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58
58화
특허 까 봐 (3)
D-2. 본청 발표 이틀 전.
중대한 발표를 앞두고 종합감시팀은 연일 밤샘 작업을 이어 갔다.
오 과장을 통해 본청 분위기는 다 전해 들었다. 되도록 나서고 싶지 않아 하는 분위기 아닌가.
“어휴- 이거 중기부에서 중재안만 안 내줬어도.”
“그러게요. 중재안 때문에 본청도 많이 꺼려 하는 분위기랍니다.”
그야말로 졸속 중재다. 이 정황들을 모두 보고도 4천만 원 소리가 나왔다니.
당연히 합의하란 소리가 아니라, 네들끼리 민사로 해결해라 하는 뜻이었을 거다.
“근데 어떡하죠. 이거 수사 확대되면 중기부랑 더 크게 싸워야 하는데.”
“그런 거 재고 따졌으면 애초에 만지지도 않았다.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
젊은 팀장의 성질은 이미 알지 않나?
중기부를 직무유기로 감사원에 고발해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다.
“팀장님. 요청하신 자료 다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자료 정리가 다 끝났을 땐, 브리핑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비몽사몽 잠에서 깬 준철은 힘없이 서류를 받아 들었다.
“또 한숨도 못 자셨습니까?”
“자도 잔 것 같지가 않네요.”
“벌써 그래서 어떡합니까. 이거 수사 떨어지면 더 날밤 새울 텐데.”
“막상 닥치면 또 정신 번쩍 들겠죠.”
하지만.
준철의 정신이 번쩍 뜨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장님…… 이거 다 사실입니까?”
“예. 대웅조선 이놈들 상습범이더군요. 근 5년 내에 특허 소송 당한 게 벌써 8번째입니다. 3억짜리 조명 기구부터 시작해서 핀지그캡, 피스톤 뭐 가리지 않고 다 뺏어 먹었어요.”
“이런…….”
“피스톤만 확인해 볼 게 아닙니다. 이놈들은 그냥 배 한 척을 통째로 해부해서 부품 다 확인해 봐야 할 정도예요.”
익히 예상했다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대웅조선은 선박 업체가 아니라 산업스파이 집단이었다. 티 안 나는 선박용 조명 기구부터 엔지니어들의 공법까지.
돈이 좀 된다 싶으면 무리하게 특허를 열람했고, 법으로 정한 서면(열람 확인서) 의무도 지키지 않았다.
‘노현석 회장…… 어쩐지 능수능란하더라니.’
과연 그 노인네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쳐 있을까?
얼핏 봐선 관여가 안 된 사건이 없어 보이는데.
“괜히 머리만 더 아파졌나요. 발표가 하루 앞인데.”
“오히려 더 위안이 되네요. 이렇게 흠이 많아야 수사 명분도 세워지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기업 없다지만, 이건 먼지밖에 안 보이는 기업이다.
확보된 자료는 발표를 앞둔 긴장감을 싹 날려 줄 정도였다.
“근데 사건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간 어떻게 다 피해 갔대요.”
“가장 큰 이유는…… 당국의 무심함이죠. 이런 신고가 접수돼도 대부분 나서지 않았습니다. 특허청이나 중기부나, 그리고 저희나.”
당국에 신고가 접수되어도 모두 발 빼기에 급급했다. 그건 지금도 실시간으로 체감하고 있지 않나. 원·하청이 민사소송으로 가면 하청의 필패다.
이 처참한 보고서는 무관심을 먹고 자란 괴물들이다.
“딴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기술유용팀이 감정 제대로 해 주지 않으면 이번에도 필패예요.”
전문 기술이 축약된 얘기를 공정위 직원이라고 얼마나 잘하겠나. 이건 반드시 전문가가 붙어야 한다.
김 반장이 우려를 표하자 준철이 굳은 얼굴로 서류를 덮었다.
“수사 반드시 떨어집니다. 저만 믿으세요.”
***
브리핑 당일.
모처럼 본청 공정위가 시끌벅적했다. 지방 공정위에서 본청에 보고를 올리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본청에서 오더가 내려가는 경우 아닌가.
