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52
52화
올해의 공정인상 (3)
공정위의 시무식은 올해의 공정인상으로 시작한다.
이는 곧 새해 첫날부터 모두의 주목을 받고 시작한다는 얘기.
오늘을 위해 특별히 장만한 새 양복을 갖춰 입었지만 막상 도착하니 이처럼 초라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야……?’
전국에 있는 공정위 간부(과장급)들이 다 모여 있지 않겠나.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수상식이 아니다. 공정위원장님이 수상자를 격려하고 새해 목표를 밝히는 자리기도 하다.
어찌 보면 여기에 참석할 수 있는 것 또한 특권.
“느껴지냐, 이 팀장?”
“……예.”
“소감이 어때?”
“귀한 곳에 누추한 사람이 와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즐겨. 살면서 국장, 처장, 위원장들한테 박수받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 자부심을 가지라고.”
오 과장은 이미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하긴 공정인상 제정 이래 종합국 첫 수상자라는데, 꼭 자식 결혼시키는 부모 마음이 들겠지.
“어, 오 과장. 얘기 들었어. 이번 상은 종합감시국에서 수상한다며?”
“예. 그렇게 됐습니다.”
“고생했네. 나도 서울에 있을 때 종합국 도움 많이 받았는데, 자네가 팀장들 잘 키웠어.”
“부끄럽습니다.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오 과장이 하객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으며 떠나갈 때, 한유미 과장이 슬쩍 다가왔다.
“이 팀장.”
이런 게 엄마 리더십일까?
부드럽게 이름만 불러 줬을 뿐인데, 긴장이 한층 가셨다.
“답지 않게 뭘 긴장하고 있어? 옷도 예쁜 거 입었구만.”
“아직도 제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사는 과장님이 다 지시하셨는데.”
“그런 내가 추천한 사람이면 자격은 충분한 거 아니야?”
그녀는 준철의 넥타이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정 긴장되면 내가 경험자로서 팁 하나 줄까?”
“예.”
“저기 보이지 앞줄? 저 자리가 위원장님 자리야. 2열까지는 국장님들이 다 앉아 있을 거고.”
이게 긴장을 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원.
“시작 전에 미리 가서 인사 한번 드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그럼 마음이 편하더라.”
“……제가 불쑥 찾아가도 되는 걸까요?”
“원래 시상식 전에 위원장님이 따로 한번 부르셔. 격려 차원에서.”
“아, 인사 먼저 드리는 게 낫군요.”
“응. 그때 가서 방금 한 말 또 해 줘. 한유미 과장이 수사 지시 잘해서 이 상 타게 됐다고.”
“너무하시네요, 과장님.”
가벼운 농담으로 부담을 덜고 있을 때, 마이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공정위 가족 여러분. 인사과 박수만입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지나고, 어느덧 새해가 밝았습니다. 시무식에 앞서 공정인상 수상식이 있을 예정이니, 모두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출입구에서 엄청난 포스의 사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준철은 침을 꼴깍 삼켰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누가 봐도 공정위원장이었다.
***
한 과장이 준 경험자 팁은 소용이 없었다.
위원장님은 국장들과 담소 나누기 바빴고, 도무지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시상식 전에 따로 부른다는 것도 이번엔 예외인가 보다.
-다음은 올해의 공정인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올해의 공정인상은, 종합감시국의 이준철 사무관.
올해의 공정인은 사무처장의 개회사 뒤에 바로 발표되었다.
연단에 오른 준철은 긴장한 얼굴로 상패를 받았다.
사뭇 경직된 얼굴로 상패를 받았지만, 위원장님은 사무적인 축하 인사만 보냈다.
“고생했어요. 이준철 사무관. 내년에도 꼭 분발해 줘요.”
흐뭇하게 웃는 것으로 인사는 끝.
‘막상 또 안 불러 주니까 섭섭하긴 하네.’
뭐랄까. 참으로 묘하다고 할까?
한명 그룹에서 김성균은 본부장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자리를 가질 수 없었다. 늘 부회장의 그림자 수행원이었으니까.
