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54
54화
특허 도둑 (2)
“김성균 과장. 영생몰딩 말이야. 여기 하청 업체인가?”
“네. 저희가 오래 거래하던 곳입니다.”
하청의 특허를 빼 오는 건 늘 같은 방식이었다.
“가만 검토해 봤는데, 여기 지출이 상당하네?”
“예. 이중 코팅이라고 단열이 우수한 특허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로얄티가 좀 비싸긴 한데, 고객 만족도가 높아 이번에도 선정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1년에 30억씩 챙겨 가는 건 좀 그렇다. 고작 하청인데.”
이사님이 운을 떼자 김성균의 얼굴이 굳어졌다.
“슬쩍 한번 꼬셔 보지 그래.”
“무슨 말씀이신지…….”
“특허 좀 열람하자 그래.”
“이사님. 그건 좀 어렵습니다. 가진 게 특허밖에 없는 하청에 그걸 보여 달라 하면…….”
“빤한 의도를 안 들키는 것도 자네가 할 일이야. 아, 핑계야 많잖아? 특허를 한쪽만 아니까 업무 연계가 안 된다. 시공할 때 불편하다. 이만큼 오래 거래했으니 서로 믿어 보자.
응?”
새빨간 거짓말이다.
답안지를 이미 베꼈는데 굳이 오답을 적어 낼 필요 없지.
특허를 알아내면 막대한 로얄티 없이 원청이 직접 시공할 수 있다. 그렇게 단가를 아끼면 분양가도 낮아지고 소비자에게 돌아갈 이윤도 커진(?)다.
“아직도 못 알아들어?”
이사님이 그런 궤변을 한 시간째 늘어놨지만 김성균은 묵묵부답이었다.
소비자 이윤은 핑계고 결국은 특허 뺏어 오란 뜻이다.
“이제 보니 우리 김 과장은 참 정직한 사람이야. 내 밑에서 일하기엔 참 그릇이 커.”
“아, 아닙니다. 이사님.”
“아니긴 뭘. 이 바닥에서 자네처럼 정직한 사람은 처음일세. 아, 나 같은 놈한텐 이런 거 다 삐딱하게 보이거든.”
“…….”
“이중 코팅? 그래 봐야 겨우 도배·장판인데 이름만 요란하잖아? 이런 거 또 막상 특허 까 보면 별것도 없어. 특허 하나 쥐고 원청한테 알박기하는 거지.”
김성균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됐다.
내 밑에서 일하기엔 자넨 그릇이 너무 크다, 이건 대놓고 회사 나가라는 뜻 아닌가.
그의 머릿속엔 현장에서 형님 동생 하던 하청 사장 얼굴이 지나갔고, 애들 학원비를 닦달하던 집사람 얼굴도 지나갔다.
“……그럼 정말 단순히 열람만 하고 끝내실 겁니까? 저희가 법정 서면(열람 기록)을 쓰면 제가 한번.”
“이 친구 진짜 못 써먹겠구먼.”
“……예?”
“흔적 다 남기면서 볼 거면 뭐 하러 봐! 특허 열람하면 경쟁사한테 흘려서 생산 이원화할 거야. 그러다 나중에 원 업체 정리하고, 경쟁사도 정리하고 최종적으로 한명건설에서 특허
가져갈 거야. 내 입에서 이 말까지 나와야 알아 처먹겠어?!”
급기야 이사님은 육두문자를 날렸다.
“어차피 특허 소송은 누가 더 변호사 센 놈 쓰느냐 싸움이야. 누가 너더러 변호사 데려오래? 뒷일은 우리가 하겠다잖아.”
“죄, 죄송합니다 이사님. 그 뜻이 아니라.”
“그게 아니면 한 달 내로 그 특허 열람해서 내 앞에 가져와. 이걸 못 하겠으면 네놈 사표라도 가져오든가.”
그때 김성균은 사표 대신 하청 업체의 특허를 가져다 바쳤다.
곧이어 한명건설은 이중 코팅 단가를 반값으로 후려쳤고, 종국엔 그마저도 자사에 흡수해 버렸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 순진하던 김성균 과장이 나중엔 하청 업체 탈곡기가 될 것이라고.