이런 역보고는 민감한 사항이거나, 수사에 전문 인력이 필요할 때뿐이다. 이번 사건은 이례적으로 그 둘 다에 해당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중기부가 중재안 내준 걸 왜 하겠다는 거야? 중재안은 거부한 쪽이 불리하다는 걸 모르나.”
“그러게 말이야. 가만두면 민사로 다 해결될 문제인데.”
“들어 보니 이번 수사 맡은 게 그놈이래. 올해의 공정인상 탄 놈.”
“뭐? 그 행시 출신 풋내기?”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시선이 곱지 않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가 설치는 꼴로 보였기 때문이다.
“팜플릿은 또 왜 이렇게 길어?”
“이 친구 아주 그냥 대웅조선을 다 들쑤셔 놨네.”
대웅조선의 특허 시비를 모두 나열한 팜플릿도 마음에 안 들었다. 보통 자기 생각에 확신이 없으면 말이 길어지는 법.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그 소란은 얼마 가지 못했다.
“아, 아니 위원장님께선 여긴 왜…….”
“뭘 그리들 놀라? 내 뒤에 귀신이라도 있어.”
“아닙니다. 한데 여긴 어인 일로?”
“일하려고 왔지 별일은 무슨.”
예고도 없이 박기철 위원장이 등장해 버렸기 때문이다.
대학생 조별 발표하는데 갑자기 총장님이 방문해 버린 격이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술유용국장의 얼굴만 바라봤다.
“브리핑 주제가 뭐길래 쩔쩔매고 있나. 혹시 나 있으면 안 되는 자린가.”
“그럴 리가요, 대웅조선의 특허 탈취 사건입니다.”
“으흠. 주제 한번 마음에 드는구먼. 작년에 우리 특허 갑질 사건은 한 건도 성공한 게 없는데. 정초에 딱 어울리는 주제야.”
“일단 앉으십쇼. 미리 말씀하셨다면 따로 자리를 마련했을 텐데.”
“됐어. 없는 사람 치고 해.”
있는 사람을 어떻게 없는 사람으로 칩니까.
국장은 얼굴로 그리 말하며 상석을 양보했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앞에 있는 브리핑에 집중해야 하나, 옆에 계신 위원장님에 집중해야 하나…….
한편 그 시각.
기술유용국장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과장님. 이 자리 원래 원장님까지 오기로 돼 있었습니까?”
“……나도 몰랐어. 위원장님이 왜 계시지?”
위원장님의 느닷없는 방문에 손에 진땀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팜플릿이라도 깔끔하게 만들걸! 수사 따내려고 문제가 될 만한 거 다 집어넣었는데. 지금 보니 어린애가 떼쓰는 수준의 팜플릿이다.
“이 팀장. 그래도 위원장님이 우리 팜플릿을 꼼꼼하게 읽는 것 같다. 징조가 좋아 보이네.”
오 과장이 위로랍시고 어깨를 두들겼지만 긴장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쫄 거 없잖아! 나한테 늘 하던 대로 들이받아. 원래 말빨로 사람 홀리는 거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네…… 응원 감사합니다.”
저게 응원인가, 핀잔인가.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준철이었다.
***
귀빈을 모신 자리이니만큼 준철도 긴장했다.
하지만 쫄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했던 말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 아닌가?
종합감시팀은 이번 수사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 수많은 자료를 본청에 보냈다.
준철이 하는 일은 이걸 상기시키며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전문가들의 소견입니다. 주지했다시피 저희는 경쟁사 두 곳의 피스톤을 드린 바 있습니다. 본청 기술유용팀이 제품 분석을 해 주시면 수사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발표가 끝나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아, 눈치 보지 말고들 해. 없는 사람 치라니까. 발표자한테 뭐 질문 없어?”
그리 운을 떼자 한 사내가 손을 들었다.
“현재 가장 찝찝한 부분에 대해서 먼저 질문하고 싶습니다.”
“네, 말씀하십쇼.”
“중기부에서 중재가 들어간 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거부는 하청이 했더군요.”
“네.”