하청 쥐어짜고, 특허 뺏어 오고, 구조조정 단행하며 악역을 도맡았던 인물이었다. 회사가 커 갈수록 공공의 적이 되었지 양지에서 모두의 축하를 받은 적은 없었다.
‘…….’
그리 생각하니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아닌 척 다 하면서도 내심 누가 축하해 주길 기대하고 있었다니.
-안녕하십니까. 공정거래위원회 가족 여러분. 박기철 위원장입니다.
소심하게 돌아와 착석하자 공정위원장이 말을 이었다.
-제 마지막 신년 인사가 되겠군요. 퇴임을 앞둬서인지 감회가 더 새롭습니다. 올해의 공정인상은 부임한 지 2년이 채 안 된 사무관이 수상했군요. 이렇게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무관을
보니 주책스럽게 옛 생각이 많이 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은 별로 그렇게 감상에 젖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 있어 예년의 성과는 자랑스럽습니다. 지난 우리 공정위는 재작년보다 20%가 넘는 사건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양적 성장과 달리 그 결과표는 참담합니다. 백여 건
가까운 행정소송과 패소율 증가.
-특히나 특허 갈취, 일감 몰아주기 등 원청의 지능적 갑질에 대해선 우리의 성적표가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지난 5년간 하청의 특허 탈취 문제에 있어선 단 한 건도 처벌하지
못했으니까요.
그쯤 되자 신년사 분위기가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우리 공정위가 과연 소임을 다하고 있었나? 이건 냉정하게 되짚어 봐야겠지요.
눈에 보이는 공정위의 성과는 늘었다. 갑질을 밝히는 건 그나마 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특허 분쟁, 일감 몰아주기 같은 지능적 갑질에 대해선 여전히 실적이 저조했다.
공정위원장은 희망적인 언사로 현실을 호도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설파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우리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제 옛사람으로 곧 물러나니, 이 자리의 주인공들은 여러분입니다. 양적으로 성장한 만큼 질적으로도 더 성장하여 더 나은 공정위를
만들어 주십시오. 여러분께 이 점을 꼭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신년사가 끝날 때 준철의 눈에 국장들의 침침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제야 준철은 왜 오늘 위원장님이 바쁘셨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담소 나눈 게 아니라 쪼인트 까고 계셨네…….’
***
“이야- 올해의 공정인!”
“왜 그러세요. 부끄럽게.”
“뭘 쑥스러워하세요. 충분히 호들갑 떨 만하지! 분위기 어땠습니까?”
“국장님들한테 눈도장 확실히 찍으셨죠?”
사무실로 돌아오니 반원들이 금세 몰려들었다.
자리에 참석 못 한 만큼 그 누구보다 시무식 분위기가 궁금한 눈치다.
한데 그 분위기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시무식부터 된통 까였다고 전할 수는 없고.
“위원장님께선 뭐라십니까?”
“저희 종합팀이 고생 많았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맡았던 사건들 다 언급해 주시면서.”
“정말요?”
준철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말씀은 안 했지만, 아마도 그리 생각하고 계셨겠지.
“이야- 이거 대박인데. 내가 살다 살다 위원장님한테 칭찬을 들어 보고.”
“종합감시국에서 올해의 공정인 탄 것도 처음이잖아.”
“솔직히 이번 년에 우리보다 성과 좋은 데가 어디 있어요. 아까 보니까 우리 과장님 입이 귀에 걸렸더만.”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김 반장도 흐뭇하게 웃더니 준철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좋으시겠습니다. 팀장님. 공정인상 수상자는 해외 연수에서 무조건 우선 선발인데.”
“좋은 건가요, 해외 연수?”
“그걸 말이라고! 비즈니스 타고 FTC(美 공정위) 다녀옵니다. 우리 같은 공무원들이 어디 글로벌 인맥 만들기 쉽나요?”
“아…….”
