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53
53화
특허 도둑 (1)
공정위의 신년 분위기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그놈들 진짜 제정신인가? 100억짜리 담합에 과징금 8억이 뭐가 비싸다고 행정소송이야?! 아니,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으면 어떡해. 증거 싸그리 긁어모아서 법원에 던져. 재판까지
가면 우리도 과징금 따블로 올려야지!”
신년부터 화가 잔뜩 난 사람들.
작년 사건이 아직 안 끝난 사람들이다.
기업에서 과징금에 불복해 버리면 별수가 없다. 법정에서 10원 한 장 더 내느냐 마느냐 싸우는 수밖에.
“카르텔국은 1월이 아니라 13월인가 보네요.”
“그러게. 아무리 그래도 통화는 엘리베이터 바깥에서 하지.”
“반장님은 신년에 금연 한번 해 보는 거 어떠세요.”
“이 좋은 걸 왜?”
“건강 생각할 때도 되셨잖아요.”
“박 조사관이 술 끊으면 나도 끊고.”
“그 좋은 걸 왜 끊어요.”
반면에 천하태평 농담 따먹기로 신년을 여는 부류도 있다.
발에 불나도록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종합감시팀은 여유로운 대화를 나눴다.
단순한 여유를 넘어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갔단 표현이 더 알맞다.
올해의 공정인상.
명실상부 공정위가 인정한 넘버 원 부처 아닌가?
상은 팀장이 대표해 받았지만 고과 점수는 반원들 모두에게 적용된다. 두 달 남은 설 상여금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바였다.
“어이구- 팀장님. 일찍 오셨네요.”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쇼.”
“팀장님도 복 많이 받으세요.”
“저희 오늘 뭐 오더 떨어진 거 있습니까?”
“저기 뭐 제보가 들어 온 것 같긴 한데, 큰 건 없어 보입니다.”
“그럼 오늘은 서류 검토나 하죠.”
연초엔 민감한 사건이 별로 들어오지 않기에 반원들은 더욱 여유로웠다.
사실은 제보 검토가 종합팀의 본업이었다.
국민신문고에 접수된 사건을 읽고 수사할지 말지 판단하는 일. 여기서 디벨롭시킬 만한 사건은 전문 부처에 넘기면 된다.
오랜만에 본업으로 복귀한 반원들은 한가롭게 서류만 팠다.
‘갑질 제보가 진짜로 많긴 하네.’
원청이 미수금 안 준다는 제보부터, 특허를 침해했단 제보까지.
준철은 끝없이 이어지는 제보에서 문득 공정위원장의 신년사가 떠올랐다.
공정위의 양적 수사가 많이 발전했지만, 질적 수사는 아직 제자리걸음이라 했던가? 제보들만 쓱 봐도 대기업들의 지능적 갑질이 많이 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반장님. 이건 가격 담합 같은데 카르텔국으로 넘겨주세요.”
“네.”
“그리고 이건 일감 몰아주기 같은데 기업집단국 넘겨주세요.”
“알겠습니다.”
그중 민감해 보이는 사건 두 개를 골라 전문 부처에게 넘겼다.
솔직히 이날 하루 중 가장 치열하게 논쟁했던 건 점심 메뉴였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떡국으로 결정되었고, 오후 일과에도 평화로운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공정위는 대웅조선의 특허 도용 반드시 조사하라!
-중소기업 생명권, 재산권 보장하라!
딱 하나, 저 시끄러운 소음만 아니었다면 더 좋을걸.
***
“아니 이렇게 멋대로 들어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놔요! 내가 어디 뭐 못 올 데라도 왔어요?”
“자꾸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이미 신고는 했잖아! 놔! 담당자 좀 만나 봅시다.”
연일 시위를 벌이던 중년인은 기어코 프런트 데스크에 입성했다.
경비원들이 육탄전을 펼치면 방어했지만, 드러누워 버리는 상대에겐 속수무책이었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우리도 절차라는 게 있습니다.”