“이러면 하청이 불리하다는 것 아시죠? 그리고 우리가 덜컥 끼어드는 것도 모양새가 안 좋아 보입니다.”
“먼저 설명드리자면, 이건 중기부에서 저희한테 넘어온 사건입니다. 그러니 끼어들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준철은 공격적인 질문에도 당당히 소리를 높였다.
차라리 다행이다. 저리 나와 주니 앞에 있는 위원장이 덜 의식되었다.
“그리고 중기부에서 흐지부지 끝난 걸 우리까지 거부하면 민사소송을 갈 수밖에 없는데…… 이럼 사실상 대웅조선에 면죄부를 주는 거죠.”
“민사도 엄연한 소송입니다. 이걸 면죄부라 부를 수 있습니까.”
“변호사 더 센 쪽이 이기는 싸움인데, 우리가 안 하면 그게 면죄부죠.”
“아니…….”
“모든 정황을 살펴보면 특허 도용이 명백합니다. 그럼 우린 특허 유출을 누가 시켰는지, 최종 배후는 누구인지 전부 파악해야죠. 민사로 이게 어떻게 밝혀지겠습니까.”
두 사람 간에 말싸움이 붙자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그건 너무 단정적입니다. 아닌 말로 경쟁사가 비슷한 특허를 개발할 수도 있었던 거잖아요.”
“그러기엔 너무 이상한 정황이 많아요. 대표적으로 특허 열람. 그럼 대웅조선은 왜 하청 기술을 열람했겠습니까.”
“뺏으려고 열람했다는 겁니까?”
“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에는 노현석 회장이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 판단합니다.”
회장 이름이 직접 거론되자 소란이 더 커졌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박기철 위원장의 반응이었다. 온통 민감한 얘기들투성이인데 되레 웃음을 터트리고 있지 않나.
“상식적으로 이런 결정이 회장에게 보고되지 않고 이뤄지지 않았을 거란 말이죠. 또한 대웅조선은 특허 시비가 이번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팜플릿에 나열된 대로 크고 작은 시비만
8건. 그야말로 뺏을 수 있는 건 다 뺏었습니다.”
이런 장기간의 비리를 회장이 몰랐다면 말이 안 된다. 정말 그랬다면 무능한 것이고.
“솔직한 심정으론 그냥 배 한 척 골라서 다 해부해 보고 싶습니다. 그간 뺏어 온 특허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 어떻게 배 한 척을 다 해부해?’
‘저런 미친놈을 봤나.’
‘팜플릿에 나열된 걸 다 밝혀내겠다는 거야?’
청중들도 포기했는지 이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던 사내만 기가 찬 얼굴로 말했다.
“아니 대체 그건 방법이 있는 얘깁니까? 대웅조선한테 배 달라고 하면 주겠어요?”
“안 주면 우리도 뺏어 와야죠. 중기부가 생산제재 내려 주면 수사 협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 생산제재?”
“네. 원청의 책임이 있어 보이는 특허 분쟁은 생산을 제한할 수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 중기부도 이 사건 성의 없이 본 겁니다. 이건 당국에도 책임이 있죠.”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건드려선 안 될 놈 같았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감당하기 힘든 방책만 내놓는다.
위원장만이 이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끝? 더 이상의 질문 없나?”
주변이 조용했다. 위원장님이 결정하란 뜻이다.
“재밌는 얘기구먼. 중기부가 성의 없이 중재안 낸 걸 트집 잡아서 생산제재까지 끌어내야 한다니.”
그는 허허실실 웃으며 옆에 있는 국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근데 심 국장. 이거 진짜 배 한 척 골라잡아서 다 뜯어 볼 수 없나?”
“예?”
“들어 보니 이것들 상습범이구먼. 저 친구 말대로 분명 드러나지 않은 특허 탈취가 더 많을 거야.”
“그야 그렇지만…….”
“기회 줄 테니까 한번 해 봐. 배 한 척 다 분해해 보면 아주 볼만하겠네.”
그리 말하자 참았던 신음들이 터져 나왔다.
이 회의실에서 진짜 미친 사람은 따로 있었다.