이사님 말대로 김성균은 정말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
“날씨가 많이 춥네요.”
그래서였을까. 평범한 퇴근길이었지만, 준철은 선뜻 그를 지나칠 수 없었다.
“식사는 좀 하셨어요? 여기서 계속 계신 거 같던데.”
단식투쟁 3일 차에 접어든 그는 이미 기력을 많이 잃은 듯 보였다.
준철을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집에 계신 가족들도 생각하셔야지요.”
따뜻한 커피를 건네며 말을 붙여 봤지만 돌아오는 건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이렇게 일인 시위를 한다 해도 절박한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닙니다.”
“어차피 돌아갈 집도 없고 사업도 부도난 지 오랩니다. 젊은 사람이 안타까워 그러는 모양인데, 그냥 가던 길 가세요.”
“제가 사실 선생님 사건 담당 조사관입니다.”
그리 말하자 그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해서 몇 마디 나눠 보고 싶은데 자리를 좀 옮길 수 있을까요?”
“대답부터 먼저 들어 봅시다! 담당자면 내 사건 다 알죠? 버젓이 우리가 특허 도둑맞았는데 왜 수사 안 하는 겁니까.”
“일단 자리를 옮기고…….”
“어설픈 수작 마쇼! 난 이 자리에서 꿈쩍 안 해.”
그 기분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준철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사장님. 냉정하게 말해 선생님이 제보 주신 것만으론 수사가 어렵습니다. 특허 문제는 원래 법리가 애매해서 사안을 판단하기 힘들거든요.”
“그 얘긴 이미 중기부에서도 들었습니다.”
“그것도 치명적입니다. 중기부 중재안을 선생님이 거부하셨더군요. 이러면 재판으로 가도 사장님께 불리합니다.”
“중재안? 특허를 버젓이 도둑맞았는데 4천만 원 받고 합의하라는 게 중재안?! 나 이 특허 하나 만들려고 10년을 쏟아부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생고생해서 만든 이 특허권 되찾는
거지, 푼돈 먹고 떨어지라는 게 아니요.”
“중기부도 모든 걸 고려해서 내린 결론이 이 돈입니다.”
“그 사람들이야 일을 어떻게든 덮고 싶은 사람들이니까.”
그는 흥분을 주체 못 하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서 담당자면 사안 다 보셨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가진 디젤핀셋은 독일 3대 모터 특허와도 비견되는 특허예요.”
“…….”
“처음엔 좋았습니다. 대웅조선도 우리 특허 최고랍디다. 근데 어느 날부터 갖은 트집을 잡고 특허 열람하더니 갑자기 경쟁사 데려와 버렸습니다. 그 경쟁사라는 놈? 껍데기만 다르지
우리 피스톤이랑 똑같습디다. 특허 열람하고 그쪽에 정보 흘린 거라고요.”
마음이 아팠다.
김성균으로서 이미 한 번 겪어 본 그림이었으니.
“그럼 경쟁사에도 항의해 봤습니까?”
“하다 마다요! 근데 적반하장으로 나옵디다. 내가 가격경쟁에서 밀렸는데 왜 따지냐면서! 날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러는 놈으로 만들었어요.”
“…….”
“회사 부도 처리됐고, 난 이미 애 엄마와 이혼 직전입니다. 직원들 밀린 월급도 못 줘서 난 어차피 곧 감방 갈 처지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굶어 죽든 얼어
죽든 난 억울해서라도 이 자리에서 죽을 겁니다.”
섬뜩하게 들렸다.
그의 결연한 얼굴이 빈말이 아니란 걸 말해 주었기에.
“선생님. 그럼 제 제안을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준철은 목소리를 낮추곤 조심히 말을 꺼냈다.
“저희가 법리 따져 드리겠습니다. 억울한 부분이 있다면 최대한 밝혀내 드리지요. 단, 저희가 판단했을 때, 법리적으로 크게 문제없다 판단되면 사장님께서도 무모한 싸움 그만둬
주십쇼.”