“고글, 에플 같은 다국적 기업 털 때는 무조건 FTC랑 공조해야 해요. 6월에 연수니까 무조건 신청하세요.”
하긴 기업에서도 해외연수 보내 주는 게 출세 루트인데.
공무원 해외 연수는 사실상 국비유학생이겠지.
다녀오는 것 자체로도 대단한 커리어다. 물론 당사자인 준철은 딱히 출세 욕심이 없었지만.
“부상은 얼마나 됩니까?”
“50만 원이요.”
“아이고- 그건 좀 짜다. 500은 줘야 뭔 상 탄 기분이라도 나지.”
“감지덕지죠. 오늘 점심은 제가 한턱 내겠습니다. 다들 모이시죠.”
“오- 연초 파티?”
“대표로 받았으니, 여기 써야죠.”
그렇게 반원들과 식사 약속이 잡혔다.
반원들은 대충 서류를 정리하고 점심만 기다렸다.
확실히 연초긴 한가 보다.
물밀듯이 쏟아지는 고발이나 제보가 없어 간단한 서류 작업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
하지만 이런 단조로운 일상을 한순간에 깨는 메가폰 소리가 들렸다.
-중소기업 다 죽이는 대기업들 특허 도용!
-공정위는 대웅조선 특허 도용 조사하라!
-기술 개발은 하청이 하고, 결실은 원청이 갖는 나라!
시무식 첫날부터 공정위 바깥에서 시위가 펼쳐진 것이다.
바깥에선 한 중년인이 목에 피켓을 걸고 일인 시위를 펼치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려 중앙 로비에 모인 반원들도 그 시위를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아, 반장님. 저 핸드폰을 놓고 왔는데.”
“아이고- 정신하고는.”
“금방 다녀올게요.”
“얼른 다녀와, 5분 더 있다간 귀청 떨어지겠다.”
박 조사관이 후다닥 달려가자 메가폰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중소기업 재산권 보장하라! 대웅조선의 지능적 특허 탈취 조사하라!
중년 사내 뒤에는 시뻘건 글씨로 도배된 현수막들이 보였다.
봉고차까지 세 대나 동원해 자기 현수막들을 다 걸어 놨다.
그 모습이 준철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뭘까요 저건?”
“그러게 말입니다. 보통 연말 연초에는 저런 시위 잘 안 여는데.”
“참 매너도 없다. 어떻게 시무식 첫날부터.”
반원들은 일인 시위자를 보며 혀를 찼다.
“원청에서 자기 특허 가져갔단 얘긴가요?”
“네. 뭐 억울한 일이 있으니 저기서 시위하겠죠.”
김 반장이 혀를 끌끌 찼다.
“근데 저렇게 무식하게 시위하는 놈들은 대개 나사 빠진 놈들입니다.”
“나사요?”
“절차적으로 뭐 좀 안 되니까 저렇게 와서 시위하겠죠. 자기들은 특허 도용됐다고 우기는데 막상 뭐 별거 없거나. 아님 자기 주장이 억지거나.”
하긴 머리를 바싹 깎고 시뻘건 이마 띠를 두른 그가 정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만약 진짜로 문제가 있었으면 국민신문고 통해서 다 전달됐을 겁니다. 안 될 거 같으니까 조사해 달라고 생떼 부리는 거지.”
“그렇군요.”
“신경 쓰지 마세요. 곧 제풀에 지쳐 그만둘 겁니다.”
그걸 듣는 준철은 속이 복잡해졌다.
하청들의 특허 도용. 과거에 자신이 정말 얼마나 많이 했던 도둑질인가.
입증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어 한 번도 걸리지 않았던 도둑질이었다. 들켜도 누가 더 센 변호사 쓰느냐 싸움이라 한 번도 진 적 없었다.
“아이고- 가져왔습니다. 얼른 가시죠.”
때마침 박 조사관이 왔다.
“팀장님. 연초부터 저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좋은 일만 보죠.”
“네, 알겠습니다.”
“근데 기왕 쏘시는 거 점심부터 갈비는 좀 그렇나?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