“그 절차 핑계 대면서 타 부처에 떠넘기려고?”
“아니, 이 양반이 진짜…….”
“내가 작년까지 중기부 앞에서 시위하던 놈이요. 근데 그쪽도 자기 일 아니래.”
그는 경비원들의 힘을 뿌리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중기부에서 내 사건 공정위에 넘겼답디다. 그럼 나도 대답을 좀 들어 봐야 할 게 아니요. 나랑 얘기 좀 합시다!”
“박 계장님. 안 되겠습니다. 끌어내고 경찰 부르죠.”
생즉사 사즉생이란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모양이다.
피켓을 든 사내가 막무가내로 달려드니, 다섯 명의 장정들도 쩔쩔맸다. 잃을 게 없는 놈 상대했다가, 공정위가 사람 쳤다는 뉴스가 나오면 안 되니까.
고군분투 끝에 경비들은 그의 팔다리를 하나씩 붙잡았다.
‘大’자로 뻗은 그는 끌려가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공정위는 하청의 억울한 얘기 들으라! 대웅조선 반드시 수사하라!”
로비에서 메가폰으로 소리를 질러 대니, 골이 다 지끈거릴 지경.
그 처절한 광경을 목도하며 종합팀이 혀를 찼다.
“팀장님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백반 시켜야겠는데요. 나갔다가 괜히 봉변당하겠습니다.”
“배달부라고 저길 뚫을 것 같진 않은데…….”
“음식 올 때쯤이면 잠잠하겠죠.”
-대웅조선이 우리 특허 도용했다 이 말입니다! 중기부에서 공정위에게 사건 넘겼다 하는데 왜 대답이 없습니까! 대기업이 이렇게 하청 업체 특허 가져다 써도 되는 겁니까?!
“어휴. 저 목소리 들어 보십쇼. 저길 나갔다간 괜히 한 대 얻어맞겠습니다.”
준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백반 시키죠.”
출입구에 몰린 전 직원이 발길을 돌렸다. 듣기엔 불편했지만, 한편으론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특허 도용.
갑질 사건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문제 아닌가?
특허 분쟁은 노래 표절과 똑같다. 제3자가 보기엔 아무리 비슷해 보여도 막상 법적으로 문제 삼으려면 애매해진다.
대기업들도 이 점을 악용해, 딱 법적으로 안 걸릴 수준에서 특허를 차용해 가니. 당사자에게도 무척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 도와주는 건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
경비원들에게 제지를 당하고 난 다음 날.
여의도가 가라앉을 것 같은 메가폰 소리는 없어졌지만, 공정위 사무소가 귀곡산장으로 변해 버렸다.
그는 마이크 대신 마스크를 썼고, 목에는 죽음을 암시하는 팻말을 걸고 있었다.
차라리 시위 소리가 그리워질 지경.
“아니, 며칠 참아 줬으면 됐지. 저건 진짜 너무하네!”
“저 사람 눈 돌아간 거 보세요. 진짜 경을 칠 것 같지 않아요?”
공정위 직원들의 불안함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의 광기는 이미 새해 첫날부터 확인하지 않았나.
“대체 경찰들은 뭐 하는 거야. 저거 집시법 위반이든 뭐든 걸릴 것 같은데.”
반원들이 불평을 늘어놓을 때, 김 반장이 탁자를 툭툭 쳤다.
“별일 안 나니까 자기 일들이나 해. 가만 보니 우리 새해라고 너무 빠져 있다? 제보 서류 검토 다 안 할 거야?”
“네…….”
“다들 전산실 가서 자료 받아 와. 팀장님 이건 이번 주 고발 자료입니다.”
반원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김 반장이 서류 뭉텅이를 올렸다.
“어째 이번 주부터 양이 좀 많아진 것 같네요.”
“네. 국민신문고에 쌓여 있는 제보가 뭉텅이랍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가요?”
“연초 지나가니 슬슬 쏟아지는군요. 뭐 크게 신경 쓸 만한 사건은 없었습니다. 다만…….”