“나는 어차피 물러설…….”
“아니면 수사 못 하고 이 지루한 싸움 계속하셔야 합니다.”
“…….”
“정말 타당한 일이었다면 분명 밝혀지겠죠. 약속드립니다. 최선을 다해서 이 사건 조사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요.”
준철은 강한 어조로 말하자 그의 얼굴이 소용돌이쳤다.
아무래도 ‘마지막’이란 말이 걸리는 모양.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조사를 받아 보자는 게 그가 2년 동안 원하는 일이었다.
“……정말입니까? 정말로 제대로 수사해 주실 겁니까?”
“네. 대신 약속해 주세요. 제가 조사했는데 안 나오면 그만두시는 겁니다.”
긴 생각을 하던 그가 피켓을 땅에 내려놓았다.
준철은 얼어붙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어려운 결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식사부터 하러 가시죠. 사장님께 듣고 싶은 얘기가 많습니다.”
***
“얼레리? 웬일이래. 그 사람 갔나 봐?”
“그러게요. 단식투쟁까지 벌이더니만.”
“배곯는데 장사 없다니까. 찰거머리 떨어지니까 이제 연초 분위기 나네.”
늘 시위하던 그가 조용해지자 여의도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공정위 직원들 모두 안도의 얼굴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출퇴근할 때마다 늘 섬뜩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나.
이 추운 겨울에 단식투쟁이라니. 정말 사람 하나 죽을까 봐 노심초사였다.
“어? 김 반장님. 오늘은 그 찰거머리 없네요.”
“그러게 말이다. 드디어 떨어졌나 봐.”
“아휴- 난 또 연초부터 못 볼 꼴 보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는데.”
“진짜 막무가내였지. 세상에 여길 쳐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종합팀 반원들의 발걸음은 다른 직원들보다 더 가벼웠다.
재수 없게도 사건을 배당받은 게 그들 아닌가?
적당히 하는 척 시늉해 주다 특허청으로 보내려 했는데 놈이 먼저 나가떨어져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찝찝한 일 하나가 자연히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 후련함은 준철의 출근과 함께 산산조각 나고야 말았다.
“예?!”
“한양테크요. 여기 조사 좀 해 주세요. 거기 원청이었던 대웅조선이랑 같이요.”
“팀장님…… 거기가 무슨 기업인지는 아시죠?”
준철은 텅 빈 창밖을 바라봤다.
최 사장이 약속을 지켰다. 고맙게도 오늘은 조용했다.
“네.”
“그걸 아시면 이럼 안 되죠! 저 사람 여기 공정위 앞에서 전국노래자랑 했던 양반이에요. 우리가 갑자기 이렇게 나서 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도 몇 마디 나눠 보니 대화가 아주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 사람하고 대화는 언제 나눠 보셨대요?”
“퇴근길에 잠깐.”
대충 둘러대며 준철이 서류를 건넸다.
“먼저 중기부에서 넘어온 자료, 이거 시간순으로 정리해 주세요.”
“하아…… 진짜 하실 겁니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요.”
“대체 어떤 부분이.”
“정황상 특허 탈취가 확실한데, 중기부에선 고작 4천만 원 합의금으로 끝내려 했단 말이죠.”
“티, 팀장님. 그게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아시잖아요. 이러면 우리랑 중기부랑…….”
“싸울 일 있으면 싸워야죠.”
반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수사기관 두 곳이 힘 싸움 하면 얼마나 피곤해지는데!
“솔직히 시비는 그쪽에서 먼저 건 거 아닙니까. 자기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우리한테 넘겼는데.”
“그야 그렇지만.”
“우리가 특허청에 넘기면, 특허청이 또 우리한테 공격을 해 올 수도 있는 문제예요. 차라리 우리 선에서 매듭짓는 게 나아요.”
그쯤 설명하자 반원들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직무유기로 털리는 것보단 차라리 중기부랑 싸우는 게 낫지.
“자료 좀 보고 나중에 과장님께 정식으로 수사 요청하겠습니다. 안되면 저도 그만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