거 아니야. 대성중공업에서 하청 받아 가는 기업이 수십 개는 될 텐데, 여기 다 돌 거야?”
“한 서너 곳 치면 금방 누군지 압니다.”
“뭐?”
“하청사들 정보 빠릅니다. 원청에서 이런 사건 터졌는데, 지금까지 다른 하청사가 모를 리 없어요. 서너 곳 돌면 대강 어느 하청사에 어느 직원이었는지까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청사.
이들은 원청 담당자에게 달마다 술을 사고, 때론 회사 카드를 주고 사적인 회식비까지 챙겨 주는 사람들이다.
속된 말로 담당자가 마누라랑 언제 싸웠는지까지 알 만큼 원청의 동태에 예민하다.
지금 이 사고가 어디서 터졌는지 파악하는 건 시간문제.
준철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오 과장은 눈빛이 변했다.
뭔가 이상하다.
젊은 사무관들이 대개 그렇듯 이들은 한 3년간은 예스맨으로 산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거스르는 경우가 없고, 같은 과 반장이나 조사관들이 내는 의견에도 쉽게 흔들리다.
하지만 오늘 본 준철은 자신감이 넘쳤고, 자신의 의견에 근거 또한 풍부했다. 갑자기 풍겨 오는 이 노련한 통찰력은 말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과장님, 재가해 주십쇼. 이 사건 저희가 시간 싸움에서 졌지, 범죄 행위란 것 자체는 변함없습니다.”
“흠…….”
“최대한 빨리 제보자 신원 확보하고, 다른 유사 사례 없었는지 파악하겠습니다. 만약 산재 은폐 혐의가 더 있었다면 이 피해자들을 규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힘이 됩니다.”
만약 대성중공업의 산재 은폐가 더 있었다면?
신문에 대서특필될 뉴스감이다.
한동안 고민하던 오 과장의 대답이 떨어졌다.
“좋아. 그럼 해 봐.”
“감사합니다.”
“근데 이 팀장. 안 본 사이에 좀 딴사람이 된 것 같아?”
***
“박 조사관님. 검찰에 넘긴 고발장 다시 작성해 주세요. 이거 너무 젠틀해요.”
“영장 때문에 그러시죠?”
“네. 불구속 수사로 절대 못 잡습니다.”
“알겠습니다. 증거 인멸의 우려가 크다고 팍팍 어필하죠.”
“김 반장님은 오늘 내로 노동부랑 공단에 고발 넣어 주세요.”
“근데 팀장님. 작업 중지 명령이 떨어지려면 사망 사건 같은 사유가 발생해야 합니다만.”
“현장 근로자가 전치 50주의 상해를 입을 정도면, 안전 수칙도 개판이었다는 겁니다. 영장 나오면 이거 다 증거 모을 수 있으니, 일단 고발부터 해 주세요.”
과장님의 허락과 함께 수사가 재개됐다.
준철은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에 추가로 고발을 넣었다. 이 두 곳은 검찰보다 더 무서운 행정명령권을 가진 기관이다. 재판은 3심까지 최소 2년 이상을 끌지만 행정명령은 두 달로도
끝난다.
그야말로 기업에겐 염라대왕 같은 곳. 이 모두 김성균으로 살았을 때 터득한 지혜(?)다.
“팀장님. 고발 작업은 다 끝났습니다. 이젠 현장으로 나가도 될 것 같은데요.”
“그래요? 반장님 그때 말씀드린 서류는?”
“예. 이게 대성중공업에서 일감 받아 가는 하청사 순위입니다. 다행히도 소재지가 다 울산이더군요.”
“좋습니다. 그럼 1등 하청사부터 돌죠.”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넣은 후, 공정위 화살은 대성중공업의 전 하청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