김 반장이 말을 잇지 못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저희 제보 중 첫 자료 봐주십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기업 이름인데 이거 설마?
“네. 단식투쟁하는 저 양반 회사 같습니다. 저희 쪽에서 정식으로 접수 신청됐어요.”
한양테크 사장 최기동.
현재 공정위 앞에서 열렬한 시위를 펼치고 있는 인물.
그런 그의 서류가 중소기업벤처부를 걸쳐 현재 공정위로 넘어온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거 자료 출처가 중기부로 나오는데, 뭡니까? 조사 한 번 한 겁니까?”
“네. 중기부가 분쟁 조정해 봤다는군요. 근데 저 하청 사장이 걷어찼어요. 중기부는 우리한테 짬 때려 버렸고.”
“음…… 저 사람 여기서만 저러는 게 아닌가 보네요?”
“중기부도 연말 내내 시달렸답니다.”
“그렇다고 우리한테 넘기는 건 좀…….”
“뭐 우리도 적당히 만지다 특허청 같은 데 보내야죠. 솔직히 특허 분쟁은 민사로 해결해야지 공기관이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쯧쯧.
능숙하다 했더니. 역시 상습범이었구나.
이런 문제는 적당히 털어 내는 게 관건이다.
준철은 씁쓸하게 웃으며 서류를 뒤적거렸다. 대기업과 민사로 싸워 봤자 지는 걸 빤히 아니 저 사람이 저렇게 공기관 앞에서 생떼를 부리는 거다.
하지만 괘씸함과는 별개로 어깨가 무거웠다.
조사 못 한다라는 말을 직접 해 줘야 할 사람이 이젠 준철이 되어 버렸다.
‘…….’
그냥 타 부처 이관 도장을 찍어 버리면 끝나겠지만.
쉽사리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준철은 몇 번 고심하다 결국 서류를 살폈다.
‘피스톤 특허를 가져갔다는 건가?’
한양테크.
대웅조선의 하청 업체로 디젤엔진 부품을 납품하는 곳.
규모 100억에 아직 상장도 안 된 작은 기업이었지만, 한양테크의 강점은 바로 특허에 있었다. 배 건조의 핵심 부품인 [피스톤] 특허를 보유하고 있지 않나.
신체에 비유하면 경추 뼈 한 조각 들고 있는 셈인데, 이게 머리와 몸통을 연결해 주는 핵심 중의 핵심 부품이었다.
-펄럭.
시작은 좋았다.
이들이 개발한 피스톤 부품은 독일 3사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은 기술력이었고, 대웅조선도 그 값어치를 알고 단가를 후하게 쳐줬다.
-펄럭.
하지만 거래 10년 차에 접어드니 삐걱대기 시작했다.
‘제품에 하자가 발생할 경우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필요하다’며 작업표준서, 공정 순서, 공정관리 방안 등을 포함한 기술 자료를 요구했다.
말이 장황해서 그렇지 결국 특허를 열람했단 소리다.
-펄럭.
재앙은 이미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특허를 열람시켜 주니 갑자기 경쟁사가 등장했고, 대웅조선은 생산 시설 이원화에 들어갔다.
경쟁사가 등장하자 대웅조선은 기다렸다는 듯 납품 단가 인하를 요구했고, 그도 성에 안 찼는지 마지막엔 거래처를 바꿔 버렸다.
-펄럭.
가진 게 특허 하나밖에 없는 기업이 거래가 끊기면 어찌 되겠는가.
한양테크는 거래가 끊긴 후 매출이 80% 급감했고, 규모 100억대 회사가 하루아침에 부도 수순을 밟았다.
그렇게 최종 부도 처리된 게 2년 전.
악다구니를 썼던 남자는 이 싸움을 장장 2년이나 해 왔던 것이다.
-툭.
그 지난 과정을 모두 다 검토했을 때.
준철은 또 한동안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처음 보는 서류에서 또다시 과거 기억이 엄습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